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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건[太祖王建]

한반도를 재통일한 고려의 건국자

877년(헌강왕 10) ~ 943년(태조 26)

태조왕건 대표 이미지

태조왕건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고려를 세워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877년(헌강왕 3)에 태어나 943년(태조 26)에 사망하였다. 지금의 개성(開城)인 송악(松嶽)의 호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弓裔)의 부하로 있다가 그를 제거하고 왕위를 차지하여 918년(태조 원년)에 고려를 세웠다. 이후 후삼국 시대의 전란 속에서 신라의 항복을 받고, 이어 견훤(甄萱)이 세운 후백제를 무력으로 꺾어 936년(태조 19)에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용건(龍建; 이후 왕융으로 개명)이며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로 추봉된 한씨(韓氏)였다. 29명의 부인을 두었고, 그 사이에서 26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를 자녀로 얻었다. 능은 현릉(顯陵)이며, 시호는 신성(神聖)이다.

2 송악 출신의 젊은 호족, 궁예의 휘하로 들어가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꺾고 한반도의 통일을 이룬 것은 668년(문무왕 8)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통일신라는 8세기 중반을 지나며 점차 혼란에 빠져들었다. 중앙의 귀족들이 왕위와 권력을 둘러싸고 극심한 권력 투쟁에 돌입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이에 전국적으로 조세 납부를 거부하는 현상이 발생하였으며, 지역별로 유력자들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경주(慶州)의 신라 조정에서 이탈하는 경향이 급속도로 심해졌다. 이러한 유력자들을 호족(豪族) 혹은 성주(城主)·장군(將軍)이라 통칭한다. 한반도 전역에서 수많은 호족들이 등장했고, 그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낸 것은 훗날 후고구려를 세우는 궁예와 후백제를 세우는 견훤이었다. 이들은 각각 현재의 철원과 전주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주변의 호족들을 포섭 혹은 제압하며 세력을 키웠다.

궁예가 강원도 일대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리자, 그 주변의 호족들은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했다. 896년(진성여왕 10), 송악은 궁예에게 귀부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용건, 즉 왕융(王隆)은 “대왕께서 만약 조선(朝鮮)·숙신(肅愼)·변한(卞韓) 땅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저의 장자를 성주(城主)로 삼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고 하였다. 이에 왕건은 20세의 나이에 발어참성(勃禦槧城)을 쌓고 그 성주에 임명되며 궁예의 조정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들의 근거지인 송악은 궁예 세력의 도읍이 되었다. 이후 궁예의 세력은 날로 확장되어, 점차 지금의 황해도와 경기도 지역까지 그 판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3 왕건, 궁예 군을 이끌고 전장을 누비다

궁예는 자신의 휘하로 들어온 젊은 왕건을 중용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900년(효공왕 4)에 궁예는 왕건에게 군의 지휘를 맡겨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북부 지역을 공략하도록 하였고, 왕건은 그 기대에 부응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靑州)·당성(唐城)·괴양(槐壤) 등의 군현을 성공적으로 공략한 왕건에게 궁예는 아찬(阿湌)을 제수하여 포상하였다. 궁예는 왕건에게 계속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903년에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통해 후백제의 후방 깊숙이 위치한 금성군(錦城郡)을 공략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지금의 나주(羅州) 지역이다. 이는 전략적으로 상당히 파격적이면서 위험도가 높은 임무였다. 왕건은 금성군과 그 주변 10여 군현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이를 통해 궁예는 견훤의 영역 배후에 군사적 거점을 마련하는 한편, 후백제가 중국 대륙과 왕래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었다. 또 왕건은 이곳의 호족인 다련군(多憐君)의 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그녀가 바로 훗날 2대 국왕으로 즉위하는 왕무(王武)를 낳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니, 왕건에게도 이 임무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고 하겠다. 그가 무려 29명의 부인을 두게 되는 것은 이렇듯 유력한 호족이나 부하들과 혼인을 통해 결속을 다졌던 결과였다.

이 뒤로도 왕건은 승승장구하였다. 최전방에서 후백제군과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였고, 그러한 노력과 성공의 대가로 913년(수덕만세 3)에는 파진찬(波珍湌)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이 시점까지 궁예와 왕건의 만남은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궁예는 왕건을 등용하여 자기 세력의 판도를 크게 넓힐 수 있었고, 왕건은 궁예의 조정에서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고려사절요』에는 당시 궁예가 기뻐하여 좌우의 신하들을 보고 말하기를,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견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4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다

그러나 권력과 정치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고려사절요』에서는 “태조가 궁예의 교만함과 포학함을 보고는 다시 뜻을 변방에 두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세운 공에 비해 포상이 적다고 불평하는 부하들에게 “삼가하고 태만하지 말라. 오로지 힘을 합하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주상께서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뜻을 얻어 조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하니, 조정 밖에서 정벌에 종사하면서 힘을 다하여 왕을 보필하는 것만큼 나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당시 궁예는 점차 포악한 정치를 펼쳐 신하들의 불만과 두려움을 샀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기록이 고려 건국 이후 왕건의 입장에서 작성된 것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당시 왕건에게 독자적인 지지 세력이 생겼다는 사실이고, 결국 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을 필두로 하는 이 세력은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새 왕으로 추대하였다. 혹은 왕건이 이들을 이끌고 왕위에 올랐다고 해야 적절할까? 새 나라의 국호는 고려(高麗), 연호는 천수(天授). 918년 6월의 일이었다.

5 왕건과 견훤,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겨루다

이제 한반도의 판도는 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가 자웅을 겨루는 형세로 바뀌었다. 8월에 후백제에서 고려에 보낸 즉위 축하 사신이 돌아간 지 채 두 주도 지나지 않아, 웅주(熊州)·운주(運州) 등 10여 지역이 고려를 버리고 후백제로 붙었다. 긴장의 시작이었다. 920년(태조 3) 10월에 고려와 후백제는 신라를 사이에 두고 갈등을 빚었다.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고, 고려가 이에 응하자 후백제가 고려를 적대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두 나라는 일시적으로 화친을 맺기도 하나, 강한 군사적인 충돌을 이어갔다.

공방을 거듭하던 927년(태조 10) 10월, 고려는 후백제에게 뼈아픈 대패를 당했다. 당시 견훤이 직접 군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더니, 급기야 수도 서라벌을 함락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견훤은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서라벌을 노략질하는 한편, 새로 경순왕을 세웠다. 신라는 이미 무력으로 고려나 후백제와 견줄 수 없는 최약체로 전락하여 있었다. 고려가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다져 나가자, 후백제가 이를 무력으로 저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 왕건은 직접 5천의 기병을 이끌고 견훤을 향해 진격했다. 고려군은 지금의 대구 인근인 공산(公山)의 동수(桐藪)에서 후백제군과 격돌하였으나, 대패하고 왕건이 아끼던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 두 장수마저 전사하고 말았다. 왕건은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견훤은 그 기세를 몰아 고려를 몰아쳤고, 이후 929년(태조 12)까지 고려는 수세에 몰려 있었다. 이 무렵 견훤이 보낸 국서에서 “내가 바라는 바는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어 놓고 대동강의 물가에서 말을 물 먹이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던 때, 왕건은 아마도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6 최후의 승자 왕건, 한반도를 통일하다

이후의 기록을 읽다 보면, 갑자기 반전이 벌어진다. 929년(태조 12) 12월, 왕건은 견훤에게 포위된 고창군(古昌郡), 즉 지금의 안동(安東) 지역을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몸소 출정하였다. 유금필(庾黔弼)의 분전으로 포위를 뚫고 고창으로 들어간 고려군은 이듬해 1월, 8천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견훤을 도주하게 하였다.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현지의 호족들인 김선평(金宣平)·권행(權行)·장길(張吉)의 협력 덕분이었다. 이후 영안(永安) 등 30여 군현이 투항하고, 다음 달에는 강원도와 경상도 일대의 110여 성이 고려로 붙었다. 고려 쪽으로 운명의 흐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우연이었을까?

우연이라기보다는, 왕건이 즉위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했던 호족들에 대한 회유와 유화책이 효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특히 옛 신라의 영역에 속했던 지역의 호족들로서는 아무리 독자 세력으로 살고 있다고 해도 신라의 수도를 짓밟은 견훤에게 우호적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견훤은 몇 차례 반전을 노리며 공격했으나, 마침 벌어진 권력 승계 갈등으로 인해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견훤이 고려로 투항하고, 936년(태조 19)에 반역자인 아들을 벌해달라며 후백제 정벌의 도화선을 지핀 것은 아마 우리 역사에서 손꼽히는 희극 혹은 비극의 한 장면이 아닐까.

936년(태조 19) 6월, 왕건은 아들 왕무에게 선봉을 맡겨 후백제 공격군을 출병시켰다. 그리고 9월, 직접 본진을 통솔하여 진군한 왕건은 일리천(一利川)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그대로 도읍 완산주까지 점령하였다. 이미 신라는 935년(태조 18)에 고려에 항복한 상태였다. 이렇게 하여 40년 가까이 계속되었던 후삼국의 쟁패는 끝이 나고, 고려가 통일을 이루어 한반도의 유일한 패자로 올라섰다.

7 새 나라의 기틀을 세우다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이룬 후 7년을 더 살다가 사망하였다. 후대에 벌어진 거란과의 전쟁에서 개경이 점령되면서 국초의 기록이 크게 사라져, 통일 후 7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기록이 극히 소략하다. 그가 신하들에게 내렸다는 「정계(政誡)」와 「계백료서(誡百寮書)」는 그 이름으로 보아 신하들의 기강을 세우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후대의 왕들을 위해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통치의 주요 방향을 제시하였다.

왕건은 즉위 이후부터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금을 1/10로 감면해 주었고, 서경(西京)에 학교를 세웠으며,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풀어주고 호족들이 백성들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였다. 유학을 공부한 이들을 발탁하는 한편, 고승들에 대해 극진한 예우를 다하였다. 공을 세운 신하들을 포상하기 위해서는 역분전(役分田)을 제정하였다. 왕건이 내렸던 여러 가르침들은 ‘태조의 유훈(遺訓)’으로서 고려 왕조 내내 크게 존중되었다. 태조 왕건. 그는 이후 500년 가까이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려를 세운 위대한 건국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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