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2년(영조 38) ~ 1836년(헌종 2)
정약용은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를 모두 겸비하여 실학을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일찍이 성호학풍을 접하여 제도개혁론으로서 경세치용의 실학방법과 서학지식을 습득하였다. 또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와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읽고 이용후생학의 영향도 받았다. 그밖에 양명학, 고증학, 서학 등을 폭넓게 수용하여 유교경전해석에 창의적으로 활용하였다.
18년간의 유배기간을 자신의 학문을 연마하는 계기로 삼아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와 일표이서 즉,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의 경세론 등 500여 권의 대저술을 남겼다.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이상적 사회를 희구하며 현실 개혁의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경학을 연구하였고, 조선사회의 현실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일련의 개혁론을 전개하였다.
정약용의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나주 정씨 13대조 정윤종의 아들 정자급 때부터 벼슬을 하여 5대조 정시윤에 이르기까지 8대가 잇달아 옥당에 올라 대대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승문원 교리 정자급부터 참판 정수강, 판서 정옥형, 좌찬성 정응두, 대사헌 정윤복, 관찰사 정호선, 교리 정언벽, 참의 정시윤 등이 모두 홍문관에 뽑힌 것이다. 조선왕조의 이름 있는 선비 집안에서는 홍문관의 벼슬아치로 선발되는 것을 지극히 영예롭게 여겼다. 정약용 자신도 집안 자랑을 할 때는 항상 8대 옥당집안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정약용의 고조와 증조, 조부는 벼슬에 나가지 못하였고 부친대부터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부친 정재원(丁載遠)은 영조의 특지로 벼슬길에 올라 연천현감, 화순현감, 예천군수, 호조좌랑, 한성서윤, 울산부사, 진주목사 등을 지냈다. 외가는 해남 윤씨로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자인 윤두서(尹斗緖)의 외증손자가 정약용이다. 정약용의 용모는 외가를 닮아서 외증조인 윤두서와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정약용은 자신의 친가가 학자 가문, 외가가 예술가 가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에 정재원과 둘째 부인 해남윤씨 사이에서 4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정약용이 출생하기 한 달 전, 사도세자 사건(思悼世子 事件)이 일어나자 정약용의 부친은 낙향해버렸는데 그래서 어릴 때 정약용의 이름이 귀농이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어머니는 아홉 살에 일찍 여의었다. 정약현(丁若鉉),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 등 세 형이 있었는데 둘째 형 정약전과 가장 친밀하였다. 정약전은 정약용이 옛 주석과 다른 독자적 해석을 하면 무릎을 치며 찬동해주면서 그의 학문을 독려하곤 하였다. 또 정약현의 부인인 큰 형수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정약용을 보살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10대 중반 무렵 누님의 남편인 이승훈(李承薰)과 큰 형의 처남인 이벽(李蘗), 그리고 이승훈의 외삼촌인 이가환(李家煥) 등과 교유하면서 성호 이익(李瀷)의 학풍을 접하게 되었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1779년, 정조 3)에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하여 이 해 겨울 성균관 승보시(생원진사시 응시자격시험)에 합격하였고, 스물두 살(1783년, 정조 7)에 소과 1, 2차 시험을 모두 합격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임금에게 사은하는 행사가 있던 날 정조[조선](正祖)를 처음 만났는데 앞으로 자신의 학문 연마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1784년(정조 8, 23세) 큰형수의 제사를 지낸 후 서울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정약전과 함께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천주교에 빠져들었다. 당시의 감회를 ‘천지가 창조되는 시초나 육신과 정신이 죽고 사는 이치를 들으니, 황홀하고 놀라웠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이 날 처음 접한 천주교는 20대의 정약용을 사로잡으면서 일생을 두고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소과에 합격한 이후 대과는 번번이 실패하다가 1789년(정조 13) 드디어 28세의 나이로 합격한 후 39세까지 약 12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였다. 첫 관직은 희릉 직장(종7품)이었다. 바로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뽑히고 승정원의 가주서(정7품)로 승진하였다.
초계문신으로 발탁된 정약용은 규장각에서 검서관 이덕무(李德懋), 박제가 등 북학파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박제가의 시와 문장을 좋아했고 종두법을 함께 연구하기도 하였다. 이 해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을 위한 첫 조치로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하여 현륭원으로 조성하였는데 이때 정약용이 배다리 설치의 설계를 담당하였다.
이듬해(1790년, 정조 14)에는 우의정 채제공의 천거로 한림직인 예문관 검열(정9품)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에서 격식에 어긋나는 추천이라고 비판하자 사직상소를 두 차례나 올리고 열흘 간 해미에 유배되었던 일도 있었다. 그 후 예문관 검열, 사간원 정원(정6품), 사헌부 지평(정5품) 등으로 연속 승진하며 순탄한 관직생활을 이어갔다.
1792년(정조 16, 31세) 부친상 중임에도 왕명으로 화성 설계를 담당했고, 1794년(정조 18, 33세)에는 사도세자의 존호를 높이기 위해 설치된 경모궁추상존호도감 도청에 임명되었으며, 경기지역 암행어사로 파견되는 등 왕의 가까운 곳에서 왕의 눈과 귀가 되는 중요한 일들을 맡았다. 다음해(1795년, 정조 19)에도 사간원 사간(종3품), 승정원 동부승지(정3품), 우부승지(정3품)까지 오르더니 갑자기 금정역 찰방(종6품)으로 좌천되는 일이 생겼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여 전교하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약용이 연결되었다고 의심을 받게 되었던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이때 함께 공격을 받은 이가환도 충주목사로 좌천되었고, 이승훈은 예산으로 유배되었다. 충주나 금정은 천주교 신도들이 많은 지역이었으므로 그곳의 천주교도들을 개종시키는 공적을 세움으로써 비판에서 벗어나는 기회를 삼으라는 정조의 뜻이 들어있는 조치였다. 실제로 정약용은 금정에 있는 동안 적극적으로 천주교도들의 교화에 힘썼다. 특히 열성적인 천주교 전교자 이존창의 체포에 공을 세워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1797년(정조 21, 36세) 동부승지에 임명되면서 다시 왕의 옆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 관련 혐의는 쉽사리 벗겨지지 않아서 끊임없이 비방이 이어지자 정약용은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혀야겠다고 생각하고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辯謗辭同副承旨疏)」를 올렸다.
자신이 한때 깊이 빠져들었던 천주교 신앙을 버리게 된 이유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정조는 이 글을 읽고 문장이 좋고 생각이 분명한 글이었다는 평가를 내렸지만 주위의 비난은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정조는 결국 상황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를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냈다.
좌천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지만 정약용은 목민관으로서 직접 피폐한 민생을 구제하고 누적된 폐단을 바로잡는 행정을 펼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삼았다. 그는 이 시기에 민생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저술을 하였는데 천연두 치료법을 소개한 『마과회통(麻科會通)』과 농업발전을 위한 상소문 「응지논농정소」이다. 「응지논농정소」는 농서를 구하는 왕의 윤음에 응해서 올린 글인데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성격으로 올린 박지원의 『과농소초(課農小抄)』와 박제가의 『진소본북학의』와 비교해볼 만하다.
곡산부사로서 약 2년간의 외직을 마친 후 1799년(정조 23, 38세) 형조참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800년(정조 24, 39세) 또다시 천주교 연관 문제로 공격을 당한 후 형조참의를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사직소에서 그는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쏟아진 비방에 얼마나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했는지를 격정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정조가 재차 부르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조는 세상을 뜨고 말았고 정약용의 관직생활도 여기서 끝났다. 이후 그는 고향집에 ‘여유당(與猶堂)’ 이란 이름을 붙이고 조심조심 살아가고자 했으며 아들들에게도 말과 행동을 의심받지 않도록 당부했다.
그러나 이러한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는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대대적으로 천주교도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연루되어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백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강진에 유배되었다.
1818년(순조 18)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약 18년간의 길고긴 강진유배기는 그의 생애에서 참담한 시절임에는 틀림없지만 동시에 이른바 ‘다산학’이라고 이름할 만한 대저술이 만들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해배 후 1822년(순조 22) 회갑을 맞은 그는 자신의 60평생을 돌아보며 자찬묘지명을 작성하였다. 묘지명을 자찬하는 경우가 흔하지도 않을 뿐더러 무덤 속에 넣을 광중본과 문집 속에 수록할 집중본으로 두 종류를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삶과 학문을 성찰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의 성정을 읽을 수 있다.
죄와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을 돌아보며 남은 생을 새롭게 시작하리라는 다짐과 함께 지난 날 자신이 거둔 학문적 성과를 자랑스러워 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만년을 자신의 저술을 수정 보완하고 이재의(李載毅), 홍석주(洪奭周), 홍길주(洪吉周), 홍현주(洪顯周), 김매순(金邁淳), 신작(申綽) 등 당대의 석학들과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지내다가 1836년(헌종 2)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만년에 사용하였던 호는 다음 시대를 기다리겠다는 뜻을 담은 ‘사암(俟菴)’이었다.
정약용의 생애를 돌아보면, 성호학파를 접하고 과거공부를 시작하는 10대, 소과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대과에 합격할 때까지 학문을 수련하고, 한편으론 천주교에 빠져들기도 했던 20대, 관직에 나아간 30대, 유배기 4~50대, 해배 후 노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또 그의 관직생활의 의의를 정리하자면, 내직에 있을 때는 학문 연마를 통해서 얻은 방대한 지식과 체계적 논리를 바탕으로 정조의 정책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고, 외직에 있을 때는 지방행정의 현장과 민생의 실상을 직접 대면하면서 평소 닦아온 학문적 이론을 현실에 직접 적용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점이다.
정약용은 ‘육경사서로써 자신을 닦고 일표이서로써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니 본말을 갖춘 것’이라고 자신의 학문에 대해 자평하였다.
그는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로 경학체계를 세웠고, 일표이서의 저술을 통해 경세론을 제시하였다.
그의 경학체계는 정밀한 고증과 창의적 사유의 결과물이었다. 그는 경전을 해석할 때 반드시 경전에 근거하였다. 육경과 사서는 그 본래의 뜻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옳고 그름과 잘잘못을 반드시 경전에 의거해서 결단하면 확신하고 통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경전해석의 방식은 창의적 사유로 연결되어 독자적인 해석을 낳았다.
그가 초기 경학을 연마해가는 과정은 성균관 유생 시절에 정조의 격려를 받으면서 이루어졌다. 정조의 질문에 대해 답안을 작성하거나 강의 혹은 토론 등을 하며 학문수련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균관에 입학한 다음해인 1784년(정조 8, 23세) 『중용』에 관한 정조의 질문 70조목에 대해 이벽과 토론하여 대답을 정리하여 『중용강의』를 작성하였다. 정약용이 처음으로 경전을 해석한 저술이었는데 주자의 성리학적 해석을 벗어나 『중용』 전반을 독자적으로 새롭게 해석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정조는 ‘특이하다’, ‘견해가 명확하고 공정하다’ 라고 하며 정약용의 답안을 첫째로 삼았다. 1791년(정조 15, 30세)에는 정조가 제시한 『시경』에 관한 의문점 800여 조목에 대해 대답을 정리하여 『시경강의』를 작성하였는데 폭넓은 고증과 정밀한 경전해석을 극찬하는 정조의 친필 비답을 받았다.
이후 유배기간에 본격적으로 육경사서 연구에 힘쓴 그는 예경과 주역 연구를 시작으로 육경사서에 대한 저술을 차례대로 완료하였다. 젊은 날에 썼던 『중용강의』와 『시경강의』도 증보하였다. 『시경』, 『서경』, 『예경』, 『악경』, 『주역』, 『춘추』 등 육경과 관련하여 『시경강의(詩經講義)』와 『시경강의보』, 『매씨서평』, 『상례사전(喪禮四箋)』, 『악서고존』, 『주역사전(周易四箋)』, 『춘추고징』 등의 연구서를 낸 후 이어서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사서와 관련하여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맹자요의(孟子要義)』, 『중용강의(中庸講義)』와 『중용강의보』, 『대학강의(大學講義)』 등을 저술하였다.
육경사서의 경전해석을 마친 후에는 『소학』과 『심경』의 주석 작업에 들어갔다. 경전연구에 이은 수양론의 실천이었는데 『소학지언』과 『심경밀험』은 그 결과물이었다. 그는 소학과 심경은 여러 경전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라고 하면서 소학으로 행동을 다스리고 심경으로 마음을 다스린다면 어진 사람이 되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술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상례사전』과 『주역사전』을 들었다. 이 두 저서만 계승할 수 있다면 나머지 것들은 폐기하더라도 괜찮다고 하였다.
정약용의 경세론은 경세치용학과 이용후생학의 결합으로서의 경세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경전에 대한 저서를 제일 우선으로 해야 하고 그 다음은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어주는 학문이며, 국방과 여러 가지 기구에 대한 분야도 소홀히 할 문제가 아니라고 하였다. 또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그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이라고 하였다.
모두 학문은 경전연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경세론으로 나가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18년 유배기간 동안 이루었다고 자부했던 경전 연구였지만 학문의 반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1817년(56세)에 『경세유표』를 시작으로 1818년(57세)에는 『목민심서』를, 해배 후 1819년(58세)에는 『흠흠신서』를 저술하기에 이르렀다.
낡은 우리나라를 새롭게 해보려는 생각에서 『경세유표』를 지었다고 한 그는 특히 토지개혁문제에 관심이 컸다. 특권양반과 부호들이 토지를 겸병하고 수탈함으로써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소작농과 유민으로 전락해가는 당시의 실정을 우려하며 지주제도의 폐해를 없앨 토지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공전 1구를 매입하고 사전 8구를 경작하게 하여 공전 1구의 수확물만 공세로 납부하게 하고 사전의 수확물은 자기의 소유로 하게 한다는 구상은 농민에 대한 수탈을 배제하고 국가의 재정증대와 농민의 유민화 방지를 모두 이룰 수 있는 개혁안이었다.
토지개혁 등의 제도개혁론과 아울러 기술발전론 및 상공업발전론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용감을 설치하여 북학을 전담하게 하고 중국의 선진기술을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북학파에 의해서 꾸준히 제기되었던 중국의 신기술 도입론을 국가기구로 제도화하자는 것이었다.
또 농업은 사·농·공·상·포·목·우·빈·주(士農工商圃牧虞嬪走)의 9직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하였다.
공업이나 상업 모두 농업 못지않게 똑같이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상공업에 대한 말업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농공상을 직업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사회적 분업을 보장하자는 것이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