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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우회[槿友會]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해방을 외치다

1927년 ~ 1931년

근우회 대표 이미지

근우회가 발간했던 잡지 『근우』 창간호(1929년 5월)

현담문고

1 개요

1927년 5월 27일 창립총회를 통해 결성된 근우회(槿友會)는 민족주의 계열 및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자들을 망라한 식민지 시기 최대의 여성단체였으며, 민족 해방을 포함해 여성이 처해 있던 사회 현실의 타파, 여성의 경제적 지위 및 의식 향상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2 근우 창립 배경

1919년 3·1운동은 조선총독부의 통치 방침에 영향을 주어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문화통치’는 경찰력의 증강을 바탕으로 한 기만적 통치방침이었으나 역설적으로 그간 조선인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공간이 일부나마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공간 위에서 각 분야로부터 사회운동이 활발해졌고, 여성운동도 그중 하나였다.

먼저 여성교육과 계몽을 중심에 두었던 여성단체들이 1920년대 전반 주된 여성운동의 명맥을 형성하였다. 조선여자교육협회(朝鮮女子敎育協會)와 조선여자고학생상조회(朝鮮女子苦學生相助會) 등 여성의 교육 및 계몽을 통한 생활개선을 도모하는 단체들이 여럿 생겨나 활동하였다. 특히 종교 단체, 그중에서도 기독교에 기반을 둔 여성들은 활발하게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1920년대 초반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유각경(兪珏卿), 김활란(金活蘭) 등이 주축이 되었던 조선여자기독청년회연합회(YWCA)가 있었다. YWCA는 근우회 창립 전까지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여성단체였다. 이들은 강연회, 강습 등을 통해 여성에게 신지식을 보급하고 여성의 지위 향상 및 해방을 주창하는 한편, 축첩 폐지, 공창제 폐지 등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여성단체들의 활동은 1920년대 민족주의 여성운동의 흐름을 형성했다.

한편 1920년대 초 조선에 사회주의 사조가 소개되고 사회주의 이론에 입각한 사회운동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하면서 여성운동에서도 사회주의적 여성해방 이론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여성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무산계급 여성, 여성노동자들이 여성운동 및 여성해방의 주체라고 보았으며 궁극적으로는 무산계급운동에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단순한 여성의 지위 향상에 운동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여성운동이 사회변혁운동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1924년 5월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가 창립되었으며, 사회주의 여성단체들이 각 분파마다 조직되었다. 북풍파(北風派)·화요파(火曜派) 계열의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 및 서울파의 경성여자청년회(京城女子靑年會)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위의 민족주의 계열 여성운동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은 각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종교적 기반으로 인하여 여성의 권리에 대해 보수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여성 대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산계급 여성들의 현실을 타개해 줄 구체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1923년 이후부터는 비교적 침체 상태에 접어든 상태였다.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첨예한 이론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에 의한 도시 중심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역시 여성의 대다수인 지방과 농촌 여성들에까지 대중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26년 초 조선 사회운동계에 민족협동전선을 결성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결과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 자연스럽게 여성운동 진영에서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아우르는 전국적 규모의 여성단체를 결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이념 및 지도력 부재를 협동전선을 통해 돌파하고자 하였고,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봉건유습 타파라는 실질적인 여성해방 과제를 포용하고 기존의 대중성 부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근우회는 여성해방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로 다른 가치와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던 운동 진영들이 모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3 근우회 창립과 이념

1927년 4월 26일 각계각층의 발기인들이 모여 민족협동전선의 흐름에 호응하는 전국적 여성운동조직을 위한 발기총회를 개최하였으며 회명 ‘근우(槿友)’도 이 자리에서 확정되었다. 이때 모였던 40여 명의 발기인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여성운동가나 직업여성들이었으며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 계열을 망라하고 있었다. 이후 5월 27일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근우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비록 일제 경찰의 방해로 일부 안건 토의 및 축사 등이 금지되기도 하였지만 근우회 본부를 이끌어갈 중앙집행위원을 선출하고 여성의 직업적 단결, 생활상태 조사 등의 안건을 논의하였다.

이상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근우회 창립 당시 강령은 ① 조선여자의 공고한 단결을 도모함 ② 조선여자의 지위 향상을 도모함이었다. 요컨대 여성의 ‘단결’과 ‘지위향상’을 목표로 내건 것이다. 근우회의 구체적인 행동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①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 일체 차별 철폐
②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③ 조혼 폐지 및 결혼의 자유
④ 인신매매 및 공창 폐지
⑤ 농촌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⑥ 부인노동자의 임금차별 철폐 및 산전산후 임금 지불
⑦ 부인 및 소년노동자의 위험노동 및 야업 폐지

위의 행동강령은 각기 결혼제도, 공창제(公娼制), 여성의 경제적 지위 및 노동조건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 이러한 방향들은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제반 여성문제들을 집약한 것이었으며, 이는 반(反)제국주의 및 반(反)봉건운동을 통해 해소될 수 있는 성격이었다.

그렇다면 신간회와 같은 전국적 조직에 참여하여 ‘여성부’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여성들만의 전국적 운동조직을 결성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1927년 7월 근우회 집행위원회 당시 작성되었던 〈근우회 선언〉은 그 취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조선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가 한층 저열하다.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 오히려 유력하게 남아있는 그 위에 현대적 고통이 겹겹이 가하여졌다. 그런데 조선여성을 불리하게 하는 각종의 불합리는 그 본질에 있어 조선사회 전체를 괴롭게 하는 그것과 연결된 것이며 한걸음 나아가서는 전세계의 불합리와 의존 합류된 것이니 문제의 해결은 이에 서로 관련되어 따로따로 성취될 수 없게 되었다. …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은 조선 사회 전체를 위하여, 나아가서는 세계 인류 전체를 위하여 분투하게 되는 행동이 되지 아니하면 안 된다. … 그러나 일반만을 고조하여 특수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고로 우리는 조선여성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조선여성의 모든 특수점을 고려하여 여성 따로의 전체적 기관을 갖게 되었나니 이와 같은 조직으로서만 능히 현재의 조선여성을 유력하게 지도할 수 있는 것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 ”

다시 말해 여성들만의 별도 조직을 만든 이유는 조선 여성이 처한 ‘특수성’ 때문이었다. 이 특수성이란 조선 민중 일반이 겪는 제국주의 치하의 고통과, 그에 더해 봉건적 유습으로 인하여 여성 일반이 겪게 되는 불합리한 제도 및 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수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항일운동 및 여성해방운동을 어느 쪽이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인식보다는 오히려 조선 여성들의 단체를 조직하여 동시에 전개해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식민지 여성으로서, 그리고 가부장제를 비롯한 봉건적 유습으로부터 억압받는 여성으로서의 이중적 모순에 처한 조선 여성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타파하고자 하였던 단체가 바로 근우회였다.

4 근우회의 활동

근우회의 활동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중앙과 지회로 나눌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지회의 조직 및 활동이 매우 중요했다. 창립 이후 전국 각지에 지회가 조직되기 시작하여 1930~31년 시기에는 60여 개 이상의 지회와 6천여 명 이상의 회원을 가진 단체로 성장하였다. 특히 근우회는 지회 세력을 반영하여 매년 중앙의 중앙집행위원회를 재구성하는 원칙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회 다수가 주로 사회주의 계열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김활란 등 일부 기독교 여성운동가는 근우회에서 이탈하기도 하였다.

근우회가 창립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주력했던 활동은 강연회 및 토론회, 야학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계몽활동이었다. 이는 조선 여성 대중의 의식 향상을 이끌어냄으로써 여성해방운동의 실질적인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전국을 대상으로 한 지방 순회강연을 하는가 하면, 지방의 여성 대중을 위한 야학을 개설하고, 야학 운영을 위한 운동가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계몽운동적 성격을 지닌 활동의 방향이었다면, 반제국주의 투쟁을 지원하거나 직접 개입하기도 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반일학생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1930년 1월 경성 여학생시위사건에 허정숙(許貞淑) 등 간부들이 지원 및 개입하였다. 이로 인해 허정숙 등 주요 간부가 검거되는 ‘근우회 사건’이 발생하였다.

노동하는 여성을 조직하고 지원하기 위한 활동들도 이어졌다. 특히 1929년 전국대회 이후에는 근우회 조직 내에 ‘노농부’를 설치하였던 것이 상징적이다. 이를 통해 여성 노동의 실태를 조사하는 한편 파업 등이 발생했을 때 노동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으며,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의 의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한편 여성에 대한 부당한 사회적 압박과 편견을 타파하고자 하는 실질적인 투쟁도 이루어졌다. 당시 여성운동 및 여성문제를 경시하는 남성 운동계의 태도, 그리고 그러한 태도를 확산시키고 오히려 ‘신여성(新女性)’ 등 발언하는 여성을 풍자·조롱하는 언론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대표적으로 근우회의 여성운동가를 가십으로 소비하거나, 운동을 풍자하였던 『별건곤』에 대해 불매·타도를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당시 여성 활동가와 지식층 여성이 직면했던 현실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였다.

5 근우회의 해소와 근우회의 역사적 의의

창립 이후 활발히 활동하던 근우회도 1929년 이후 정세의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회주의 계열은 혁명적 노동조합 및 혁명적 농민조합을 건설하여 민족해방운동 진영을 재구축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흐름 속에서 신간회가 해소되었다. 근우회가 해소되는 과정도 이 맥락 위에 있었지만, 더 중요했던 요인은 그간의 근우회 운동 및 노선에 대한 비판이었다. 근우회는 다양한 활동을 진행했지만 실천적 투쟁보다는 여성의 의식 향상을 위한 계몽운동에 치중된 경향이 강하였고, 무엇보다도 ‘근우회 사건’ 이후 합법영역에서의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지도부가 개량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판단되어 지속적인 내·외부의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근우회는 해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31년 6월 전체대회를 소집하기로 하였지만 정족수 미달 등으로 지연된 끝에 해소를 정식으로 논의하지도 못한 채 유명무실한 상태가 되었다. 이후 평양지회 등 일부 지회들이 활동을 지속하였지만 전국적 여성운동조직으로서 근우회의 명맥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근우회는 식민지 시기 최대의 전국적 여성운동조직이었다는 형식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그 내용 측면에서도 한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점한다. 먼저 당시 조선 여성의 특수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민족 모순과 여성을 억압하는 봉건적 유제를 타파하는 것을 동시에 인식함으로써 부문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인식을 보였다. 또한 당대 여성의 실질적인 의식 및 생활수준 개선에 노력하는 한편,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족쇄를 타파하는 데도 앞장섰다. 무엇보다도 이념이나 지역,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 전국적인 여성 연대였다는 점에서 근우회의 경험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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