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는 노동 집약적 작물이다. 즉, 작물 자체의 특성상, 다른 작물에 비해서 더 많은 노동력을 흡수하며 그 흡수 정도에 비례해서 생산량이 증가되는 작물이다.201)실제로 종자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벼의 경작 기간이 9개월 정도인데 반해서, 밀은 9개월 정도이다. 이것은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일종의 한자 사전에서 ‘미(米)’ 자를 풀이하는 방식에서도 확인된다.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 편찬한 이 책의 원래 설명에는, ‘米’ 자가 곡물 알갱이들이 곡물 줄기의 상하좌우에 매달려 있는 그림 글씨라고 풀이한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 글자가 ‘八+十+八’을 뜻한다고 풀이하였다.202)이규태, 앞의 책, 112쪽. 즉, 추수까지 88번이나 손이 가야한다는 뜻이다. 추측컨대, 이 해석은 18세기 이후 조선의 벼농사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벼는 다른 작물에 비해서 더 많은 노동을 흡수하면서, 동시에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즉, 총량으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 로 할 뿐만 아니라, 영농 주기상 특정 시기에 집중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다는 말이다. 요컨대 봄철 못자리 만들기부터 시작해서 모판에 씨뿌리기·논갈이·모내기·김매기를 거쳐서 가을 벼베기와 타작에 이르기까지, 벼농사는 짧은 시간 동안에 집중적인 노동력 투입이 이루어져야 하는 연속적인 작업이다. 조선 정부는 이 시기에 농사일에 방해가 되는 노동력 징발을 자제하였고, 소송과 재판마저 미루었다. 때를 놓치면 농사일을 망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았기 때문이다.
벼농사를 짓는 곳에서 노동력의 기본 단위는 가족이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는 보통 한 가정에 다섯 명 이상의 아이들을 낳으려고 노력하였다. 무엇보다 사람 자체가 가장 중요한 생산력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화적으로 가족주의를 낳았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벼농사는 개별 농가 수준의 노동력에 더하여 집단적 노동력도 필요하다. 노동력의 기본 단위로서 가족 노동력뿐 아니라, 마을 전체의 집단적 노동력 또한 매우 중요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마을마다 ‘두레’라는 효과적인 노동력 동원 방법이 나타났다.
아시아의 벼농사 지역에서 이웃의 의미는 가축 농장과 밭이 지배적인 서구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서구에서는 가까운 이웃도 몇 ㎞ 이상 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서로 얼굴 마주 볼 일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벼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촘촘하게 엮인 공동체 사회와 운명을 함께 하였다. ‘이웃사촌’은 이런 환경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조선 후기에 두레가 시작된 시기는 모내기가 일반화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두레패가 하는 행사 중에 ‘호미씻이’(‘호미걸이’라고도 한다)라는 것이 있는데, 김매기가 끝나고 호미를 씻는다는 의미로 치르는 행사였다. ‘호미씻이’가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8세기 후반이다.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1715)에는 기록되지 않던 ‘호미씻이’가, 유중임(柳重臨)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와 우하영의 『천일록(千一錄)』에 등장한다.203)배영동, 「농업에서 노동과 놀이의 관계」, 『민속 연구』 6,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1996, 114쪽.
두레의 기원은 시기적으로 18세기 후반보다 좀 더 올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두레패가 하는 풍물을 ‘두레 풍물’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한 기록이 1738년(영조 14)에 등장한다. 호남 지방의 ‘두레 풍물’에 관한 조정의 논란에서, 이 지역을 둘러본 암행어사는 이것이 이미 ‘백년 민속’이므로 금지하기가 어렵다고 말하였다. ‘백년’이 정확하게 몇 년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히 하기 어렵지만, 1738년을 기준으로 할 때 17세기 중반 무렵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204)신용하, 「두레 공동체와 농악의 사회사」, 『한국 사회 연구』 2, 한길사, 1984, 17쪽. 배영동, 앞의 글 재인용. 17세기 중반이라면, 병자호란 이후 본격적으로 모내기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던 시기이다.
모내기와 두레의 결합은 필연적이다. 우선 모내기는 속성상 빠른 시간에 이루어져야 했다. 물론 언제라도 모를 낼 만큼의 수원(水源)을 갖춘 논은 시간 여유를 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중반 이후 확대된 모내기는 대개 비 올 때를 맞춰서 모를 내야하는 곳, 즉 천수답에서 확대되었다. 빠른 시간 안에 마을 전체 논에 모를 내려면, 집단 노동력에 의한 신속한 작업이 불가피하였다. 그런데 17세기 중반이 되면 조선은 더 이상 그 이전과 같은 농장제(農莊制) 형태의 집단 노동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205)고수환·이영구, 앞의 글, 31쪽.
조선 전기 농촌의 농업 조직 형태는 17세기 후반 이후 농업 조직 형태와 크게 달랐다. 집단 농장과 비슷한 형태로 조직되었던 것이다. 농장에는 농장주에 예속적인 집단적 노동력이 존재하였다. 16세기까지도 웬만한 양반집이 100명 이상의 노비를 가졌던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17세기를 지나면서 이러한 노동 조직은 대부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소농 형태로 재편성되었다. 농장제가 지주 전호제(地主佃戶制), 즉 소작제(小作制)로 바뀌었던 것이다. 당연히 농업 노동력으로서의 노비 노동력도 해체되어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 촌락을 기초로 한 자발적 집단 노동 조직인 두레의 형성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두레는 노동 공동체와 놀이 공동체의 성격을 함께 가졌다. 두레는 기본적으로 짧은 기간에 농업 노동력을 집 중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농민들의 자치 조직이었다. 동시에 농민들의 자주적·대동적 제의(祭儀) 집단이며 놀이 집단이기도 하였다.206)배영동, 「조선 후기 두레로 본 농업 생산의 주체」, 『실천 민속학 연구』 6, 실천민속학회, 2004, 272쪽. 두레가 농민들의 자치 조직이었음은, 두레가 자연 촌락, 즉 마을 단위로 조직되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조선 후기 사족(士族)의 조직인 동계(洞契)는 자연 촌락 몇 개를 묶어서 조직되었지만, 농민들이 중심이 된 촌계(村契)는 원칙적으로 자연 촌락 단위로 결성되었다.207)주강현, 「두레의 조직적 성격과 운영 방식」, 『역사민속학』 5, 역사민속학회, 1996, 105쪽. 조직은 기본적으로 구성원들의 평상시 교류를 전제로 하기 마련이다. 사족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자연 촌락을 넘어서 교류한 반면에, 대다수 농민들의 교류는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마을에 한정되었다. 두레는 바로 촌계의 한 기능이었다.
그러나 모든 농업 노동이 놀이를 수반하지는 않았다. 농업 노동이 놀이, 즉 풍물과 결합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그 노동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노동 과정이 공동체적이어야 하였다. 노동과 놀이가 서로 상승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관계는 개별 노동, 가족 노동 같은 소규모 인원으로 진행되는 작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마을 전체가 참여할 때만, 노동이 놀이의 형식을 빌어서 축제적으로 진행되었다. 노동-놀이의 상보성(相補性)은 대규모 인원으로 결성된 품앗이 노동에서 조차 흐릿하였다. 비록 규모가 큰 품앗이라고 하더라도, 품앗이는 어디까지나 이해타산(利害打算)을 기초로 하였기 때문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두레 공동 노동에서만 그러한 이해타산을 넘어서 노동이 축제나 놀이로 승화되었다.
벼농사에서 농업과 놀이의 결합은 조선 후기 사회적·역사적 환경에서 고도의 집약 농업(노동 집약, 토지 집약)을 통해 생산력을 효율적으로 높이기 위한 문화적인 장치로 등장하였다. 두레 풍물은 힘겨운 노동 과정에서 발생한 육체적인 피로를, 심리적·정서적 차원에서 해소시켜 주었다.208)배영동, 앞의 글, 1996, 115쪽. 두레는 조선 후기 벼농사의 확산이 마을 사람들 전체가 공동체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가능하였던 것임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