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Ⅱ. 정묘·병자호란
  • 2. 정묘호란
  • 2) 강화 성립

2) 강화 성립

 후금측이 정주에서 화의를 제기한 지 1개월 만에 조선측이 이에 응할 결정적인 태도를 보여 화평교섭은 최종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금이 제시하는 조건이 조선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므로 화의가 성립하기까지는 다시 20일 가까운 시일이 더 걸렸다. 후금이 제시한 조건은 조선과 명과의 관계와 같은 화약의 내용에 관한 것도 있었으나, 오히려 「親誓問題」 등 화약의 형식에 관한 문제가 양측의 논란의 대상이 되어 화약이 지연되었다.

 화약의 성립 이후 양국간의 교섭의 중요안건이 되는 철병·쇄환·개시·세 폐·월경·遼民 등에 관해서는 전혀 논의가 없었거나 또는 극히 소홀히 다루었을 따름이다.414) 全海宗,<丁卯胡亂의 和平交涉에 대하여>(≪韓中關係史硏究≫, 一潮閣, 1970). 「강화성립」의 항은 주로 이 논문에 의거하였다.

 첫째 조·명관계에 관한 문제:조선의 명과의 관계를 견제 내지 단절시키 려는 것이 후금의 침입의 가장 중요한 목적의 하나였다. 앞에서 언급한 胡書 가운데 두번째의 1·2·3항과 세번째의 3·4·5·6항이 명과 遼民 그리고 모문룡에 관한 것이었던 사실을 미루어 보면 후금의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2월 2일의 다섯번째 호서에도 “귀국이 참된 마음으로 강화를 원한다면 남조를 섬기지 말고 그들과의 왕래를 끊고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은 아우가 된다. 만약 남조가 노하더라도 두 나라가 이웃 나라로서 가까이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라 하였던 것은 앞에서도 보았거니와, 후금은 명과의 전쟁을 치르는데 있어서 조선을 그들의 편에 묶어 둘 확실한 보증이 필요하였다.

 이와 같이 후금은 조·명관계의 단절을 확약받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후금의 요구에 대하여 조선측에서 화의를 단호하게 거절하자고 하는 일부 강경론자가 있었으나, 국왕을 비롯하여 조정신하들의 논의는 명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후금과 화의하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척화론은 일찍이 정월 18일 첫번째 호서가 전해지자 兩司에서 「嚴辭斥絶」하자는 것이 첫번째의 반응이었다. 그 후에도 중앙의 유력한 관원을 비롯하여 지방관·유생들의 상소가 빈번하여 화맹을 행하는 전날인 3월 2일까지 계속 하였다. 그들의 상소 내용을 보면 실로 단호하고 처절한 바가 있었다. 「斥絶南朝」라고 하는 후금의 요구에 대하여 조정에서 자주 이 문제를 거론하며 그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그것은 곧 조선의 2백 년 동안의 명과의 관계를 후금에 설명하고 양국관계를 단절시킬 수 없음을 설득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2월 5일 강인을 회답사로 파견할 때 부친 회답서에 “우리 나라는 皇朝(명)를 섬긴 지 2백여 년이 되어 名分이 이미 정해졌으니 감히 다른 뜻을 가질 수 없다.… 事大와 交隣은 각각 길이 다르다. 지금 우리가 너희 나라와 화의하려는 것은 이른바 交隣이고 皇朝를 섬기는 것은 이른바 事大”415)≪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임인.라 하여 事大·交隣의 차이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원창군 이구를 적진에 보내기 앞서 왕이 그를 접견했을 때 “廟堂에서 반드시 지휘한 말이 있었을 텐데 들었는가”라고 하자 玖는 “마땅히 天朝는 의리로 보아 결코 끊을 수 없다고 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라고 하니 “그렇다”고 재차 다짐하였다.416)≪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임자. 이러한 조선정부의 완강한 태도에 유해도 일보 양보하여 2월 14일 從胡를 보내어 「不絶天朝」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조·명관계의 단절을 강요하지 않을 뜻을 밝혔다.

 다음으로 조선의 대명관계 가운데 후금측이 강력히 주장한 것은, 명 「天啓」 연호의 사용에 반대하는 일이었다. 이 연호문제는 조선이 쓰는 것을 전면적으로 반대한다기 보다는 후금과의 문서왕래 때에 쓰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천계」 연호에 대하여 최초로 문제가 제기된 것은 2월 7일 강숙·박립 등이 가져 온 여섯번째 호서에서 비롯되었다. 이 호서를 보면 “내가 일찍이 귀국은 남조와 외교관계를 단절하라고 하였으나 지금 곧 강화하기 위해 보낸 국서를 보니 여전히 「천계」 연호를 쓰고 있으니 어떻게 화호를 강구하겠는가. 우리들이 기병한 것은 원래 남조를 도모하기 위한 데에 기인한 것이다”417)≪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갑진.라고 후금은 조·명관계의 단절을 요구했으나 조선측의 태도가 완강하였기 때문에 일단 양보하였지만 왕복문서에 「천계」 연호를 쓰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21일 강인의 보고에, 아민이 국서에 여전히 천계를 쓴 것을 보고 후금은 명의 속국이 아닌데 「천계」두 자를 쓴 것에 대노하고, 앞으로 유해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하며 국서를 되돌려 주었다. 그런 다음 다른 사람을 시켜서 다시 화의를 논의하게 할 생각이었으나 유해가 자청해서 몸소 이 일을 완결짓고 잘못을 속죄하겠다고 함으로써 아민의 허락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유해가 다시 조선에 와서 일곱번째 호서를 전했는데, 이 호서에서는 「천계」 연호를 쓴 것에 대해 꾸짖고 조선의 연호가 없으면 청 태종의 연호인 「天聰」을 쓰라고 하여 큰 물의를 빚게 되었다. 이날 강인의 보고를 받고 왕은 대신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和事는 끝났다고 탄식하고 다만 유해의 말을 들어보고 도리로써 거절함이 옳다고 결론을 내렸다.418)≪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무오.

 이튿날(22일) 왕은 대신들과 만난 자리에서 호서는 극히 흉악하고 비통하다고 하였고, 대신들도 「천계」 연호를 쓰지 말라는 후금의 요구에 대해 한결같이 綱常을 毁滅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따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의 전선의 상황은 한강·임진강을 지키는 군사들의 식량이 떨어져 10일이 지나면 궤멸될 상태이고 오직 고군분투하는 鄭忠信의 군사에게 공급할 식량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이러한 절박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대신들은 강상과 사대의 명분론에만 급급하여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겨우 한 가닥의 활로를 찾은 것이 「揭帖」의 형식(廣寧巡撫 袁崇煥이 후금에 보내는 문서 형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해가 연미정에서 接待宰臣에게 귀띔한 것인데, 국왕의 답서는 咨·奏와 같은 공문서의 형식을 취할 것이 아니라 「게첩」의 형식을 취하면 자연히 연월을 쓰지 않아도 되고 따라서 「천계」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 「게첩」 문제를 李景稷이 제기하자, 吳允謙·李顯英은 결코 따를 수 없다는 强硬論을 폈고, 金瑬·李貴 등은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특히 김류는 나라의 존망이 이 게첩으로 갈려지려는데, 게첩이 대의에 해가 된다고 보지 않으며, 임진강의 군사가 이미 潰散된 형편이므로 이의 수용을 주장하였다. 마침 영의정 尹昉은 게첩을 쓸 경우 그 내용 가운데에 天朝를 배반할 수 없다는 뜻을 써넣었으면 좋겠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이 날 兩司合啓에서 게첩의 명목으로 연호를 쓰지 않음은 正朔을 버리는 것이라고 강력히 반대했으나, 23일의 조선답서에는 마침내 게첩의 형식을 좇아 「천계」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419)≪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무오·기미·경신. 이로써 조선의 명과의 관계에 대한 후금 측의 요구는 충족되었다.

 둘째 禮幣 문제:예폐에 관해서는 2월 2일 왕이 대신들을 만나는 자리에 서, 李廷龜는 후금이 요구하는 木綿이 1백 同 곧 5천 필이라 하였다. 그 뒤 9일 유해가 왔을 때 접대재신인 신경진이 보고한 후금측의 요구물목은 목면 4만 필, 소 4천 마리, 면주 4천 필, 포 4천 필이었다. 이에 대해 왕은 재물을 다 쓰고 없어서 갖추어 보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 대신들의 청대요청에 응한 자리에서, 張維는 후금이 조정의 예폐의 수를 알고자 한 다고 하자, 왕은 그 수를 조선이 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후금측에 미루었다. 11일에 왕이 유해를 접견했을 때 예폐의 수에 대한 말이 또한 오갔던 것 같다. 13일에는 왕이 소 1천 마리, 면주 4천 필을 민간에서 모으려 해도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한 것을 보면 대체적인 액수는 정해진 듯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15일에 원창군 이구로 하여금 후금에 입송케 하였으며 그 예폐의 물목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420)≪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기해 병오·무신·임자.
≪淸太宗實錄≫권 2, 天聰 원년 3월 신사.

 셋째 화맹의 의절에 관한 문제:조선의 명과의 간계 및 예폐에 대한 논의에 이어 양국간의 쟁점이 된 것은 화맹에 있어서의 의절에 관한 문제다. 이 문제는 대체로 국왕의 和盟親臨 여부, 의식 일반에 관한 절차, 그리고 특히 희생에 관한 세가지 문제였다.

 국왕의 화맹친림에 관한 문제는 2월 14일 대신들의 청대입시 때에 처음으 로 거론되었다. 그 후 24일에 이르러 胡差가 말하기를 국왕이 화맹에 직접 참가하지 않으면 마땅히 誓書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는 보고를 접하자, 왕은 廟堂으로 하여금 이 일을 논의하게 한 결과 서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이로써 화맹에 관한 논의가 결말이 난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틀 뒤인 26일에 유해가 서신을 보내어, 국왕이 직접 서약을 하지 않으면 이는 강화를 원하지 않는 것이므로 국왕과 마주 보고 서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음날 왕과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吳允謙은 적이 「和」자로 우롱함이 이러한데 지금 무슨 말을 할 것인가고 탄식하였으나 왕과 이귀는 후금이 親誓를 요구하면 따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28일에 아민은 일곱번째 호서에서 지금 조선국왕이 머뭇거리며 서 약을 꺼리는데, 이는 화의를 말하면서 속뜻은 화의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한번 싸워서 승부를 가린 다음 맹약을 정해도 늦지 않다고 대단한 위협을 가해 왔다. 조선조정에서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어서 영의정 윤방은 胡 7將과 조선의 대신이 연명으로 서약한다면 王의 親臨도 좋다고 답하였다. 그 이튿날 유해가 李廷龜에게 보낸 서신에서 급히 완결지어 하루라도 빨리 복을 누리는 것이 좋다고 왕의 친림을 종용하였다. 마침내 30일 대신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여러 사람이 후금의 요구에 따라서는 안되니 세번 생각할 것을 청했으나, 왕은 “강화하면 맹약을 해야 하고 맹약하면 刑馬하는 것은 옛부터 그러한 것이다.” “위로 宗社가 있고 아래의 生靈이 있어서 부득불 그렇게 하기로 했다.” “정충신의 군마가 또한 糧秣이 떨어져 군대가 흩어질 위험이 조석에 다다랐기 때문에 親善에 따르기로 했다”421)≪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신해·신유·계해 갑자·을축·병인 정묘.고 하므로써 화맹의 친림문제는 최종 결말이 났다.

 和盟親臨은 대체로 결정되었으나, 이 문제는 刑牲에 관한 문제로 발전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같은 날의 접견에서 司諫 李敬輿는 반대하였으나 왕은 刑 馬牲天의 용의가 있다고 하였다. 한편 접대재신은 유해에게 국왕이 憂服 중이므로 살생을 할 수 없다고 형생을 반대하였으나 유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화맹에 있어서의 구체적 의식 행례에 관한 그의 주장만 거듭하였다. 3월 1일 왕은 다시 대신들을 접견하였는데 이 자리에서도 형생에 관한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왕은 “두 마리의 가축을 아껴서 나라가 危亡에 이르게 한다면,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고 하고 스스로 형마생천을 실행할 의사를 다시 표명하였다.422)≪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2월 정묘·3월 무진.

 그러나 그 이튿날 유해는 아민의 독촉이 심하고 그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여 황급히 화맹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국왕은 殿上에서 焚香告天만 행하고 형생은 대신이 다른 곳에서 행하는 것으로 타협안이 이루어졌다. 이 분향고천 문제에 대하여 여러 신하들, 특히 禮曹 및 兩司에서 부당함을 논하고 완강하게 거부하였으나 마침내 왕이 분향의 예를 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다음날 밤 왕이 대청에 나와 친히 분향고천례를 행하고 좌부승지 李明漢이 국왕의 서문을, 李行遠이 조정 대신들의 서문을, 그리고 후금의 固山額眞 納穆泰(南木太)가 후금 신하들의 서문을 읽고 맹서하므로써 정묘호란은 끝이 났다.

 전쟁은 끝났으나 아직도 처리되지 않은 문제와 앞으로 반드시 다루어야 할 문제가 많았다. 그것은 모문룡에 관한 것, 포로들의 속환, 犯越 및 도망포로의 쇄환 등의 문제들이다. 양국이 맹약을 맺고 평화를 유지할 것을 약속했으나 두 나라는 다같이 이 화약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조선은 불의의 오랑캐의 침입으로 국토는 유린되고 농토가 황폐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수한 사상자와 엄청난 수의 피랍된 포로가 있었고, 전화로 인한 피해가 또한 이만저만 이 아니었다. 그리고 당시의 지배층에는 명을 숭배하고 후금을 얕보는 사상이 짙게 깔려있어서 굴욕적인 강화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후금에서도 그들의 출병동기의 하나가 모문룡을 제거하는 데 있었으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고 그들이 원하는 세폐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더구나 조선의 숭명사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게다가 후금을 얕보는 척화론이 갈수록 강화되어 양국관계는 점차로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두 나라의 관계가 악화된 것은 후금의 세력이 더욱 팽창함에 따라 조선에 대하여 한층 더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마침내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키려고 한 데 있었다.

 정묘호란이 끝난 후에도 모문룡의 존재는 계속 조선과 후금의 현안문제였다. 실제로 모문룡의 후금에 대한 중대한 군사활동은 거의 없었으나, 가끔 문제를 일으켜 조선과 후금의 관계를 긴장시켰다. 곧 인조 6년(1628) 8월 호차가 모문룡의 부하 수백 명에게 습격을 받아 간신히 살아남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부터 후금의 기병이 호차를 호위하였고 후금의 태종은 조선에 국서를 보내어, 모문룡의 군사를 상륙시키지 말고, 만약 상륙하면 통보해야 한다. 그것을 막기 어려우면 후금에 배를 빌려주어 대신 공격케 할 것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이어서 劉興祚(劉海), 興治 형제가 9, 10월에 걸쳐 후금의 요서정벌을 틈타서 椴島(皮島)로 도망갔다.423)≪仁祖實錄≫권 19, 인조 6년 8월 갑진·10월 임인·갑진·11월 기미. 이 사건이 또한 조선과 후금의 관계를 미묘한 방향으로 진전시켰다. 이들 형제는 명과 후금을 교묘히 이용하였고, 특히 흥치는 조선의 각처를 함부로 돌아다니며 재물을 약탈하는 행패를 부렸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모문룡의 군병들의 작폐가 또한 심하였다. 2백 명의 군병이 豊川에 머물면서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를 능욕하였으며, 또 의주·龍川에서도 같은 행패가 일어났다. 그리고 모문룡은 식량·물자를 조선에 요구하므로 조선정부는 토지에 부과세를 징수하여 그에 응하였다. 명에서도 모문룡이 거느린 2만6천 명의 1년의 식량값이 거의 10여만 냥에 이르렀으나, 그 는 요양의 땅 한치도 수복하지 못하고 재력만 허비하였다고 병부로 하여금 조사케 하였다.424)≪仁祖實錄≫권 19, 인조 6년 9원 병술·10월 갑진. 명정부는 그가 보고하는 포로의 수가 거짓이고 군공이 없이 경비의 낭비가 심한 데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고 모문룡도 스스로 이 사실을 눈치채고 두 마음을 가지고 후금에 화의를 청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명의 요동경략 袁崇煥은 崇禎 2년(1629) 6월에 모문룡을 불러 12가지 죄목을 열거하고 처형했다.425)≪仁祖實錄≫권 19, 인조 6년 9월 병술.
≪崇禎長編≫(明實錄) 귄 23, 崇禎 2년 6월 무오.
그 후에도 명은 東江鎭에 계속 군대를 주둔시켰으나 내분이 일어나 일부가 후금에 항복하는 등 유명무실하게 되었다가 崇德 2년 (1637) 봄이 청군의 습격으로 동강진은 무너지고 말았다.

 후금이 조선을 침입한 중요한 동기의 하나는 조선으로부터 물자를 얻고자 하는데 있었다. 물자를 교역하는 장소가 바로 開市였다. 후금은 호란 때에 피랍된 조선포로들의 속환 장소로서 開市를 제의하였다. 호란 때에 피랍된 포로와 정확한 숫자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강화직후에 선천·곽산·철산 등 3읍에서 피랍된 3만2천여 명과, 嘉山 등지의 2만여 명이 송환되었는데 이미 이에 앞서 피랍된 많은 포로들은 장병들의 군공에 따라 배분되었다. 철병시 해서일대의 여러 고을을 침입하여 사람과 재물을 노략질하여 많은 사람이 피랍되었던 것을 미루어 볼 때 포로는 엄청난 수에 달했을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후금에서는 포로가 중요한 농업노동력의 공급원임과 동시에 큰 재물이었다. 후금에서는 이러한 귀중한 재물인 포로가 본국으로 도망가면 조선정부가 책임지고 그들을 송환해야 하고 만약에 속환을 원하면 포로의 소유자와 원속인이 값을 정하고 속환하게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후금은 기근으로 말미암은 절박한 식량난을 해결하고 포로를 석방시키는 장소로서 會寧開市를 강요하였고 조선정부는 부득이 이에 동의하였다. 인조 6년(l628) 1월에 쌀 3천 섬을 후금에 넘겨주기로 합의하고 2월에 開市가 열렸다. 그리고 5월에는 會寧開市도 개설되었다.426)≪仁祖實錄≫권 15, 인조 5년 3월 갑술·정축·기묘·경진·임오·을유·권 16, 인조 5년 4월 갑진·갑인·5얼 을미 및 권 18, 인조 6년 정월 병인·5월 무술.
≪淸太宗實錄≫권 2, 天職 원년 3월 을유·권 3, 天聰 원년 5월 경오 및 권 4, 天聰 3년 정월 경인.

 그러나 개시는 처음부터 조선측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고, 교역물품도 조선 측의 토산품으로 한정하려 하였으나, 후금측은 중국산의 견직물·면포를 원했으므로 이것을 공급하는 데 애로가 많았다. 그리고 서로 값이 맞지 않아 매매 가 여의치 않았다. 조선의 남쪽 상인들이 개시에 참가하기를 꺼리기 때문에 의주 근방의 사람들을 강제로 참가하게 하므로써 폐농을 빚게 되어 심한 기근을 맞는 경우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개시일에는 胡商보호의 목적으로 파견되는 수백 명의 후금군병의 접대가 조선측의 큰 부담이었다. 호상이 몇 백 명씩 떼지어 다니면서 교역을 핑게로 공갈 협박을 일삼고 여염집이나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재물을 약탈하는 등의 폐단이 극심했다. 이와 같이 조선측의 부담과 피해만 늘어나고 상인들도 개시를 기피하였으며 또한 교역물품이 결핍되므로써 개시는 자연히 폐지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후금측은 개시가 그들이 절실히 바라는 물자 공급장소였으므로 폐지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리하여 봄·가을 두 번 왕래하는 信使편에 조선 상인이 따라가서 교역하게 하는 이른바 使行貿易이 새로 생겨났다. 이 경우에도 상인들이 따라가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았고 이득도 나지 않기 때문에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도리어 밀무역이 성행하여 양국간의 분규의 대상이 되었다.427)≪仁祖實錄≫권 18, 인조 6년 2월 병신·5월 무자 및 권 19, 인조 6년 9월 병인.
≪淸太宗實錄≫권 9, 天聰 5년 8월 신미 및 권 16, 天聰 7년 11월 갑진.
≪朝鮮國來書簿≫, 天聰 5년 3월·8월·7년 12월.

 한편 양국간의 교역물품 가운데 人蔘(山蔘)은 후금의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이 인삼은 두만강 건너편 만주의 산악지대에 대량으로 산출되었고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과 명에서도 귀중한 약재로서 우대되었다. 인삼 값은 처음에 16냥으로 정했으나 인조 11년(1633) 8월경에는 9냥으로 떨어졌다. 이에 따라 후금측의 심한 힐책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조선인의 越境探蔘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어 인삼을 채취하는 것은 지방수령들이 상급관청에 올릴 인삼을 민간에 강제로 貢納케 하므로써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민간인들은 犯越하여 맹수를 수렵하거나 인삼을 캐오므로써 양국분쟁의 꼬투리가 된 것이다.

 후금에서는 인조 13년 3월에 월경채삼인과 함께 지방관을 처벌할 것을 요 구하였고, 조선정부에서도<江邊採蔘事目>을 마련하고 범법자가 있을 경우 지 방관을 연좌죄로 처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엄한 국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월경채삼 등의 법을 어겼다가 처벌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428)≪仁祖實錄≫권 31, 인조 13년 4월 갑오 8월 기유·10월 임진·12월 병인.
≪淸太宗實錄≫권 15, 天聰 7년 8월 경술·권 23, 天聰 9년 3월 임신·권 24, 天聰 9년 7월 계유 및 권 25, 天聰 9년 9일 정사.

 마지막으로 刷還 및 歲幣에 관한 것이 양국간의 중요한 문제였다. 양국간의 개시무역과 사행무역이 부진하다가 마침내 단절상태에 이르렀고 조선측의 쇄환 및 禮物에 대한 이행이 불성실함으로써 양국관계는 결정적으로 악화되었던 것이다.

 쇄환은 호란중에 붙잡힌 조선인이 본국으로 도망가면 조선정부는 이들을 붙잡아 후금으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개시장을 속환장소로 하는 속환의 길은 열렸으나 포로들은 이미 군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소유주가 속환을 원치 않기 때문에 원속인은 돈을 가지고도 속환할 길이 없었다. 속환의 길이 막힘으로써 포로들의 도망이 급증하는 현상이 빚어졌다. 따라서 후금측의 비난과 항의가 속출하였으나 조선측은 미봉책으로 응수하였다. 도망자는 대부분 귀환도중에 죽었고 간신히 돌아온 사람이 있더라도 부모친척이 되돌릴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후금인에게는 포로가 노동력을 제공할 뿐 아니라 중요한 상품이기 때문에 포로의 도망은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쇄환교섭을 벌였으나 조선측은 끝내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또한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 이것이 양국간의 틈을 벌어지게 하는 요인의 하나였다.429)≪仁祖實錄≫권 18, 인조 6년 5월 병술·권 19, 인조 6년 9월 갑신·권 20, 인조 7년 3월 을축·권 22, 인조 8년 6월 을묘 및 권 28, 인조 11년 3월 정유.
≪承政院日記≫18책, 仁祖 5년 6월 10일·21책, 仁祖 6년 5월 26일·24책, 仁祖 7년 2월 26·28·30일 및 35책, 仁祖 10년 2월 23일.

 한편 후금에서 예물감소의 트집을 잡은 것은 인조 9년(1631) 1월부터였다. 이 때 春信使 朴蘭英이 가져간 春季方物의 액수가 점차로 줄어들었다고 받지 않고 돌려보낸 일이 있었다. 후금은 이 해에 명의 요서지방의 大凌河城 을 공격하여 명의 원병을 물리쳤고 성을 지키던 장수 祖大壽가 항복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서 7월 사이에 몽고의 챠하르부의 林丹汗을 패퇴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명의 宣府·大同 지방을 공략함으로써 후금의 위세가 크게 진동하였다. 이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후금은 조선에 군림하는 자세로 종전보다 10배에 이르는 方物의 액수를 임의로 정하고 이를 위반하지 못하게 하였다.430)≪淸太宗實錄≫권 9, 天聰 5년 7월 기해·권 10, 天聰 5년 10월 무진 윤 11월경자·권 11, 天聰 6년 4월 무진 및 권 12, 天聰 6년 7월 경신.
≪仁祖實錄≫권 27, 인조 10년 11월 신해.
≪朝鮮國來書簿≫天聰 7년 정월.
그런 다음 인조 9년 12월과 이듬해 1일에 조선에서 보낸 예물이 정액을 어기고 적게 보냈다고 꾸짖었다. 9월에 조선의 秋信 使 박난영은 瀋陽에 도착했으나 수일간 館所에 머물게 하고 태종이 만나지 않다가 겨우 접견이 허락되었으나 예물은 받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 이 때 태종은, 명의 사신이 떠날 때 조선의 대소 관원들은 말에서 내려 인사하지만 후금 사신이 떠날 때에는 읍만 한다고 하는데, 앞으로 후금의 사신이 왕래할 때 연로에 四大官(평안감사·평안병사·황해병사·개성유수)이 나와 인사하지 않으면 바로 되돌아오게 하겠다는 뜻을 전하게 하였다.431)≪仁祖實錄≫권 27, 인조 10년 9월 임술.

 일단 틈이 벌어진 양국관계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걷잡을 수 없는 상태 로 번져갔다. 인조 10년 11월에 호차 巴都禮(所道里), 察哈喇(沙屹者), 董納密(朴仲男) 등은 安州에서 兵使가 영접하지 않았고 한 곳에서도 연회를 베풀지 않았다고 소리 지르며 화를 냈다. 서울에 도착한 다음이 「八處宴享」과 「春秋 使禮單」을 말하면서 안하무인격이었다 그들이 제시한 물목은 전년에 庫爾纆(骨者)이 정한 액수보다 거의 10배나 늘어난 것이었다. 곧

황금 100냥, 은 1,000냥, 雜色綿細 10,000필, 白苧布·細麻布 각 1,000필, 雜色細綿布 1,000필, 豹皮 100장, 水獺皮 400장, 弓角 100부, 副丹木 100근, 霜華紙 2,000권, 雜色彩花文席 100장, 細龍席 100장, 胡椒 10말, 靑黍皮 200장, 副刀·小刀 각 20자루, 松蘿茶 200포

등이다.432)≪仁祖實錄≫권 27, 인조 10년 11월 경자·정미·무신 및 권 28, 인조 11년 정월 정사.
≪淸太宗實錄≫권 12, 天聰 6년 11월 임자.

 후금은 양국관계를 「兄弟之國」에서 「父子之國」의 예로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조 11년(1633) 1월에 춘신사 申得淵을 보냈으나 새로 정한 예물의 물목대로 보내지 않았다고 예물을 받지 않고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첫째 새로 정한 예물의 물목대로 보낼 것, 둘째 병선 3백 척을 마련하여 의주의 河內에 모아둘 것, 이 두 가지를 어길 경우 사신의 왕래를 중단시키겠다는 최후통첩의 국서를 전했다. 조선에서는 2월에 다시 회답사로 金大乾을 보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다음과 같은 내용인 태종의 국서를 받아왔다. 곧 첫째 조선인 포로 중 도망자의 쇄환약속을 어겼고, 둘째 후금의 사신을 명의 그것과 같이 대우하지 않으며, 셋째 東江鎭의 중국인을 조선의 연안에 상륙하지 못하게 약속하였으나 그것을 어기고 상륙시켜 경작하게 하였으며, 넷째 후금을 배반한 劉愛塔(劉海) 및 그 아우 劉五(劉興治)를 동강진에 보냈으며, 다섯째 왕이 族弟를 親弟로 사칭한 것 등이 세폐를 증액한 이유이고 開市를 단절 한 것은 조선측이 맹약을 위반한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는 내용이었다.433)≪仁祖實錄≫권 28, 인조 11년 정월 정사·2월 갑자·3월 정유.

 조선정부는 신득연을 「奉使辱國」죄로 다스리는 한편, 후금과 국교를 끊고 싸울 결의를 다졌다. 安州城과 淸北山城을 수축하고 군량미를 넉넉히 갖추고 林慶業을 淸北防禦使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전쟁에 대비한 군량미를 마련하기 위하여 사대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쌀을 거두게 하였고 體察使 金時讓을 四道都元帥로 삼아 후금의 남침을 막게 하였다.

 그러나 김시양과 부원수 鄭忠信은 전쟁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므로 가볍게 「絶和」할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金大乾에 이어 그 해 5월에 朴로를 春信使로 삼고 예단을 대폭 증액하여 후금에 파견하였다.434)≪仁祖實錄≫권 28, 인조 11년 2월 계유·5월 갑오·6월 병자. 박로가 瀋陽에서 돌아올 때 胡差 英俄爾垈(龍骨大)도 함께 와서 후금 태종의 국서를 전했다. 이에는 첫째 명장 孔有德·耿仲明의 항복으로 말미암아 새로 인구가 늘어나서 식량이 모자라므로 빌려줄 것을 청하며, 조선은 명이 열번 요구하면 열번 다 들어 주었으니, 후금이 열번 요구하면 한번은 응해야 할 것이며, 둘째 예물의 수도 부족하고 특히 금·은과 弓角은 보내지 않았는데 이는 왕이 보내기 싫어서 그렇게 된 것이며, 셋째 「義州開市」를 청한다는 것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에 앞서 공유적·경중명 등이 후금에 항복하자 호차 용골대가 와서 이들을 구제할 양식을 빌려 달라고 청한 일이 있었다. 조선에는 孔·耿 등은 명의 반장이고 우리의 仇賊이므로 양식을 대줄 수 없다고 잘라 말한 일이 있었다. 따라서 이번이 두번째로 식량원조를 요청한 것이었으나 역시 거절하였다.435)≪仁祖實錄≫권 28, 인조 11년 4월 계미·기축·6월 병자. 이로부터 후금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고 조선의 후금에 대한 감정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양국관계는 호전될 기미가 거의 없었다. 이에 따라 후금은 조선정벌을 논의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10월에 조선이 「開市」 단절을 통고하자 후금의 태종은 격분하여 용골대를 시켜 조선의 명에 대한 偏向外交를 힐책하고 兵禍를 경고하였다.

 그리고 후금은 같은 해 2월에 岳託이 旅順을 점령한 다음, 여러 섬의 명군이 차례로 항복하였고 마지막으로 天聰 8년(1634) 3월에 尙可喜가 黃鹿島에서 항복하므로써 남쪽방면의 걱정을 덜게 되었다. 그리고 6월부터 察哈爾部를 정복하여 그 부족을 거둠으로써 전 몽고부족이 후금에 병합되었다. 또한 몽고정벌 중 명의 宣府·大同을 공략하였고 이듬해 5월에는 요서지방의 錦州·松山의 큰 성을 함락시키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 이어서 12월에는 조선에 다시 예물의 증액을 요구하였고 마침내 崇德 원년(1636) 4월에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淸」이라 하였다. 이후 양국관계는 단절되고 병자호란이 일어났다.436)≪淸太宗實錄≫권 14, 天聰 7년 6월 무인·권 16, 天聰 7년 11월 갑진·권 17, 天聰 8년 2월 을해·권 18, 天聰 8년 3월 임진·권 19, 天聰 8년 6월 신유·권 20, 天聰. 8년 9월 임신·권 23, 天聰 9년 5월 계해·임신·6월 을유·갑오·권 26, 天聰. 8년 12월 병술·병신·권 27, 天聰 10년 2월 정축 및 권 28, 天聰 10년 4월 임오 기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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