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교육에 맞서 민족 교육 진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조선인 본위의 교육’이 시도되었다.
1920년대에는 조선 여자 교육회와 조선 교육회가 창립되어 교육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국민을 대상으로 한 모금 활동을 통해 최고 교육 기관인 대학을 세우자는 운동도 일어났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이래 민족 교육 기관으로 사립 학교, 개량 서당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이들의 수가 점차 줄어들면서 1920년대 이후에는 야학이 민족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야학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기관과는 달리, 우리 글과 말, 역사를 교육하여 항일 애국 사상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만주 사변 이후 민족 말살 정책이 시행되면서 야학과 개량 서당 등 민족 교육 기관은 활동이 위축되었다.
한편, 일제의 교육 정책은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낮은 수준의 실업 인력을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선진 근대 과학 기술을 습득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1924년에 발명 학회가 창설되었고, 이후 과학 조선의 간행과 과학의 날 제정 등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과학 지식을 보급하였다. 이와 같은 과학 진흥 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과학 기술 진흥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데 이바지하였다.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던 안창남은 1921년 일본에서 최초로 실시된 비행사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