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의 위업을 계승하여 고구려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왕은 장수왕이었다. 영토가 넓어지자, 다시 안으로 체제를 정비할 필요를 느낀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으로 옮기고(427), 남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이에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였는데, 고구려의 침략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은 백제였다. 고구려는 3만의 군대를 보내 백제를 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삼국간의 항쟁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475).
이 때의 고구려 영토는 아산만에서 소백 산맥을 넘어 영일만을 연결하는 지역에까지 미쳤는데, 이러한 사실은 중원 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다. 5세기 말에 고구려는 한반도의 중부 지방과 요동을 포함한 만주 땅을 차지하여 동북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위세를 떨쳤다.
당시 중국의 북위에서 여러 나라의 외교 사절을 접대할 때에 특별히 고구려 사신을 우대하였는데, 이로써 당시 동북 아시아에서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의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 천하의 중심은 고구려 ⋅
고구려의 전성기인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에 고구려 사람들은 스스로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 왕을 ‘태왕’ 또는 ‘성왕’이라 불렀고, 광개토대왕은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의식을 높였다. 당시 고구려는 그들 나름대로의 천하 세계를 만들어 놓고, 백제와 신라에 대한 우월 의식이나 자존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신라는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고구려에 인질을 보냈으며, 고구려는 신라를 복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치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놓고 신라와 백제를 그들 천하 세계에 종속된 나라로 인식하였던 것은 바로 고구려인의 자존심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