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국력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신라는 6세기 중반 진흥왕 때에 이르러 대외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진흥왕은 황룡사를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능한 청소년을 양성하는 단체인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기반을 굳게 다지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영토를 크게 넓혔다.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상류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의 땅마저 빼앗아 한강 유역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이어서, 가야 연맹의 맹주인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야까지 진출하였다.
이 무렵에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이다. 진흥왕은 국력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나라의 위상을 높이고, 자신을 황제에 비겨 ‘태왕’ 또는 ‘짐’이라 하였으며, ‘개국’ 등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의식을 나타내었다.
⋅ 화랑도 ⋅
화랑들은 원광의 가르침인 세속 5계를 지키며, 산천을 널리 돌아다니면서 무술과 도의를 닦고, 전쟁에서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웠다.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어진 재상과 충신이 여기서 배출되었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사들이 이 곳에서 생겨났다.”라고 썼고, 중국의 기록에서는 “귀족의 자제 중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가려 뽑아 곱게 단장시켜 화랑이라 하였다. 당시의 나라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섬겼다.”라고 하였다.⋅ 한강 유역의 중요성 ⋅
농경에 적합한 한강 유역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여 여러 지역의 문화가 합쳐지고, 또 그 주변에 많은 인구와 물자가 모이는 곳이다. 그리고 바다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기에 적합한 지리적 이점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강 유역을 차지한 나라가 삼국 간의 세력다툼에서 주도권을 차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