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몽골은 한동안 긴장 상태를 유지했으나, 결국 몽골의 침입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1231). 당시 고려는 백성들과 관군이 하나가 되어 몽골군에 맞서 싸웠다. 특히, 귀주성에서는 박서의 지휘 아래 몽골군에 맞서 끝까지 성을 지켰다.
충주 지방에서는, 몽골군이 침입하자 관리들은 도망했으나 관노비들은 끝까지 싸워 성을 지켰다. 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초적들도 몽골군이 침입하자 맞서 싸웠다. 최씨 정권은 모든 주민이 섬이나 산성에 들어가서 몽골군에 항전하도록 하고,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같은 해에 몽골군이 다시 침입했으나, 광주 주민들은 이에 맞서 몽골군을 격퇴했으며, 특히 처인성 전투에서는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하였다. 이에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몽골은 금을 정복한 후, 남송과 고려 정벌에 본격적으로 나서 여러 차례 고려에 침입하였다. 이 때에도 김윤후는 노비들과 함께 끝까지 충주성을 지켰다.
그러나 고려는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의 판목과 경주의 황룡사 9층탑 등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이에 최씨 정권은 민심을 모으고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 조성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은 16년간의 대역사 끝에 완성되었다. 팔만대장경판은 대몽 항쟁의 산물이며, 우리가 자랑하는 문화 유산의 하나이다.
팔만대장경의 조판
고종 23년(1236)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제작하기 시작하여 고종 38년(1251)에 완성하였다. 부처의 가르침을 8만여 장의 나무판에 새겨 넣어서 팔만대장경판이라 한다. 팔만대장경판이 보존되어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에 석굴암과 불국사, 종묘와 함께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