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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학교 국사 7차
  • Ⅵ. 조선사회의 변동
  • 1. 붕당 정치와 탕평책
  • [2] 탕평책을 실시한 목적은 무엇인가?
  • 정조와 규장각

정조와 규장각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정조는 즉위하자 곧 규장각을 설치하여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 기구로 삼았다. 규장각에 수만 권의 책을 갖추어 두고, 젊은 학자들을 모아 학문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규장각정조 시대의 문예 부흥과 개혁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정조는 정국 운영을 군주가 주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권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정조는 친위 부대로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에 화성을 쌓았다.

정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과 문예 부흥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폈다.

경제적으로는 농업을 발달시키고, 상업 활동을 보다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광산 개발을 장려하였다. 이로써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 도성 밖 곳곳에 새로운 마을이 형성 되었으며, 한강에는 많은 배들이 드나들면서 포구가 늘어났다. 문화적으로는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규장전운’ 등 수많은 책을 편찬하였다. 이 밖에 서얼노비에 대한 차별을 줄이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제도와 운영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영조정조개혁 정치로 정치⋅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고 민생 또한 다소 넉넉해졌다.

장용영

정조 15년(1791)에 서울과 수원에 설치하였던 군영으로, 왕권 강화를 위한 군사적 기반이었다.
주합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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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지 | 규장각 도서
도움글

정조화성 행차 ⋅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아버지인 사도 세자의 묘를 당시 수원 읍성이 있던 지역으로 옮겼다. 그 대신 수원 읍성은 오늘날의 수원으로 옮기고 이름을 화성부라 하였다. 이로써 계획 도시인 화성이 새로 건설 되었다.
수원으로 묘를 옮긴 후, 정조는 아버지의 묘에 성묘한다는 명분으로 1789년 이후 11년 동안 12차례나 수원을 찾았다. 지금의 수원에서 의왕으로 넘어가는 경계에는 ‘지지대고개’가 있는데, 지지대고개라는 명칭은 정조의 수원 행차에서 유래되었다.
당시에 이 고개에 서서 수원 쪽을 바라보면 사도 세자가 묻혀 있는 현륭원이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개를 넘어 의왕 쪽으로 가면 현륭원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곳은 먼발치로나마 사도 세자의 묘를 볼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다. 이 고개를 넘어 서울로 돌아가기가 싫었던 정조는 이 곳에만 이르면 “천천히 가라. 천천히 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훗날이 고개 이름은 늦을 지(遲)자가 두 개 붙은 지지대고개가 되었다.
지지대비각 및 각자 | 경기 수원
지지대비각 및 각자 | 경기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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