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Ⅱ. 한민족의 기원
  • 1. 고고학적으로 본 문화계통 -문화계통의 다원론적 입장-
  • 3) 문화계통
  • (1) 구석기시대

(1) 구석기시대

 종전까지 남한의 구석기시대의 상한은 충북 단양 도담리 금굴유적으로 현재 적어도 70만 년 전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평양 상원군 흑우리 검은모루 동굴의 경우 100만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046)검은모루동굴 유적은 100만 년 전 이전으로 보고 있다(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고고학연구소,≪조선전사≫1. 원시편(평양, 1991), 24쪽). 그러나 이들 유적들에 대한 견해는 박영철,<한국의 구석기문화>(≪한국고고학보≫28, 1992), 33∼36·63∼66쪽 참조. 이들 유적들은 구석기시대 중 전기에 속하는 것으로 되었지만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정확한 유물조합상과 연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를 입증할 만한 지질학과 고생물학적 증거도 뚜렷이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이들 유적 출토 동물 화석군과 석기를 포함하는 유물들을 한반도 이외의 지역, 다시 말해 중국이나 시베리아 지역과의 비교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기원이나 문화의 시작이 정확히 어디에서부터 出自했는지에 대해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인 20만 년 전 전후가 되면 우리 민족과 문화의 기원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가 풀리고 있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에서 나오는 우리의 역석기 문화 전통을 예니세이강 상류의 카멘니로그와 라즈로그 Ⅱ(이 유적은 민델∼리스 간빙기층으로 20∼4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유적, 몽고령의 고르노 알타이지역 사간 아부이 동굴, 내몽고자치구 大窯읍 투얼산 사도구 유적, 요녕성 榮口 金牛山 유적과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구석기시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시베리아의 예니세이강 상류-몽고(알타이)-내몽고-요녕(만주)-연천 전곡리로 이어지는 문화 루트도 현재 새로운 가설로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후기 구석기시대가 되면 전국 곳곳에 유적이 분포한다. 이는 한반도 전역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제까지 구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전혀 보고된 바 없는 인천광역시에서도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보고되고 있다. 강화도 내가면 오상리 소재 지석묘(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6호) 옆에서 석영제 팔매돌(bola)이,047)선문대학교 역사학과 발굴조사단,<강화 내가면 오상리 고인돌무덤 발굴조사 현장 설명회자료>(2000년 5월 20일), 5쪽. 인천시 연수구 선학동 문학산 청동기시대 溝狀遺構 옆에서 석영제 망치돌과 兩刃石器(chopping tool),048)인하대학교 박물관,<인천 문학경기장내 청동기유적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자료>(2000년 7월 4일), 사진 11에는 석영제 망치돌이, 그리고 현장 전시품 중에 석영제 양인석기가 보이고 있다. 그리고 화성군 서신면 장외리와 향남면 동오리에서 석영제 다면석기와 찍개049)경기도박물관,≪도서해안지역 종합학술조사Ⅰ-화성군해안지역-≫(1999), 63·193쪽.가 나와 적어도 경기도 전역에 구석기시대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는 당시 급격한 인구의 증가나 생활적소(niche·適所)에 따른 빈번한 이동을 들 수 있는데 이 점은 앞으로 전문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한 사항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우리 문화계통의 자생성이 적어도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있어온 것으로 짐작된다.

 최근 전라북도 용담댐 내 진안 진그늘은 전라북도 금강 상류에서 최초로 발굴된 2만 년 전후의 후기 구석기시대 대규모 살림터 유적으로 특히 슴베찌르개(stemmed biface points)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050)조선대학교 박물관,≪진안 진그늘 구석기시대 유적≫(용담댐 수몰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 현장 설명회 자료, 2000년 10월 28일). 이 유물은 금강의 중·하류 쪽의 대전 용호동, 공주 석장리, 남한강변의 단양 수양개,051)Lee, Yong-jo, Woo, Jong-yoon & Kong, Su-jin, “New Result from Tanged Tool of the Suyanggae Site in Korea”(International Scientific Conference:Paleogeography of the Stone Age. Krasnoyarsk, Russia, 2000. 7. pp. 25∼31). 섬진강 유역의 순천 월평리, 낙동강 유역의 밀양 고례리 등 거의 남한 전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일본에서는 北海道 白湧-胎部臺 등지052)C. Melvin Aikens & Takayasu Higuchi,≪Prehistory of Japan≫(Academy Press, 1982), pp. 78∼85. 그러나 최근 후지무라신이치(藤村新一)의 北海島의 總進不動坂(소도후도자카)을 포함한 60∼70만 년 전까지 올라간다는 전기와 중기구석기시대유적의 조작에 따라 전기와 중기구석기시대인 거친석기 관계는 일본구석기시대의 상한이 35000년이라는 1983년의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에서 발견 보고사례가 많아 우리 구석기시대와의 편년관계 설정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일본의 구석기시대는 先土器시대로 불리우며 ① 거친석기 단계(Crude Lithic Specimens), ② 양끝과 옆면을 떼어내 격지를 만드는 단계(End and Side Blow Flake Technique), ③ 밀개, 잎형찌르개, 새기개, 칼 등이 포함되는 세형돌날 단계(Microblade), ④ 세형돌날, 양면가공 찌르게, 세석기, 세형몸돌, 새기개와 토기 등이 포함되는 단계(Pottery, Microblades)로 나누어지는데, 이들 슴베찌르게는 네 번째의 단계로 시기상 기원전 13000∼9000년 전경에 해당한다. 우리의 것도 이곳 일본 선토기문화의 단계와 편년에 맞추어 정확한 문화내용과 시기가 파악되어야 한다.053)최몽룡,≪흙과 인류≫(주류성, 2000), 174쪽.

 다음의 중석기시대는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넘어오는 과도기 시대(transitional period)로 이 시기는 기원전 8300년경 빙하의 후퇴로 나타나는 새로운 환경에도 여전히 구석기시대의 수렵과 채집의 생활을 영위하고 도구로서 세석기가 많이 나타나며, 신석기시대의 농경과 사육의 점진적인 보급으로 끝난다. 지속되는 기간은 각 지방마다 달라 빙하기와 별 관련이 없던 근동지방의 경우 갱신세(홍적세)가 끝나자마자 농경이 시작되었으며 영국의 경우 기원전 3000년경까지도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유럽의 편년체계를 받아들여 중석기시대의 존재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게 되었으며054)金元龍,≪韓國考古學槪說≫(일지사, 1986 3판), 20∼21쪽. 통영 상노대도, 공주 석장리, 거창 임불리, 홍천 화화계리 등의 유적이 증가함에 따라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도 주로 그 존재 가능성을 언급하게 되었다.055)최몽룡,<선사문화의 전개>(≪고등학교 국사≫상, 교육부, 2002), 23쪽.
―――,<한국문화사개관>(≪한국의 문화유산≫, 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7), 25∼26쪽.
북한에서도 종래 후기 구석기시대의 늦은 시기로 보던 평양시 승호구역 만달리와 웅기 부포리 유적도 중석기시대에 포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중석기시대의 개념이 동북아시아 전역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수용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회의적인 견해도 있다. 하나의 시대로 보기보다는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 이유는 전형적인 유럽식 석기 문화가 나타나지 않으며 극동지역에서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하바로프스크시 근처 아무르강 유역의 오시포프카 문화의 토기와 비교될 수 있는 토기가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에서 나오고 있는 점도 들 수 있다. 오시포프카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은 아무르강 사카치알리안(시카치알리안이란 명칭도 맞으나 현재 사카치알리안으로 통일하기로 하였음) 근처에 있으며, 이들은 갱신세 최말기에 속한다는 점도 들 수 있다. 여기에 비해 근동지방의 경우 토기의 출현은 간즈다레 유적이 처음으로 그 연대도 기원전 7000년경에 해당한다.056)촬스 레드만지음·최몽룡 옮김,≪문명의 발생≫(민음사, 1995), 284쪽. 만약에 극동지방에서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오시포프카 문화의 설정을 보류한다 해도 지금부터 7∼8000년 전 극동지역 신석기∼청동기시대를 아우르는 오누키 시즈오(大貫靜夫)의 平底의 深鉢形土器를 煮沸具로 갖고 竪穴住居에 살던 독자적인 고고학 문화인 ‘極東平底土器’057)大貫靜夫,<豆滿江流域お中心とする日本海沿岸の極東平底土器>(≪先史考古學論集≫2, 1992), 42∼78쪽.
≪東北アジアの考古學≫(同成社, 1998), 38쪽.
문화권이나 그에 해당하는 문화 설정도 가능한 시점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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