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Ⅱ. 한민족의 기원
  • 1. 고고학적으로 본 문화계통 -문화계통의 다원론적 입장-
  • 3) 문화계통
  • (2) 신석기시대

(2) 신석기시대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 신석기시대의 상한은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유적(사적 394호)의 기원전 6000년경으로 잡아왔다. 그러나 이 유적이 그 근처 潟湖 형성 후에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는 점과 발굴 층위자체의 문제점 등으로 보아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 최초의 유적이 되기에는 회의가 많다. 강원도에서만 오산리와 연대가 비슷하거나 올라가는 유적이 1998년 12월∼1999년 3월 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 발굴되었다. 이곳에서는 오산리식의 특징적인 압날문 토기와 문암리에서 출토된 독특한 문양구성의 덧무늬(융기문) 토기의 출토와 아울러 오산리보다 연대가 올라가는 집자리의 추가(A지구 최하층)발굴이 있어 주목된다.058)문화재연구소,<’98∼’99 고성 문암리 신석기유적발굴조사 성과발표:문화관광보도자료>. 춘천시 교동 한림대학교 구내 동굴유적(金元龍,<春川 校洞 穴居遺蹟과 遺物>,≪역사학보≫20, 1963)에서 발견된 토기도 오산리와 문암리와 마찬가지로 신석기시대 전기에 속할 가능성이 있으나 토기가 적고 정제된 점, 그리고 대형의 마제석부가 공반된 점은 좀더 고려해 보아야 될 점이다. 그러나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 유적의 발굴 결과로 이 유적이 현재까지 우리 나라의 최고의 유적(10500 B.P.)으로 인정되고 있다. 아직 정식 학술조사보고서가 나오지 않았지만 가설로서 이 유적은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즉 ① 세석기와 석핵이 나오는 후기 구석기시대, ② 융기문 토기와 무경석촉이 나오는 신석기Ⅰ기와 ③ 유경석촉이 나오는 신석기Ⅱ기이다.059)최몽룡·김선우,≪한국 지석묘연구 이론과 방법≫(주류성, 2000), 141쪽. 그러나 이 층이 셋으로 세분하기에는 너무나 얇아 나오는 유물의 형식학적 분류만이 가능하다. 만약에 층의 구분이 안되더라도 ①과 ②의 세석기와 융기문 토기의 결합만 보더라도 이 유적의 상한은 아무르강 중부 평원 북부의 범위에 있는 11000∼12000 B.P.(기원전 10000년 전후)의 오시포프카 문화에 속하는 가샤 유적이나 바이칼호 근처의 우스트 카랭카(기원전 7000년경), 일본 長崎縣 北松浦郡 吉井町 福井동굴(12700, 10750 B.P.), 佐世保市 泉福寺동굴이나 愛媛縣 上浮穴郡 美川村 上黑岩(12165, 10125 B.P.)岩陰 유적과의 관련성도 충분히 있다.060)최몽룡,≪한국문화의 원류를 찾아서≫(학연, 1993), 130쪽. 이들 환태평양문화와 유사한 문화를 일본의 大貫靜夫는 한국의 원시무문(민무늬)토기 다음 단계의 것으로 생각되는 평저의 토기를 ‘極東平底土器로 총칭하며 深鉢形土器를 가지고 竪穴住居에서 사는 독자적인 고고학 문화’로 그 연대도 지금으로부터 7∼8000년 전경으로 보고 있다(≪東北アジアの考古學≫(同成社, 1998), 38쪽;<豆滿江流域お中心どする日本海沿岸の極東平底土器>(≪先史考古學論集≫2, 1992, 47쪽). 그리고 이에 관한 전반적인 학술 토론회가 1993년 日本考古學會심포지움으로 열렸다(小野昭·鈴木俊成編,≪環日本海地域の土器出現期の樣相≫, 雄山閣, 1994 및 최몽룡,≪도시·문명·국가≫, 서울대출판부, 1997, 242쪽).

 러시아 극동지구 아무르강 하류에 암각화로 유명한 사카치알리안 마을 주변에 집중되어 있는 가샤 유적이 있으며 이들은 오시포프카 문화에 속한다. 발굴자인 비탈리메드베데프(Vitaly Yergorovich Medvedev)에 의하면 이 유적들은 1975년 이후 1990년까지 8차의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롬(loam)층 바로 위가 중석기층이고 중석기층 바로 위의 신석기시대 주거지 바닥면하 점토층에서 세석기와 함께 10편의 토기편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토기는 화씨 350도 정도(우리의 무문토기의 경우 573도 전후에서 구워짐)에서 구워진 것으로 그 층에서 얻은 목탄의 방사성 탄소 연대는 12960+-120 B.P.이다. 그리고 오시포프카문화에 속하는 유적은 현재까지 5개소로 사카치알리안의 유적 3개소와 우수리 강 하류의 베누코보, 오시노바야 레치카의 두 군데이다. 오시포프카 문화에 유사한 유적도 두 군데나 되는데, 하나는 가샤지구 근처고 다른 하나는 南쟈바이칼의 세렝가강 근처이다. 모두 토기가 나오고 있으며 그 연대도 전자는 12000∼10500년 사이고 후자는 11500+-100 B.P.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11000∼12000년 전에 최고의 토기가 발견되고 있는 지역은 아무르 강 유역이다. 更新世 말 맘모스나 주변의 대형 동물이 사라져 없어짐에 따라 대신 연어과에 속하는 어류로서 식료를 대신하고 수혈움집에서 정착 생활의 병행과 함께 이의 저장을 위해 토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061)V. E. Medvedev,<がしゃ遺跡とロシアのアザア地區東部における土器出現のついて>(≪環日本海地域の土器出現期의の樣相≫小野昭·鈴木俊成編, 雄山閣, 1994), 9∼20쪽.
국립문화재연구소·러시아과학원 시베리아분소 고고학민족학연구소,≪러시아 아무르강하류 수추섬 신석기시대 주거유적발굴조사보고서≫(제1차 한·러공동발굴 조사보고서, 2000) 및 국사교과서 고등학교(교육부 2002), 19쪽.
최몽룡·이헌종·강인욱,≪시베리아의 선사고고학≫(주류성, 2002년 말 출간예정).
따라서 토기는 중석기시대 새로운 환경의 변화와 생계 전략의 하나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중요한 유적으로 아무르강 하류의 수추섬을 들 수 있다. 1930년대에 유적의 존재가 알려진 후, 알렉세이 오클라드니코프 및 비탈리 메드베데프에 의해 10여 차례 발굴되었다. 이 섬에서는 기본적으로 최근(2002년 8월)에 새로이 확인된 기원전 6∼8000년에 속하는 마린스카야문화에 이어 기원전 4∼2000년 초엽의 말르이쉐보 문화와 보즈네세보 문화에 속하는 집자리와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토기는 평저의 심발형이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토기의 문양은 압인문·융기문이 주로 시문된다. 수추섬의 신석기문화는 특히 한국의 함경북도 웅기 굴포리 서포항 2·3기 층과 같은 시기이며, 기형 및 문양에서 유사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최근 오누키 시즈오는 東三洞이나 西浦項 최하층, 그리고 연해주 최고의 토기로 여겨지는 고르바드카 3 상층, 이리스타야Ⅰ, 치모훼프카Ⅰ, 우스치노프카 Ⅲ과 아무르강의 사카치알리안 오시포프카문화에 속하는 가샤 유적에서 보이는 原始無文土器(大貫의 無文土器, 오끄라드니꼬프의 平滑土器)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앞으로의 자료의 증가를 기다려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신석기와 청동기시대 또는 유문토기와 무문토기의 구분 대신 한반도 동북부의 西浦項 1∼3층, 羅津, 農圃, 중국 동북부의 新開流와 鶯歌嶺 하층, 연해주 남부의 자이사노프카Ⅰ, 테체에 하층과 오레니Ⅰ, 아무르 강 하류의 가샤, 마르시에보, 콘돈과 보즈네세노프카, 그리고 아무르 강 중류의 그라마투하, 노보페트로프카와 오시노보에 湖 유적 등의 極東지역을 묶어 ‘極東平底土器’란 용어를 새로이 만들어내고 새로운 극동지역의 문화권을 설정하고 있다062)大貫靜夫,<豆滿江流域お中心とする日本海沿岸の極東平底土器>(≪先史考古學論集≫2, 1992), 47∼78쪽..

 최근 강원도 영동지방을 중심으로 ‘中東部先史文化圈’이란 용어가 새로이 만들어지고 있다.063)백홍기,<강원고고학의 회고와 전망-그 전개과정을 중심으로->(≪강원학의 현재와 미래≫, 강원개발원, 2000년 7월 7일), 48쪽. 이는 양양군 현남면 地境里 빗살문 토기 집자리 7호(기원전 3355년:Ⅰ)와 6호(기원전 3035년:Ⅱ), 양양군 손양면 가평리(4570+-60. 기원전 3000년경), 고성군 죽왕면 文岩里 등지의 새로운 발굴 조사가 이루어짐에 따라 강원도 신석기시대 전기(오산리, 춘천 교동, 문암리), 중기(지경리Ⅰ, Ⅱ)와 후기(춘성군 內坪:기원전 980년 이전)로 지역 편년 설정을 하고 전기의 경우 함북 선봉군 굴포리와 무산 범의구석(호곡)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지방, 중기의 경우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와 평남 온천군 궁산리 유적으로부터 영향을 밝혀내고 있다. 문화의 전파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그만큼 생각보다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구라파에는 LBK(Linear Band Keramik) 문화가 있다. 다뉴브Ⅰ 문화(DanubianⅠ Culture)라고 불리는 이 문화는 유럽 중앙과 동부에서 기원전 5000년대부터 쉽게 경작할 수 있는 황토 지대에 화전민식농경(slash and burn agricultural cultivation)을 행하였고 또 서쪽으로 전파해 나갔는데, 이 문화와 공반된 토기의 문양이 우리의 빗살문(櫛文/櫛目文)토기와 유사하여 ‘線土器文化(Linear Pottery culture)라 한다.064)Barry Cunliffe, Prehistory of Europe(Oxford Univ. Press, 1994), p. 155. 이것의 獨譯이 Kammkeramik(comb pottery)로 번역하면 즐문(즐목문)토기로 우리말로는 빗살문토기이다. 일찍부터 이 문양의 토기들은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 빗살문토기의 기원과 관련지어 주목을 받아왔다. 해방 전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는 아마도 이 LBK의 토기들을 우리 나라의 신석기시대 토기들의 조형으로 생각하고 이들이 스칸디나비아를 포함하는 북유럽으로부터 시베리아를 거쳐 북위 55도의 환북극 지대를 따라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주장하였다.065)藤田亮策,≪朝鮮考古學硏究≫(高桐書院, 1948), 162쪽. 이같은 견해는 金元龍에 이어져 “북유럽의 토기는 핀란드·스웨덴·북독일·서북 러시아의 카렐리아 지방에서 흑해 북안의 오카, 볼가강 상류지방에 걸쳐 유행한 뾰족밑 또는 둥근밑의 半卵形 토기이다. 표면은 빗같은 多齒具의 빗살 끝으로 누른 점렬(密集斜短線列)과 뼈송곳의 끝을 가로 잘라 버린 것 같은 것으로 찌른 둥글고 깊은 점(pit)列을 서로 교체해 가며 …이를 영어로는 Comb-pit ware라고 부르며… 북부 시베리아의 환북극권 신석기 문화의 대표적 유물로 되어 있다.”066)金元龍,≪韓國考古學槪說≫(일지사, 1986), 37∼38쪽. 이러한 견해는 후일 시베리아 흑룡강 상류 쉴카강 북안의 석회굴에서 나온 빗살문토기(흑룡 강 상류의 수렵·어로인으로 기원전 2000∼1000년경 거주)를 우리의 빗살문토기가 바이칼지구를 포함하는 범시베리아 신석기 문화에 포함시키게 된다.067)金元龍,<시베리아 쉴카洞窟의 新石器文化>(惠庵 柳洪烈博士 華甲紀念論總, 1971), 499∼513쪽. 그리고 한강 유역의 첨저 토기와 함경도의 평저 토기도 원래는 한 뿌리로 알타이 지역을 포함하는 바이칼호 주변이 그 기원지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수정된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068)한영희,<유물로 본 Altai와 한반도>(≪알타이문명전≫, 국립박물관, 1995), 186∼189쪽. 그러나 이는 11000∼12000년 전 극동지방 최초의 토기가 나오는 오프카 문화의 대표적인 가샤 유적을 발굴한 비탈리 메드베데프나 ‘極東平底土器論’을 주창한 오누키 시즈오의 새로운 견해가 나옴으로써 한국 신석기 문화의 기원과 연대, 각 토기의 형식에 따른 새로운 문화전파 문제가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또 중국의 요녕지방의 신석기시대를 보면 요서지방의 査海 興隆窪 文化(기원전 5000년), 紅山 文化(기원전 3500년)와 小河沿 文化(기원전 3000년 이후), 요중지방의 新樂 文化(기원전 4500년), 扁保 文化(기원전 3000년), 요동지방의 小珠山과 後窪 文化(기원전 4000∼2500년) 등 기원전 4000년∼기원전 3000년경의 우리의 빗살무늬(櫛目文) 토기와 관계되는 주요 유적들이 발굴되고 그 편년 또한 잘 정리되고 있다. 그 중 신락 유적에서 나타나는 토기 표면의 연속호선문(갈之자문), 金州市 城內 제2유치원 근처의 빗살무늬 토기편, 그리고 河北省 武安 磁山(기원전 5300년)과 遷西 西寨 등지의 빗살무늬 토기들은 우리의 빗살무늬 토기 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069)최몽룡, 앞의 책(1993), 72쪽.

 농경의 기원문제 역시 또 다른 한국문화의 계통과 관련된 문제점이다. 벼농사의 경우 중국 호남성 풍현 팽두산의 기원전 7000년경의 벼(물벼)와 절강성 하모도촌의(기원전 5000∼4600·5008년) 인디카와 야생종의 중간형의 벼를 비롯하여 극동아시아에 있어서 벼의 기원이 중국이라고 인정할 정도의 많은 자료가 나오고 있다.070)최몽룡,<쌀이야기>(≪도시·문명·국가≫, 1997, 서울대출판부), 270∼277쪽. 우리 나라의 경우 신석기시대 최말기에 속하는 경기도 우도, 김포 가현리와 일산을 비롯하여 평남시 남경 호남리(기원전 999·1027년), 여주 흔암리(기원전 1260∼670년)와 전남 무안 가흥리(기원전 1050년)에서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보고되고 있다.071)최몽룡, 위의 책, 275쪽. 최근 충북 淸原 小魯里의 볍씨가 13010/17310년 전의 후기 구석기시대까지 올라간다는 조사 보고도 나와 있지만,072)H. S. Suh, J. H. CHO, Y. J. Lee & M. H. Heu, “RAPD Variation of the Carbonized Rice aged 13,010 & 17,310”(4th international Genetics Symposium(Manila, Philippines:2000. 10. 22∼27):2-15.
―――,충북대학교박물관·한국토지공사,≪청원 소로리 구석기시대유적≫(2000).
청동기시대 상한을 현재 기원전 1500년경으로 간주할 때 현재 벼가 인구증가와 더불어 단위 소출량을 증대시키는 관개농업으로 재배되는 것은 청동기시대로 여겨진다. 울산 무거동과 야음동, 부여 구룡면 구봉리(기원전 1450년) 논산 마전리(기원전 475년)와 이들보다 시기가 떨어지는 마한의 서기 2세기경의 천안 장산리 유적들이 이를 입증한다.073)최근 충남대 박물관에서 발굴한 천안 長山里 유적의 경우 관개농업을 실시한 흔적이 뚜렷하며(충남대 박물관,≪천안 장산리 유적≫2000년 10월 5일 현장설명회 발표요지), 이와 관련된 저수지로서 제천 의림지와 김제 벽골제(서기 330년)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구봉리의 경우 충남대 백제문화재연구소의 발굴로 2001년 6월 1일 현장설명회 발표요지를 참조할 것. 최근 전북 진안 용담댐 내 망덕과 갈두(갈머리) 신석기 중∼말기유적에서 여러 점의 석제 보습(石犂)이 출토되었는데,074)전북대학교 박물관·호남문화재연구원,≪용담댐 수몰지구내 문화유적 4차 발굴조사 및 지석묘 이전복원 지도위원회 자료≫(2000. 10. 28), 14쪽. 이는 해안가의 어패류에 의존해 살아가던 패총형성의 신석기시대의 전형적인 유적과 달리 내륙지방에서 농경을 기반으로 하여 살아가던 신석기시대 토착 농경사회의 또 다른 모습의 환경적응 결과를 보여준다. 이와 같이 농경의 경우 살아가는 환경에 대한 적응, 곡물의 분석과 더불어 생활방식의 형태와 이웃문화로부터 영향과 현 민속자료의 비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구가 필요하다.075)국립중앙박물관,≪쌀-도작문화 3000년-≫(2000). 쌀은 아니더라도 주거지 근처의 터밭에서 화전민식농경(slash & burn agricultural cultivation)에 의한 잡곡류의 생산은 평안남도 온천군 궁산리와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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