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Ⅱ. 한민족의 기원
  • 1. 고고학적으로 본 문화계통 -문화계통의 다원론적 입장-
  • 3) 문화계통
  • (3) 청동기시대

(3) 청동기시대

 신석기시대에 이어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 그리고 만주에서는 이보다 앞선 기원전 15세기경부터 청동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남한에서 최근의 발굴 조사에 의하면 청동기시대의 시작이 북한과 같이 10∼15세기로 오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076)최몽룡,<청동기시대 개요>(≪한국사≫3, 국사편찬위원회, 1997), 5쪽.
―――,<21세의 한국고고학>(≪한국사론≫30, 국사편찬위원회, 2000).
―――,<21세기 한국고고학의 새로운 조류와 전망>(한국상고사학회 제27회 학술발표회 기조강연, 2002. 4. 26).
공열 토기와 각형 토기가 나오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신매리 주거지 17호 유적(1996년 한림대 발굴, 서울대 ‘AMS(질량분석이온빔가속기)’ 연대측정결과 3200+-50 B.P. 기원전 1510년, 문화재연구소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는 2840+-50 B.P. 기원전 1120∼840년이라는 연대가 나옴),077)춘천시 서면 신매리 지표조사에서 단사선문이 있는 이중구연의 토기편이 발견되었다(최몽룡 외,≪북한강유역의 선사문화≫, 서울대 박물관, 1998, 36쪽). 경기도 평택 지제동(기원전 830년, 기원전 789년),078)최정필·하문식·황보경,≪평택 지제동 유적≫(세종대학교 박물관·한국도로공사, 2000), 422∼423쪽. 청주 용암동(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9년 12월:기원전 1119년), 경주시 내남면 월산리(1999년 6월:기원전 970∼540년, 기원전 1530∼1070년 사이의 두개의 측청연대가 나왔으나 공반유물로 보아 기원전 8∼10세기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중간연대도 기원전 809년과 기원전 1328년이 나왔다), 충주 동량면 조동리(1호 집자리 2700+-165B.P., 1호집자리 불땐 자리 2995+-135B.P. 기원전 1세기경),079)충북대학교 박물관,≪박물관안내≫(2000), 14쪽. 대구시 수성구 상동 우방 아파트(구 정화여중고), 여천 화장동 고인돌(기원전 825, 795, 685년), 대전 대덕구 비래동 고인돌(기원전 1005년)과 속초시 조양동 유적(1992년 7월:사적 376호)들이 기원전 7∼10세기경으로, 그리고 강릉시 교동의 집자리 경우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적인 것으로 방사성 탄소측정 연대도 기원전 1130∼840년 사이에 해당한다. 여기에서는 구연부에 短斜線文과 口脣刻目文이 장식된 孔列二重口緣土器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서북계의 角形土器와 동북계의 공열토기가 복합된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하바로프스크 고고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시피얀꼽스키나 리브도카와 같은 연해주지방의 청동기시대에 기원한다고 하겠다. 이의 우리 나라의 최초 예로 이제까지 기원전 7세기 전후의 유적으로 여겨져 왔던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 유적080)崔夢龍,<欣岩里 先史聚落址の 特性>(≪韓國考古學報≫20, 1987), 11쪽.을 들었으나 이곳 강릉 교동 유적이 앞설 가능성이 높아졌다. 서북계와 동북계의 양계의 문화가 복합된 최초의 지역이 남한강 유역이라기보다는 태백산맥의 동안인 강릉일 가능성은 앞으로 문화 계통의 연구에 있어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또 속초시 조양동에서 나온 扇形銅斧는 북한에서 평안북도 의주군 미송리, 황해북도 신계군 정봉리와 봉산군 송산리, 함경남도 북청군 토성리 등지에서 출토된 예가 보고되어 있지만081)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유적유물도감≫(1989). 남한에서는 유일한 것이다.

 청동기시대의 시작은 기원전 15세기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커졌으나(현재 학계는 우리 나라 남한의 청동기시대 전기는 기원전 15∼10세기로 올리고 있음), 토기의 시작에서 보면 청동기의 수용은 그 연대를 약간 늦게 본다. 이는 청동기시대의 단사선문이 있는 이중구연토기의 단계 다음 각형토기와 공열토기가 사용된 후 이후에야 청동기가 북으로부터 받아들여졌다고 보는 견해 때문이다. 속초 조양동의 경우 바로 위쪽의 함경남도의 동북지방에서 왔을 가능성이 많다.

 우리 나라의 거석 문화는 지석묘(고인돌)와 입석(선돌)의 두 가지로 대표된다. 그러나 기원전 4500년 전후 세계에서 제일 빠른 거석 문화의 발생지로 여겨지는 구라파에서는 지석묘(dolmen), 입석(menhir), 스톤써클(stone circle:영국의 Stonehenge가 대표), 스톤 어라인먼트(Stone alignment:불란서 까르냑이 대표)와 연도(널길)있는 석실분(passage grave), 연도(널길)없는 석실분(gallery grave)의 여섯 가지 형태가 나타난다.082)Glyn Daniel,≪Thr Megalith Builders of Western Europe≫(Penguin Books 1962), pp. 11∼28. 이중 거친 할석으로 만들어지고 죽은 사람을 위한 무덤의 기능을 가진 지석묘083)Roger Joussaume,≪Dolmens for the Dead-Megalithic Building through the World-≫(B. T. Batsford Ltd London, 1985), p.13.는 우리 나라에서만 약 29,000기가 발견되고 있다.084)崔夢龍·金仙宇, 앞의 책(2000), 2쪽. 중국의 요녕성085)河文植,≪古朝鮮 地域의 고인돌 硏究≫(백산자료원, 1999).과 절강성086)李榮文,<中國 浙江省地域의 地石墓>(≪文化史學≫11·12·13집, 1999), 1003∼1044쪽.의 것들을 합하면 더욱더 많아질 것이다. 남한의 고인돌은 北方式, 南方式과 蓋石式의 셋으로 구분하고 발달 순서도 북방식-남방식-개석식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지석묘는 침촌리와 오덕리의 두 형식으로 대별되는데, 그 발달 순서도 변형의 침촌리식(황해도 황주 침촌리)에서 전형적인 오덕리(황해도 연탄 오덕리)식으로 보고 있다. 우리 나라의 지석묘 사회는 일반적으로 전문직의 발생, 재분배 경제, 조상 숭배와 혈연을 기반으로 하는 계급 사회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지석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하여는 연대와 형식의 문제점 때문에 현재로서는 구라파쪽에서 전파된 것으로 보다 ‘韓半島自生說’087)최몽룡,<한국 지석묘의 기원과 전파>(최몽룡·김선우, 앞의 책, 2000), 9∼17쪽.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비해 한 장씩의 판석으로 짜 상자모양으로 만든 石棺墓 또는 돌널무덤(石箱墳)의 형식이 있다. 金元龍은 “이러한 석상분은 시베리아 청동기시대 안드로노보기에서부터 나타나 다음의 카라숙-타가르기에 성행하며 頭廣足狹의 형식과 屈葬法을 가지며 우리 나라에 전파되어 청동기시대 지석묘에 선행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이 분묘는 확장되어 북방식 지석묘로 그리고 지하에 들어가 남방식 지석묘로 발전해 나가는 한편 영남지방에서는 石槨墓로 발전해 삼국시대의 기본 분묘형식으로 굳히게 된다”고 보고 있다. 즉 그는 석관묘(석상분)-지석묘(북방식/남방식)-석곽묘로 발전한다고 생각하며, 대표적인 석관묘의 유적으로 銅泡와 검은 긴 목항아리가 나온 江界市 豊龍里, 鳳山郡 德岩里, 丹陽 安東里를 들고 있다.088)金元龍,≪韓國考古學槪說≫(일지사, 1986), 96∼97쪽. 석관묘(석상분)와 지석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하여는 선후 문제, 문화 계통 등에 대해 아직 연구의 여지가 많다.089)최근 남쪽의 지석묘관계 유적의 절대연대로 전남 여천군 화장동이 기원전 825·795·685년, 대전 대덕구 비례동이 기원전 1005년, 그리고 화순 춘양면 대신리가 기원전 555년의 연대가 나와 파주 옥석리의 기원전 640년과 황석리의 기원전 410년이 나온 1960년대의 지석묘 연대보다 훨씬 올라가는 것으로 되어 있어 지석묘의 상한연대가 비파형동검과 더불어 기원전 10세기 이전을 올라갈 가능성이 많아졌다. 그러나 여천 화장동에서 출토한 비파형동검은 재가공(재사용)의 흔적이 있어 연대를 산출하는 데 주의를 요한다.

 러시아에서도 암각화의 연대에 대하여 이론이 많지만 대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암각화 유적은 예니세이강의 상류인 손두기와 고르노알타이 우코크의 베르텍과 아무르강의 사카치알리안(또는 시카치 알리안) 등을 들 수 있다. 이에 상응하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암각화는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암각화(국보 147호), 울주 언양면 대곡리 반구대(국보 285호), 고령 양전동(보물 605호)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외에도 함안 도항리, 영일 인비동, 칠포리, 남해 양하리, 상주리, 벽연리 영주 가흥리, 여수 오림동과 남원 대곡리를 들 수 있다. 울주 천전리의 경우 人頭(무당의 얼굴)를 비롯해 동심원문·뇌문·능형문(그물문)과 쪼아파기로 된 사슴을 비롯한 여러 동물들이 보인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러시아의 손두기, 베르텍과 사카치알리안의 암각화에서도 보인다. 이의 의미는 선사시대의 일반적인 사냥에 대한 염원, 어로, 풍요와 多産에 관계가 있을 것이다. 특히 반구대의 고래암각화는 미국 북서부 워싱턴주 오젯타의 마카부락민들처럼 고래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당시의 풍부한 고래잡이의 염원에 대한 표시일 것이다. 또 그들 신화의 반영도 된다. 사카치알리안 암각화의 동심원은 ‘아무르의 나선문(Amur spiral)으로 태양과 위대한 뱀 무두르(mudur)의 숭배와 관련이 있으며 뱀의 숭배 또한 지그재그(갈之자문)문으로 반영된다. 하늘의 뱀과 그의 자손들이 지상에 내려올 때 수직상의 지그재그(이때는 번개를 상징)로 표현된다. 이 두가지 문양은 선의 이념(idea of good)과 행복의 꿈(dream of happiness)을 구현하는 동시에, 선사인들의 염원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물문(Amur net pattern)은 곰이 살해되기 전 儀式 과정 중에 묶인 끈이나 사슬을 묘사하며 이것은 최근의 아무르의 예술에도 사용되고 있다.090)Alexei Okladnikov, Art of Amur(New York:Harry N. Abrams, INC., Pb. 1981), p. 92.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나나이(Nanai)족의 조상이 만든 것으로 여겨지며 그 연대는 기원전 4∼3000년경(이 연대는 그보다 후의 청동기시대로 여겨짐)으로 추론된다고 한다. 이들은 肅愼-挹婁-勿吉-靺鞨-女眞-滿州-淸으로 이어지는 역사상에 나타나는 種族名의 한 갈래로 현재 말갈이나 여진과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 전기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영일만(포항)에서부터 시작하여 남원에 이르는 내륙으로 전파되었음을 본다. 아마도 이들은 아무르강의 암각화 문화가 海路로 동해안을 거쳐 바로 영일만 근처로 들어온 모양이며 이것이 내륙으로 전파되어 남원에까지 이른 모양이다. 청동기시대의 석관묘, 지석묘와 비파형동검의 전파와는 다른 루트를 가지고 있으며, 문화계통도 달랐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포항 인비동과 여수 오림동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기존의 청동기(비파형 또는 세형동검)과 마제석검을 사용하던 청동기∼철기시대 전기 사회에 쉽게 융화되었던 모양이다.091)최몽룡,≪도시·문명·국가≫(서울대 출판부, 1977), 213∼217·245쪽. 우리의 암각화에서 보여주는 사화의 상징과 표현된 신화의 해독이 아무르강의 사카치알리안의 암각화와 기타 지역의 암각화와의 비교연구 그리고 이의 결과에 따른 문화계통의 확인이 현재 한국 문화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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