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Ⅱ. 한민족의 기원
  • 3. 문헌에 보이는 한민족문화의 원류
  • 1) 곰과 호랑이 토테미즘

1) 곰과 호랑이 토테미즘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의 건국 신화는 불교와 도교적인 요소도 첨가되었지만 동북아시아에서 유행한 샤머니즘적인 색채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데, 이 신화의 핵심은 곰에서 化身한 여인 熊女와 天帝의 아들 桓雄의 神婚, 이들 사이에 태어난 단군의 건국이다. 이것이 동북아시아에 광범위하게 유행한 곰 토테미즘을 반영한 것이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곰과 함께 인간이 되려고 하였으나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인간이 되지 못한 호랑이와 인간이 된 곰이 본래 한 굴에서 생활하였다는 대목을 주목하면 이 신화는 곰 토템과 호랑이 토템 집단의 밀접한 교섭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최근까지도 호랑이를 산신으로 崇敬하는 ‘虎文化’가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잔존하고 있지만, 魏書 夷傳도 濊人들이 호랑이를 산신으로 제사하는 전통을 명시하고 있다. 현재 운남성에 거주하는 彝族들은 지금도 호랑이를 조선으로 신앙하는 각종 제의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족은 고대 중국 서북지역에서 활동하던 羌·氐族의 후예라고 한다. 또 춘추시대 楚의 귀족 班氏의 조선 鬪殼於兎가 들에 버려저 호랑이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고사도(≪左傳≫宣公 4년) 반씨의 토템이 호랑이었음을 시사한다.≪後漢書≫南蠻西南夷傳에 의하면 巴郡 南蠻의 조선은 4개의 穴에서 나왔다고 하는데(제주도 三聖穴 신화와 비슷), 그 군장 廩君이 죽은 후 혼백은 白虎가 되었으며, 巴人들은 호랑이가 인간의 피를 먹는 것으로 생각하여 인간을 호랑이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러한 예들은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집단이 적어도 춘추시대 이전부터 중국 서북부와 양자강 중류 지역에서도 활동하였음을 말해 준다. 江西省 新干 商代墓에서 대량 출토된 청동기들도 호랑이의 모티프가 강하게 표출된 것이 특징인데, 입을 크게 벌린 두 마리의 호랑이를 좌우에 수직으로 배치하고 그 두 입 중앙에 人面을 넣은 商代의 石彫와(<그림 1>) 쪼그리고 앉은 호랑이가 크게 벌린 입 아래 아이를 품고 있는 형상의 西周 초기 청동기 ‘虎食人卣’는(<그림 2>) 殷·周時代 호랑이 토테미즘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 같다. 이 석조와 ‘호식인유’도 종래에는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는 장면으로 이해되었지만, 근래에는 호랑이를 통한 인간탄생의 신화를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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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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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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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곰 토테미즘 역시 동북아 지역에서 오랜 전통을 갖고 있었다. 현재에도 중국 동북지방에 거주하는 滿洲族·鄂倫春族·赫哲族 간에는 시조와

 母熊이 결혼하였다거나 곰이 인간으로 또는 인간이 곰으로 화신하였다는 신화와 전설이 전하고 있다. 종래 이 문제와 관련 동한말 건립된 山東省 嘉祥縣 武氏祠堂의 화상석이(後室第三石, 屋頂前坡東段石,<그림 3>) 단군신화의 내용을 전한 것으로 지적되었는데, 특히 제 3층 右端 각종 병기를 머리(弓)와 손발에 든 곰과 입 앞에 작은 사람의 형상이 묘사된 동물이(호랑이?) 단군신화의 핵심부분을 묘사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단군신화가 고려말에 창작된 것이 아니었다는 논거로 왕왕 원용되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장면은 黃帝와 蚩尤의 전쟁신화를 묘사하였다는 해석도 있고, 특히 곰 옆의 장면은 한발을 퇴치하는 신화와 관련된 ‘虎吃女魃圖’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 장면은 황제와 치우의 전쟁은 물론 호랑이가 한발의 疫鬼를 잡아 먹는 장면을 묘사한 다른 화상석과도 너무나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필자는 무씨사당 후실 제3석 제3층은 대체로 연말 臘日의 전날 밤에 거행되는 疫儀式 大儺祭를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는데, 병기를 휘두르는 곰은 熊皮를 뒤집어 쓰고 병기를 휘두르며 역귀를 쫓는 눈이 네 개인 方相氏, 그 밖의 12개의 인물과 동물상은 역귀를 잡아 먹는 12神, 작은 사람의 형상이 이 의식에서 잡아 먹히는 악귀에 각각 비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나제의 주역 방상씨가 곰가죽을 뒤집어 썻다는 것도 상당한 곰신앙을 반영한 것이며, 이것은 중국인의 시조로 추숭되는 黃帝가 有熊氏였다는 전승을 상기하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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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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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비해 산동성 臨沂縣 普村 출토 墓門石柱의 조각(<그림 4>), 즉 앉아 있는 곰의 하반신이 인간의 아기를 안고 있는 형체의 어깨 윗 부분을 이루는 형상은 熊母를 통하여 탄생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 분명하다. 한편 최근 중국 고고학은 은주시대 곰을 소재로 한 소형 조각과 문양을 다수 보고하고 있지만, 특히 기원전 3000년경 遼河 유역 내몽고와 요서를 중심으로 번영하였던 紅山文化에 속하는 소형 玉製 人熊像도 다수 확인되었다(<그림 5>). 이 형상은 대체로 머리는 곰, 몸은 임산부의 모습을 띄고 있어 인간을 출산하려는 熊母의 모습이 약여하다. 이 때문에 중국의 학자는 이 부류의 옥기를 곰 토테미즘의 산물로 이해하면서 이 옥기들에 ‘玉熊母神’이란 명칭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이 주장을 반대할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홍산문화의 분포 지역 즉 내몽고 동부, 대릉하 유역, 遼西 지역의 곰 토테미즘이 기원전 3000년경 이상 소급될 수 있다는 주장도 굳이 부인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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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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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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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韓民族 문화의 원류는 우선 각각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한 집단중 상호 밀접한 교섭관계에 있었던 집단과 그 문화에서 찾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濊가 호랑이를 신으로 제사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현재 앞에서 언급한 한민족 형성의 범위 집단과 곰 신앙 또는 곰 토템의 관계를 직접 언급한 자료는 확인되지 않으며, 周初 東北夷의 특산물 조공을 기록하였다는≪逸周書≫王會解는 不屠何가 靑熊을 東胡가 黃熊을 각각 조공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濊와 흔히 병칭되는 貊은 바로 이 문제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 같다. 貊은 흔히 貉(맥)으로도 표기되는데, 貉(각)은 털은 棕灰色에 산고양이나 여우와 비슷한 짐승이라고 한다. 따라서 貊과 貉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면 貊과 곰의 관계는 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貊이 獸名으로 사용될 경우 貘(맥)과 통용되는데,≪爾雅≫는 貘을 ‘白豹’로 주해하였으나≪說文解字≫는 “곰과 비슷하며 황흑색”으로 설명하였는데,≪이아≫郭璞注에 의하면 이것은 “곰과 비슷하며 작은 머리, 쏙 들어간 다리에 흑백이 섞인 색으로 銅·鐵 및 竹骨을 먹을 수 있다”고 한다.≪일주서≫왕회해는 푸른 곰과 누런 곰을 각각 조공하는 불도하와 동호에 앞서 玄貘을 不令支의(漢代의 令支현은 현 요녕성 遷安 부근) 조공품으로 전하고 있다. 따라서 貊은 곰은 아니나 곰처럼 보이는 동물로 보인 것은 확실한데,≪일본서기≫가 貊에 속하는 고구려를 狛으로 표기하고 ‘고마’로(곰) 훈독한 것을(권 19, 欽明天皇 6년) 상기하면 貊은 사실상 곰을 표기한 것으로 보아도 대과는 없는 것 같다. 이것을 熊 대신 貊으로 표기한 것은 고구려의 大山 蓋馬, 鉅燕 남 倭의 북에 있다는 蓋國(≪산해경≫海內北經) 등을 고려할 때 貊의 발음이 맥족의 자칭어에 근접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어머니 河伯의 딸 柳花를 熊神山 아래 압록강변의 室에서(熊穴을 상징) 사통하였다는 설화(≪삼국유사≫고구려), 檀君이 西河 하백의 딸과 사통하여 夫婁를 낳았다는 설화(≪삼국유사≫고구려 註記), 주몽이 단군의 아들이었다는 일설(≪삼국유사≫王曆篇 東明王)은 곰을 매개로 단군과 주몽이 결합된 사정을 시사하는데, 고구려의 10월 제천의식 東盟에서 東郊에 있는 大穴 즉 隧穴에서 모셔와 제사한 隧神도 동굴에 거처하던 熊母神으로 보아도 대과는 없는 것 같다. 이때 神坐에 木隧를 설치한 것으로 보아 隧神 역시 木像으로 추측되는데,≪北史≫고구려전은 夫餘神과 그 아들의 神廟를 소개하면서 木刻婦人像의 부여신(일명 高登神)을 하백의 딸로 그 아들을 주몽으로 명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고구려 역시 곰 토템의 전통을 계승한 증거인데, 貊이 실제 곰을 지칭한 것이었다면 이 역시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의 등장은 濊와 貊族의 긴밀한 교섭 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구려의 일명이 貊이었고(≪後漢書≫동이전), 小水貊은 고구려의 별종,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으로 言語諸事가 부여와 동일하였으며, 부여는 본래 예맥의 땅으로서 그 國城의 명칭은 濊城이고 그 왕이 중국에서 ‘濊王之印’을 받았으며, 沃沮 역시 고구려와 언어가 大同하고 음식·거처·의복·예절도 고구려와 비슷하였으며, 예 역시 고구려와 同種으로 言語法俗이 대체로 고구려와 같았던 사실(이상 ≪三國志≫魏書 東夷傳) 등을 아울러 고려할 때≪삼국지≫魏書 동이전에 수록된 민족과 국가중 부여·고구려·소수맥·옥저·예를 단군 신화가 형성된 배경 집단으로 일단 인정해도 대과는 없는 것 같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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