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Ⅱ. 한민족의 기원
  • 3. 문헌에 보이는 한민족문화의 원류
  • 3) 산악신앙과 신수신앙

3) 산악신앙과 신수신앙

 단군신화의 또 다른 핵심은 천제의 아들 환웅이 徒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의 정상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인간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하였다는 부분이다. 이것은 山嶽信仰과 神樹信仰을 반영한 것이었다는 것은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으며, 이 역시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 도처에서 확인되는 원시 신앙이다. 고대인에게 산은 각종 精靈과 諸神이 거주 또는 출입하는 非 인간의 세계로 인식되었고, 특히 그 정상은 천계로 곧 바로 연결되는 신성한 장소였다. 천제의 아들이 하강한 장소가 태양숭배의 상징인 태백산의 정상이었다는 것은 극히 당연하였다. 수목, 특히 거대한 수목도 정령과 신이 깃든 것으로 경배되었지만, 생명의 영생과 자손의 번식을 보증하는 존재로도 인식되었기 때문에 上古 중국에서는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聖所인 社에 수목을 심거나 巨樹 또는 叢林을 社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 성황당 주변에 작은 숲 또는 몇 그루의 나무가 있는 것도 바로 이 수목신앙을 반영한 것이다. 또 고대 중국에는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여 천지간을 왕래할 수 있는 사다리로 이용되는 天梯神樹 또는 宇宙軸樹의 관념도 보이는데,≪산해경≫海內南經과≪淮南子≫墜形訓에 소개된 建木이 바로 그것이다.

 환웅이 태백산 정상 神壇樹 아래 하강한 것은 바로 산악신앙과 신수신앙이 결합된 관념을 반영한 것이 분명하며, ‘신단수’란 표현이 정확하다면 수목 주변에 神壇을 쌓았거나 신단을 쌓은 후 수목을 심은 것으로 추정되어 단순한 신성한 숲에 대한 신앙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184)그러나≪삼국유사≫가 단군도 ‘壇君’으로 표기한 것을 보면, 본래는 ‘神檀樹’일 가능성도 높다. 어쨌든≪삼국유사≫는 이 부분을 “降於太白山頂神壇樹下 謂之神市”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을 환웅이 신단수 아래 ‘神市’를 열었다고 해석한 후 ‘神市’를 ‘신시’로 읽고 ‘신의 도시(city)’로 이해하는 것이 종래의 정설이다. 그러나 우선 문맥상 ‘神巿’는 神壇樹를 가르키는 것도 분명하며, 여기에 ‘연다(開)’는 의미가 개입될 여지도 없다. 더욱이 한자의 ‘市’가 도시를 의미한 것은 근대 행정제도가 도입된 이후이며, 본래는 사람이 모여 물건을 사고 파는 교역의 장소를 의미하였다. 唐代까지도 市는 성내의 일정한 구역에(문을 통하여 출입하는) 한정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城市’(≪後漢書≫方術傳 廖扶傳) 또는 ‘市邑’은(≪潛夫論≫浮侈篇) 각각 ‘성안의 시장’ 또는 ‘시장이 있는 읍’ 정도의 의미에 불과하였으며, ‘市’ 한 자로 성읍을 표현한 예도 없다. 다만 宋代 이후 성외 교통의 요지에 교역이 발달하면서 취거가 형성된 곳에 鎭이 설치된 이후 이것을 ‘市鎭’ 또는 ‘市’로 칭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나, 이 역시 도시 보다는 시장의 의미가 강조된 개념이다.

 그렇다면 ‘신시’가 ‘신의 도시’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렇다면 ‘신시’는 ‘신의 시장’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나 산 정상의 시장을 열었다는 것은 너무 어색하다. 물론 시장의 원초적인 형태가 본래 祭儀가 거행되는 기간 교역이 이루어지는 聖所였던 것은 사실이며, 이 점은 최근 중국고대사 연구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관견에 한한 문헌상 ‘시(市)’에서 제의 또는 특수한 종교적 주술적 의식이 거행되는 것은 확인되지만, 성소 자체를 ‘市’로 표현한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즉 문헌상 성소 자체를 ‘시’로 표현한 예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설혹 신단수 또는 그 부근이 성소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의 원초적 성격을 기억하여 ‘신시’로 표기하려고 해도 이미 ‘시’에는 그런 의미를 전달할 含意가 없었고, 따라서 ‘신시’는 ‘신의 성소’라는 의미로 전달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神市’의 ‘市’를 ‘시(巾部 2획)’로 읽는 한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이것이 ‘巿(불)’(巾部 1획)일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는데, 역시 ‘巿(불)’에는 ‘초목이 무성한 모습’이란 의미가 있었고≪說文解字≫도 ‘불’을 “草木巿巿然”으로 해석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불’은 叢木 또는 叢林이며, 따라서 ‘신불’은 수목 신앙과 관련하여 흔히 지적되는 神叢과 동일하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며, 이 해석만이 단군신화에 포함된 수목신앙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문맥상의 어색함도 사라진다.

 한편 신라 6촌의 촌장들이 모두 山頂으로 하강하였고, 南解王의 비가 운제산성모로 신앙되었다는 것은 모두 산악신앙을 반영한 것이며, 수로왕이 깨어난 황금알이 담긴 붉은 보에 싸인 金盒이 하늘에서 龜旨峰으로 내려 왔다는 수로왕 설화도 황금문화, 난생, 태양, 거북(또는 해상 이동) 신앙과 함께 결합된 산악신앙의 존재를 시사한다. 이에 비해 김알지설화에 보이는 수목신앙은 산악신앙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 이 점은 위지 동이전 馬韓傳에 전하는 蘇塗에 반영된 수목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소도는 國의 別邑에 세운 ‘大木’이기 때문이다. 이 별읍을 소도라고 한 것은 이 대목이 곧 소도였기 때문인 것 같다. 신주 역시 신수신앙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소도에 북과 방울을 걸어 놓고 귀신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수목신앙에 속하는 것은 분명하다. 북과 방울이 신을 부르는 神器였다면, 소도는 천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天梯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樹가 아닌 木柱였다는 것은 수목신앙의 원형을 많이 상실하여 김알지 설화의 수목신앙보다 시기적으로 늦은 것으로 보이는데(이 大木은 정기적으로 산에서 벌목해 왔을 것이다), 이 소도를 세우는 의미를 불교와 비슷하나 선악의 기준이 다르다고 한 것은 단순한 샤머니즘적 단계를 넘어서 사회 규범을 통제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제의로 발전하였던 것 같다. 이 성소를 제사한 것으로 보이는 天君도 國邑의 군장이 아니었다는 것은 이 소도신앙이 君長權과 분리된 후기 단계를 시사하지만, 天君이 별읍의 長이었다면, 그리고 죄인도 그곳으로 피신하면 안전하였다는 것은 祭政이 분리되면서 제사가 俗權에 완전 종속되기 이전의 과도 단계를 말해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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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
<그림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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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도는 지금도 남아 있는 솟대나 장승의 원류였다는 것이 정설인데, 솟대 위에는 새 모양이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소도와 새의 관계를 직접 언급한 자료는 없다. 그러나 대전 부근에서 발견한 청동기에는 앞면에는 약간 휘어진 Y자의 양 가지에 각각 새가 앉아 있는 모습과 뒷면에는 농경의례로 추정되는 각화는 소도 의식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그림 14>). 또≪삼국지≫위서 동이전 倭傳의 對蘇國은 현재 일본의 鳥棲에 해당하는데, 이 지역에서 역시 신을 부르는 神器의 일종인 銅鐸도 출토되었다면, 蘇塗와 그 발음의 도치인 對蘇도 ‘새가 깃든’ 또는 ‘새가 깃든 장대’ 정도의 의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 새가 앉아 있는 神竿은 동남아시아에서 중국 동남 연안에 이르는 지역은 물론 내륙 운남성과 일본에서도 낯설지 않는 풍경이다. 소도로 변형된 수목신앙은 종래 주로 북방문화의 계통으로 이해해 왔지만, 역시 중국 남부 문화권과 관련된 것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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