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Ⅱ. 한민족의 기원
  • 3. 문헌에 보이는 한민족문화의 원류
  • 5) 조선·한·예·맥의 공간

5) 조선·한·예·맥의 공간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수록된 부여·고구려·小水貊·沃沮·濊·三韓의 위치는 상호간의 경계나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한 이견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대체로 한반도와 그 북부, 요동반도의 이동에 분포한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위만과 그가 쫓아낸 準王의 도성 왕검성도 현 대동강 유역의 평양 부근이 거의 확실한 것 같다. 따라서 전국시대(기원전 3세기 초) 조선이 燕에 의해 2천 리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당시 조선의 서쪽 세력 범위는 대체로 대릉하 유역까지 미쳤고, 그 도성 역시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요동 부근에 있었을 가능성도 인정된다. 그러나 중국에서 왕검성에 이르기까지 건너는 遼水·滿番汗·浿水·列水 등의 위치를 재 비정하여 심지어 요수도 현재의 灤河로 보는 한편 왕검성과 동일한 의미로 추정되는 險瀆이 한대 요동군의 險瀆縣 및 하북성 난하 하류의 昌黎에서도 확인된다는 것을 이유로 단군 또는 기자조선의 중심부를 난하 유역으로 설정하는 주장은 찬성하기 어렵다. 시대에 따른 지명과 水名의 이동을 고려하는 것도 상식이며, 險瀆이(임금의 터?) 王都 또는 군장의 읍을 왕검성으로 명명하는 집단이 남긴 지명이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러나 조선과 동일한 계통에 속하는 집단이 전국시대 이전 이미 하나의 왕권에 통합되었다는 증거도 없지만, 조선의 왕도명이 왕검이었다는 것과 ‘임금의 터’가 모두 조선의 왕도였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좌전≫중 춘추시대의 주왕이 주왕조의 ‘北土’ 즉 북계를 “肅愼 燕亳”으로 표현한 것은 (昭公 9년) 적어도 주초의 貊은 연산산맥 부근에서도 활동한 인상을 준다. 이것은 燕과 亳이 連接한 인상을 주는데, 당시 연의 국도는 북경 남쪽 琉璃河에 있었고 ‘박’은 貊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 흔히 거론되는 것은 周 宣王에 의한 韓侯의 재책명을 묘사한≪시경≫韓奕篇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즉 “薄彼韓城 燕師所完 因先祖受命 因時百蠻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저 웅대한 한성, 燕師가 완성해 주었네, 네 선조가 명을 받아 百蠻을 관리하였도다. 왕이 한후에게 (다시 명을) 내리니 追와 貊을 (복속하여) 북국을 (어루만지는 명을) 받아 그 伯이 되어라)”. 여기서 ‘追’가 ‘濊’라면 이 구절은 ① 당시 예맥이 한성 부근에 존재하였고, ② 한이 이처럼 예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면 위지 동이전에 보이는 한반도 남부의 韓도 西周의 韓城 부근에서 활동한 시기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이 한성은 어디에 있었는가. 종래 이 문제는 섬서 韓城縣과 하북 方城縣說이 대립되어 왔다. 후자는 특히 韓과 燕의 근접성을 고려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때문에 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燕’을 ‘安’(평안한 시기)으로 해석함으로써 한과 연의 관계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초 燕 昭公은 陝 이동의 군사를 총괄하였고, 周王이 被封 제후의 도성과 궁을 건설해 주는 예도 확인되는 만큼 섬서성의 한성 축조에 燕의 인력이 동원되었다고 해도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라면, 섬서 한성설도 부정할 이유가 없지만, 韓城이 韓의 이동과 함께 섬서 북부에서 하북 북부로 이동한 것으로 이해하면 양설이 모두 성립할 수도 있다. 실제 하북성 文安·大城·任丘 일대에도 濊水·濊口·濊邑(한대에 章武縣으로 개명)·貊邑(진한대에 莫縣을 개명) 등의 고지명이 전한다고 한다. 漢初 기병을 보내 漢을 도운 北貉과 北人도(≪漢書≫高祖本紀 4년 8월) 華北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집단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것은 결국 주대의 예·맥·한이 모두 주로 狄의 무대로 알려진 중국 북방과 하북의 북부에서도 활동한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188)이것을 근거로 춘추시대 晉의 북방에서 활동한 驪戎도 고구려 貊의 一支로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이 여융은 山西의 箕와 교섭하였을 것이며, 훗날 고구려가 箕子神을 모신 것도 바로 이 교섭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배제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貊과 동방 夷와 연칭된 예가 없는 반면 왕왕 貊과 狄이 연칭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으며, 역대 주석가들이 대부분 貊을 東夷가 아닌 北狄으로 분류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 보이는 梁貊은 太子河의 古名 梁水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韓奕篇이 韓城의 소재를 梁山으로 명기한 것을 상기하면, 양맥은 韓侯에 예속되었던 貊이었을 가능성이 높고,≪尙書≫周官 孔氏傳의 “海東諸夷 句麗 扶餘 馯貌”의 ‘馯貌’도 ‘韓貊’의 異寫라면, 이 역시 韓과 貊의 관계를 다시 한번 입증해 준다. 조선이 韓姓을 칭하였다는 것(≪潛夫論≫志氏姓, 여기서 조선은 ‘韓西’로 표기, 西는 ‘鮮’과 통한다), 위만에 내쫓긴 準王이 海中으로 피신하여 韓王을 칭하였고189)위만 조선에 남아 있던 준왕의 일족도 準王이 韓王을 칭하자 韓姓을 칭하였다고 하나, 이것은 오히려 준왕이 그 이전에도 한왕을 칭한 증거일 것이다.(그 이전에도 한왕을 칭하였을 것), 韓人들이≪魏略≫이 찬술된 시기에도 그를 계속 제사하였다는 것은(≪위략≫) 모두 섬서성 韓侯에 복속되었던 예맥의 東遷을 상정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이에 비해 주초 魯侯의 淮夷·徐戎 정복을 찬양한≪시경≫魯頌 閟宮의 다음과 같은 싯귀는 貊의 일부가 회수 유역에서도 활동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 같다. 즉 “遂荒徐宅 至于海邦 淮夷蠻貊 及彼南夷 莫不率從(마침내 徐의 영토를 차지하고 해변의 나라에 이르니 회이와 蠻貊, 저 南夷들도 복종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선진 문헌에 보이는 동이 제 집단이≪삼국지≫위서 동이전에 보이는 동이와는 그 문화계통이 전혀 다르다. 그러나 상고 동남의 부족이 서북으로, 서북의 부족이 동남으로, 또는 산동반도의 집단이 요동반도의 남단으로 각각 이동하는 예도 적지 않으며, 이에 따라 각 지역의 문화의 상호 영향이 확인되기도 한다. 특히 서주초 서북의 周族과(魯를 비롯한 姬姓 제국) 羌族이(齊를 비롯한 姜姓 제국) 대거 산동에 봉건되었고, 회이와 남이에 대한 정벌전쟁도 장기간 계속되었다. 따라서 동남의 淮夷와 南夷 지역에 서북 또는 북방의 戎과 貊이 부분적으로 잡거하게 되고, 예맥계의 지명도 남았을 것이다190)예컨대≪좌전≫에 보이는 牟婁(산동 諸縣 동북)·根牟(산동 沂水縣 남)·介(산동 高密縣 서) 등은 예맥계의 지명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 지역의 ‘동이’를 모두 예맥계로 보는 것은 금물이다. 또 산동에서 齊와 경쟁한 萊도≪逸周書≫의 良夷와 동일한 것으로 보고 예맥계로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나 별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김상기 박사가 주장한 바와 같이 徐戎은 예맥과 동계일 가능성도 있으며, 주몽설화와 서언왕의 설화가 비슷한 것도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맥의 일부가 동남으로 이동하여 일시 세력을 떨첬다는 것과 이 지역의 문화가 동북 예맥에 영향을 미친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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