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3. 고려
  • 1) 정치적 특성
  • (1) 중앙의 정치체제와 그 성격

(1) 중앙의 정치체제와 그 성격

 고려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전근대 왕조국가의 하나였던만큼 국왕권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국가를 경영하여 감에 있어서 국왕은 신료들과 정치권력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서 정치체제가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대두하게 된다. 그것의 여하에 따라 국왕과 신료 양자간에 지니는 정치권력의 대소, 강약이 영향을 받았겠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먼저 중앙의 정치기구들에 대해 살펴보면, 그 가장 핵심적인 기구는 泰封 이래의 廣評省·內奉省 등을 이으면서도 한편으로는 唐의 제도에서 모범을 구한 3省(中書門下省·尙書省)과 6部(吏部·兵部·戶部·禮部·刑部·工部)였다. 그 아래에 다시 諸寺·監과 諸署·局 등이 있었지마는, 또 宋制와 계통이 가까운 中樞院(樞密院)과 三司, 그리고 고려 자체의 필요성에서 생긴 都兵馬使·式目都監 등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기구들이었다. 고려 때의 중요 정치기구는 크게 말해서 이처럼 세 계통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운용되어 갔다는 데서 우선 한 특성을 엿볼 수 있다.263)邊太燮,<高麗의 政治體制와 權力構造>(≪韓國學報≫4, 1976).

 그런데 이들 기구는 조직상으로 2품과 3품을 경계로 하여 상·하 이중으로 편제되었다는 점에 또 다른 특징이 있었다. 예컨대 중서문하성의 경우 2품관 이상으로서, 宰臣·宰相·省宰 등으로 불리며 議政機能을 담당했던 宰府와, 3품관 이하로 諫官·省郞 등으로 불리며 諫諍·封駁·署經 등을 담당했던 郎舍로 편성되었던 것이다. 中樞院과 尙書省도 마찬가지여서 전자의 경우 역시 2품관-후대에는 3품관 포함-으로 樞密·宰相 등으로 불리며 의정기능-후대에는 軍政 포함-을 담당했던 樞府와, 3품관으로 承宣이라 불리며 왕명의 출납을 맡았던 承宣房, 그리고 후자는 주로 문서 수발과 국가적 행사를 주관하던 2품 이상 관원의 조직인 尙書都省과 국정을 분담하여 집행하던 3품 이하 관원의 조직인 尙書6部(6部)로 나뉘어져 있었다. 고려에서 이같이 기능을 달리하는 두 조직을 한 기구 내에 설치한 것은 제도의 未分化性이라는 측면에서 볼 수도 있겠으나 일면 고려 나름으로 정국 운영의 묘를 염두에 둔 조처라는 파악도 있어264)邊太燮, 위의 글.
朴龍雲,<高麗時代의 臺諫과 宰樞文武兩班>(≪誠信女大論文集≫12, 1979:≪高麗時代 臺諫制度 硏究≫, 一志社, 1980).
주목할 필요가 있는 양상의 하나이다.

 한데 이들 상·하 조직을 다시 정치권력면에서 보면 한층 비중이 큰 것은 상층조직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재부와 추부는 兩府로서 정치의 중심에 위치하였는데, 이곳의 구성원인 宰臣과 樞密은 앞서 언급했듯이 宰相으로서 국왕과 중요 국정을 논의하는 의정 기능과 함께 그의 집행을 직접 관장하기도 했다는 데서 그 같은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을 보여주는 하나의 제도적 조처가 6部判事制였다. 判尙書吏部事(判吏部事)·判尙書兵部事(判兵部事) 등이 그런 직위들인데, 고려에서는 6부의 장관인 尙書(정3품) 위에 判事를 더 두고 재부의 재신들로 하여금 겸직하게 하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判吏部事를 겸직하는 宰臣이 首相이 되고, 判兵部事를 겸직하는 재신이 亞相, 判戶部事 겸직자가 3宰, 이하 차례로 내려가 判工部事가 6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宰臣判事의 6부에 대한 권한은 매우 강력하면서도 직접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65)邊太燮,<高麗時代 中央政治機構의 行政體系-尙書省 機構를 중심으로->(≪歷史學報≫47, 1970:≪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朴龍雲,<高麗時代의 6部判事制에 대한 考察>(≪고려시대연구≫Ⅱ, 2000:≪高麗時代 尙書省 硏究≫, 景仁文化社, 2000).
재신들에 의해 6부가 통할되는 면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6部尙書도 宰樞가 중복직으로 지니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즉, 吏部尙書·兵部尙書 등의 각 尙書職을 재신의 경우 주로 叅知政事·政堂文學·知門下省事가 일부를 帶有하였으며,266)朴龍雲,<고려시대의 叅知政事>·<고려시대의 政堂文學>·<고려시대의 知門下省事>(≪고려시대 中書門下省宰臣 연구≫, 一志社, 2000). 또 中樞院使(樞密院使)·知中樞院事·同知中樞院事 등 樞密들 역시 재신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상서를 중복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267)朴龍雲,<高麗時代의 尙書6部에 대한 檢討>(≪高麗時代 尙書省 硏究≫, 景仁文化社, 2000).
―――,<고려시대 樞密에 대한 검토>(≪高麗時代 中樞院 硏究≫91, 高麗大 民族文化硏究院, 2001).
물론 상서들이 독립직·단독직으로 존재하는 사례도 보인다. 하지만 이들보다도 宰臣判事와 재추 상서들은 그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찾아지는 것이다. 이 같은 제도의 운용으로 국무의 집행기관인 尙書6部가 재추의 통할하에 있었다는 게 필자의 일관된 생각이다.268)朴龍雲,<고려시대 중앙 정치체제의 권력구조와 그 성격>(≪한국사≫13, 국사편찬위원회, 1993).
―――,<高麗時代의 宰臣과 樞密과 6部尙書의 관계를 통해 본 權力構造>(≪震檀學報≫91, 2001:≪高麗時代 中樞院 硏究≫, 高麗大 民族文化硏究院, 2001).
≪高麗史≫권 76, 百官志 모두의 서문에 “宰相이 6부를 統轄하였다”고 서술해 놓고 있는 것도 이런 점을 염두에 둔 설명이라고 짐작된다.

 종래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서도 국무를 6부가 직접 국왕에게 아뢰고 처리하였다는 ‘6部直奏制’說이 제기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는 6부 중심의 행정체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269)邊太燮, 앞의 글(1970). 이 같은 주장은 업무의 처리 과정상으로 볼 때 수긍이 가지만 권력구조면에서는 좀 달리 이해해야 할 것이라 판단된다.

 아울러 근자에 국왕권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비슷한 견해가 제시되었다.270)朴宰佑,<高麗前期의 國政運營體系와 宰樞>(≪歷史學報≫154, 1997).
―――,<고려전기 政策提案의 주체와 提案過程>(≪震檀學報≫88, 1999).
고려도 왕조국가의 하나였으므로 왕권이 결코 홀시되거나 낮게 평가될 수 없다는 것은 첫머리에서 지적했듯이 자명하다. 그러나 다만 국정의 운영 과정에 재추의 영향력이 개입될 여지가 많은 제도의 채택으로 상대적인 의미에서 왕권이 좀 미약했다는 정도의 이해인 것이다.

 고려의 정치체제가 이 같은 특성을 지니게 된 것은 그가 귀족사회였다는 사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회 자체의 성격이 그러하였던 만큼 자연히 정치체제에도 귀족적 요소가 많이 가미되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그 하나로 우선 정치의 근간이 된 內史門下省(中書門下省)의 설치가 귀족정치를 지향하는 유신세력이 그 중심기구로 내놓았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271)李泰鎭,<高麗 宰府의 成立-그 制度史的 考察->(≪歷史學報≫56, 1972). 그러므로 그것은 행정기관이 아니라 議政機關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 의정 과정도 내사문하성의 재신간에서뿐 아니라 중추원 추밀들과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의안의 결정은 議合이라 하여 재추 전원의 만장일치제를 채택하고 있기도 하였다.

 臺諫制度도 유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대간은 諫諍이나 時政의 득실을 논하는 기능 등을 통해 감히 왕권을 제약하고 국가의 중대사에 깊이 관여하는 귀족세력의 대표적 존재였기 때문이다.272)朴龍雲,≪高麗時代 臺諫制度 硏究≫(一志社, 1980). 이것 역시 귀족적 성격을 강하게 풍기는 제도의 하나였다.

 다음 관직상으로는 淸要職이나 檢校職과 같은 勳職제도에서 귀족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273)李基白,<貴族的 政治機構의 成立>(≪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高麗貴族社會의 形成≫, 一潮閣, 1990). 고려시대 중앙의 정치체제에서는 이처럼 여기저기서 귀족적 성격을 찾아볼 수 있으며, 이것이 곧 그의 가장 커다란 특질이었다고 할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