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3. 고려
  • 1) 정치적 특성
  • (3) 대외적 시련과 극복

(3) 대외적 시련과 극복

 고려의 역사 전개과정에서는 주변의 여러 나라와 빈번하게 항쟁과 교섭을 벌여 왔다는 성격도 나타나고 있다. 원래 한반도의 역사는 중국대륙의 정치형세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중국의 역사는 남방의 농경민족인 漢族과 북방 유목민족과의 끊임없는 투쟁사라고 할 수 있거니와, 이러한 중국의 남북간 대립이 한국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것은 東亞 국제정세의 삼각관계에 기인하는 결과로서, 중국 남북민족간의 대립에 있어 한국민족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했던 만큼 북방민족들은-때로는 漢族도 그러했지만-한국이 他方의 與國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 나라를 침략하곤 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한국이 어떠한 외교정책을 추구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지만, 어떻든 이러한 몇 가지 이유로 인하여 우리의 대외교섭사는 복잡성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日本列島의 세력이 밀려와 그 복잡성을 더해가는 일이 있었거니와, 고려조에서는 그와 같은 대립·충돌이 유난히도 심하여 대외적인 성격이 강한 역사가 되었던 것이다.

 10세기 초엽 고려의 건국이 있은 지 얼마 후 중국대륙에서는 5대 10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宋이 일어났다(960년). 여기에서 고려가 수립한 대외정책은 北進·親宋政策이었다.292)全海宗,<高麗와 宋과의 관계>(≪東洋學≫7, 1977).
羅鍾宇,<高麗時代의 對宋關係>(≪圓光史學≫3, 1984).
朴龍雲,<高麗·宋 交聘의 목적과 使節에 대한 考察(上·下)>(≪韓國學報≫81·82, 1995·1996).
그런데 당시에는 마침 송의 북방에서 契丹·女眞·蒙古 등 유목민족이 차례로 발흥하여 송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고려의 북진·친송정책과 대립되게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고려는 먼저 거란족의 遼와 3차례 이상이나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요나라의 聖宗은 압록강 하류의 여진을 치고 이어서 중류 지역에 발해의 유민이 세운 定安國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뒤 송마저 패퇴시켜 거리낄 것이 없게 되자 고려에 제1차의 침공을 개시하였다(고려 성종 12년, 993). 그러나 이번에는 국제정세를 잘 살핀 徐熙가 적장과 담판하여 저들이 원하는 송과의 단교를 조건으로 물러나게 하고 오히려 江東6州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고려는 그 뒤에도 송과 비공식적인 교류를 계속한 데다가 강동6주의 탈환도 노려 요의 성종이 康兆의 정변을 구실 삼아 현종 원년(1010)에 직접 步騎 40만을 이끌고 제2차의 침입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수도인 개경이 함락당하고 국왕은 나주로 피신하는 시련을 겪었으나 상하가 단결하여 무사히 난국을 수습하였다.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소규모의 파상적인 공격을 하던 요는 마침내 1018년에 10만 군을 보내 다시 대공세를 폈으나 姜邯贊 등이 지휘한 고려군의 반격을 받아 참패하고 물러갔다. 이 같은 오랜 전란으로 지친 두 나라는 곧 화약을 맺거니와, 고려는 끈질긴 항쟁으로 대륙 북방의 강자인 요의 침략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293)李龍範,<高麗와 契丹과의 關係>(≪東洋學≫7, 1977).

 여진족의 金과 충돌하는 것은 그 부족의 하나인 完顔部가 세력을 키워 우리 지역으로까지 뻗어오면서였다. 즉 우리를 부모의 나라로까지 여겨오던 저들은294)金庠基,<금(金)의 시조(始祖)에 대하여>(≪국사상의 제문제≫5, 1959). 烏雅束 때에 이르러 더욱 세력이 커지자 군대를 파견하여 이미 고려에 복속하고 있던 曷懶甸 일대의 여진부락을 경략하고, 계속하여 고려에 依附코자 來投해오는 여진인을 쫓아 定州의 千里長城 부근에까지 이르렀다. 때가 바로 肅宗 9년(1104)으로 고려로서는 도저히 이를 좌시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양국간에 무력충돌이 일어나는데, 고려는 번번이 패배하였다. 적은 기병인데 비해 아군은 주로 보병인 데다가 그 조직마저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尹瓘은 왕에게 아뢴 후 別武班이라는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고, 睿宗 2년(1107)에는 마침내 저들을 내쫓고295)김상기,<여진관계의 시말과 윤관(尹瓘)의 북정>(≪국사상의 제문제≫4, 1959:
≪東方史論叢≫, 서울大 出版部, 1974).
지금의 함경도와 두만강 일대에 걸쳐 9城을 축조하는 것이다.296)金九鎭,<公嶮鎭과 先春嶺碑>(≪白山學報≫21, 1976).
方東仁,<尹瓘九城再考>(≪白山學報≫21, 1976:≪韓國의 國境劃定硏究≫, 一潮閣, 1997).
이로써 우리 나라의 영토가 크게 확장되는데, 그러나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이 반격하는 한편으로 還附를 애걸하여 와서 얼마 뒤에 이 지역을 되돌려주고 말았다. 이후 더욱 세력이 강해진 금은 고려에 君臣關係를 강요하여 왔고, 이를 용인함으로써(仁宗 4년, 1126) 두 나라 사이에 더 이상의 무력충돌은 발생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武臣執權期인 高宗 18년(1231)부터 몽고족의 침략을 받아 한층 커다란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쟁은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지속되었는데,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그 나름으로 항쟁을 이어 갔지마는, 특히 육지에 남은 일반 백성들은 전쟁이 터질 때마다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山城과 海島로 入保하여 줄기차게 저항을 하였다.297)姜晋哲,<蒙古의 侵入에 대한 抗爭>(≪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3:≪韓國社會의 歷史像≫, 一志社, 1992).
金潤坤,<抗蒙戰에 叅與한 草賊에 對하여>(≪東洋文化≫19, 1979).
尹龍爀,<고려의 海島入保策과 몽고의 戰略變化>(≪歷史敎育≫32, 1982).
―――,≪高麗對蒙抗爭史硏究≫(一志社, 1991).
이 같은 항쟁에 유례없는 세계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도 어찌할 수가 없었지만,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고려의 상하가 겪는 고초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었고, 국토도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져 갔다. 이에 고려 조정은 화의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거니와, 이때부터는 저들의 내정간섭을 받아 시련은 계속되었다. 몽고의 일본 원정에 동원된 것이나, 雙城摠管府의 설치 등으로 인한 영토의 할양, 立省策動 등이 그 대표적인 예들인데,298)方東仁,<雙城摠管府考>(≪關東史學≫1, 1982:≪韓國의 國境劃定硏究≫, 一潮閣, 1997).
金惠苑,<忠烈王 入元行績의 性格>(≪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張東翼,<元의 政治的 干涉과 高麗政府의 對應>(≪歷史敎育論集≫17, 1992:≪高麗後期外交史硏究≫, 一潮閣, 1994).
하지만 이러한 국가의 위기에 처하여서는 역시 고려의 상하가 단결하여 역경을 헤쳐나갔다.

 여말인 恭愍王 때에 고려는 元末의 혼란을 틈타 일어난 漢族의 流賊인 紅巾賊의 침입을 받는 시련을 겪었다. 그리고 이를 전후하여서는 일본의 구도집단인 왜구의 창궐로 인해서도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299)李鉉淙,<倭寇와 倭寇政策>(≪朝鮮前期 對日交涉史硏究≫, 韓國硏究院, 1964).
孫弘烈,<高麗末期의 倭寇>(≪史學志≫9, 1975).
羅鍾宇,<高麗 末期의 麗·日關係-倭寇를 中心으로->(≪全北史學≫4, 1980:≪韓國中世對日交涉史硏究≫, 圓光大出版局, 1996).
金琪燮,<14세기 倭寇의 동향과 고려의 대응>(≪韓國民族文化≫9, 1997).
고려는 이때에도 무력을 동원하여 저들을 진압하고 있거니와, 이와 같이 고려의 역사는 주변의 여러 나라와 빈번하게 외교교섭을 벌이고, 또 자주 전쟁을 치르면서 발전하여 간 그런 특성을 지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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