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3. 고려
  • 2) 경제적 특성
  • (1) 민전과 공전·사전

(1) 민전과 공전·사전

 고려시대에 있어서 주업은 농업이었다. 농경이 당시의 기본적인 생산형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 기반이 되는 토지문제는 사회질서와도 관련하여 가장 주목받는 과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취지에서 먼저 토지지배관계에 대해서부터 살펴보면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 것은 民田이었다. 이 민전은 백성들이 조상대대로 전래하여 오는, 명칭 그대로 人‘民’의 ‘田’으로서 그들의 사유지를 말하는데, 대부분은 白丁으로 알려진 농민들이 소유주이었으나 양반과 서리·향리는 말할 것 없고 노비층까지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여기에서 얻어지는 수확물의 일부를 국가에 租稅로 납부하고 나머지를 수입으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民産의 근본이 되는 토지였을 뿐더러 국가 재정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國用과 祿俸의 재원도 거기에서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민전의 경영은 대체적으로 영세 농민에 의한 自家經營의 형태를 취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家族勞動力에 의지하여 자기의 소규모 토지를 경작해 생활을 꾸려갔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양반과 토호들처럼 많은 민전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의 경우는 그 경영 형태가 이와 좀 달랐으리라 예상된다. 이들의 토지는 노비노동에 의한 경작이나 傭作 등도 의당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소작을 주어 경작시키는 경우도 있었을 것인데,300)姜晋哲,<高麗時代의 農業經營形態-田柴科體制下의 公田의 경우->(≪韓國史硏究≫12, 1976:≪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安秉佑,<高麗時期 民田의 經營>(≪韓國 古代·中世의 支配體制와 農民≫, 지식산업사, 1997).
이럴 때는 규정대로 수확의 50%를 소작료로 받았다고 생각된다.

 민전은 사적 소유권이 보장되어 있는 토지였다. 이 점은 물론 수취와 관련이 깊은 것이었겠지마는 民田主가 그 토지의 주인으로서 토지대장인 量案에 명시되고, 그리하여 각자의 소유권이 국가에 의해 보호를 받았던 것이다. 민전은 이와 같이 사적소유지였으므로 그에 대한 매매나 증여·상속 등 관리처분권도 소유주의 자유 의사에 맡겨져 있었다.301)有井智德,<高麗朝における民田の所有關係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8, 1971:≪高麗李朝史の硏究≫, 國書刊行會, 1985).

 지금 민전은 각 개인의 소유지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私田의 범주에 속하는 토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에 대칭되는 국유지나 관유지도 있었다. 그런 토지들로는 公廨田·屯田·學田·籍田 등을 들 수 있는데, 이것들은 공전이었다. 이처럼 토지의 공·사전은 소유권에 의하여 구분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토지는 收租權의 귀속에 의해서도 공·사전으로 구분되었다. 위에서 民田租는 국고에 수납되어 국용이나 녹봉에 충당되었다고 하였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민전은 公田이었다. 이에 비해 개인에게 수조되는 兩班田 등은 사전이었다. 이것을 다시 내용별로 정리하면 국유지와 국고수조지는 공전인데 대해 사유지와 사인수조지는 사전이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302)李成茂,<公田·私田·民田의 槪念-高麗·朝鮮初期를 中心으로->(≪朝鮮初期 兩班硏究≫, 一潮閣, 1980:≪韓㳓劤停年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91).
姜晋哲,<私田支配의 諸類型>(≪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그런데 민전은 그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공전도 되고, 사전도 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토지였던 것이다.303)李成茂, 위의 글.
尹漢宅,<私田과 田丁>(≪高麗前期 私田 硏究≫, 高麗大 民族文化硏究院, 1995).

 종래 이들 공전·사전의 구분과 관련하여 논의가 되었던 또 하나는 差率收租의 문제였다. 널리 알려진대로 고려 때의 토지에 대한 收取率로는 1/10조와 1/4조, 그리고 1/2조의 3종류가 기록에 보이고 있다. 처음의 연구자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1/10조는 태조 당시의 실정을 도외시한 신빙성이 적은 사료라 하여 버리고 대략 공전에서는 1/4조, 그리고 사전에서는 1/2조를 수취하는 제도였다고 설명하였다. 아울러 이때의 1/4(25%) 공전조는 地稅의 개념에 해당하는 것인데 반해 1/2(50%) 사전조는 地代의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여 공전과 사전 사이에 倍額이나 되는 차율수조가 생겨나게 된 배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도 있었다.304)姜晋哲,<高麗前期의 公田·私田과 그의 差率收租에 대하여-高麗 稅役制度의 一側面->(≪歷史學報≫29, 1965).
旗田 巍,<高麗の公田>(≪史學雜誌≫77-4, 1968:≪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한데 그 뒤에 1/10조는 고려 때 실제로 민전에 적용되던 수취율이라는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리고 이런 입장을 취한 논자들은 성종 11년에 정해진 1/4공전조도 국유지를 소작주었을 경우의 지대로 파악하고 있다.305)李成茂, 앞의 글.
金容燮,<高麗前期의 田品制>(≪韓㳓劤停年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1).
金泰永,<科田法上의 踏驗損實과 收租>(≪經濟史學≫5, 1981:≪朝鮮前期 土地制度史硏究≫, 知識産業社, 1983).
이어서 1/4공전조가 적용되던 토지는 국·공유지 가운데 일부에 한정되었다는 의견306)安秉佑,<高麗의 屯田에 관한 一考察>(≪韓國史論≫10, 1984).
―――,<高麗前期 地方官衙의 設置와 運營>(≪李載龒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한울, 1990).
박종진,<조세제도의 구조>(≪고려시기 재정운영과 조세제도≫, 서울대출판부, 2000).
등도 나와 있지마는, 현재는 이들 새로운 견해에 많이 기울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사유지(사전)를 타인에게 대여하여 소작관계가 발생하였을 때 그 지대로 二分取一하였다는 점에 있어서는 종래의 주장과 다른 것이 없다.

 다음으로 이 자리에서 하나 더 살펴보아야 할 문제는 토지국유의 원칙에 관한 것이다. 종래 우리 나라의 토지제도에 대해서는 동양의 여러 나라가 대개 그러했던 것처럼 전국의 토지가 ‘公田制’ 위에 성립되어 모든 토지는 국가의 公有에 귀속하였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오랜동안 유력시되어 왔었다. 이것은 “넓은 하늘 아래에 王土 아닌 것이 없다”(≪詩經≫, 小雅 北山)는 전통적인 王土思想의 관념에서 영향받은 바도 없지 않았으나, 보다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한국의 토지제도에 관해 처음으로 체계적인 저술을 낸 和田一郞의 公田制=土地國有制 이론과 唯物史觀이 말하는 ‘아시아 국가에 있어서의 私的 土地所有의 결여’라는 命題였는데,307)姜晋哲,<「土地國有制說」의 問題>(≪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그러나 지금은 대체적으로 잘못된 이해였다고 보고들 있다.

 원래부터가 그들 주장에는 불순한 동기가 내재되어 있기도 하고, 또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여러 방면에서 비판이 가해져 왔었지만,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사전은 田租의 귀속문제와 함께 토지 그 자체가 사유지적 성격이 농후하다는 의미도 지닌다는 견해가 제시되었고,308)姜晋哲, 앞의 글(1965). 자손에게 상속이 허용된 兩班永業田으로서의 功蔭田柴와 직역의 세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향리·군인의 영업전과 같은 사유지적 성격의 토지가 존재하였다는 실증과309)李佑成,<高麗의 永業田>(≪歷史學報≫28, 1965:≪韓國中世社會硏究≫, 一潮閣, 1991). 더불어 공전 또한 국가의 직영지뿐 아니라 단순한 국고수조지도 포함하는 등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310)旗田巍, 앞의 글(1951). 종래의 이해방식은 수정을 면치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토지국유제론에 대한 비판은 무엇보다도 민전의 실체가 드러남에 따라 더욱 본격화하게 되었다. 그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백성들의 사적 소유지로서 매매 처분과 증여·상속이 자유로운 토지였던 것이다.

 이에 즈음하여 왕토사상에 대해서도 새로운 이해가 있게 되었다. 사유지의 경우 비록 왕토로 인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자유로이 처분할 수 없었던 기록 등으로 미루어 동양의 전통적인 왕토사상은 관념적인 산물이었을 뿐 현실적인 토지소유관계를 말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311)李佑成,<新羅時代의 王土思想과 公田-大崇福寺碑 및 鳳巖寺 智證碑의 一考->(≪趙明基華甲紀念 佛敎史學論叢≫, 中央圖書出版社, 1965:≪韓國中世社會硏究≫, 一潮閣, 1991).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고려 때의 각종 토지는 소유권이나 수조권의 귀속에 따라 공전과 사전으로 분류되었으며, 그것에 의해 수조율에도 차등을 두는 제도였다. 한데 그들 토지 가운데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여 가장 커다란 의미를 지닌 것은 백성들의 사유지로서 1/10조의 수취율을 적용받았다고 생각되는 민전이었다. 이것은 민산의 근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재정을 지탱해주는 토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같은 기반 위의 토지지배관계를 한때는 토지국유제로 파악하려는 논의도 있었으나 그것은 옳지 못한 이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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