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3. 고려
  • 2) 경제적 특성
  • (2) 전시과제도와 농장

(2) 전시과제도와 농장

 고려시대의 관리들은 국가에 복무하는 대가로 토지와 현물을 이중으로 받았다. 그 전자의 제도가 田柴科였으며, 후자가 祿俸이었다.

 이 가운데에서 전시과는 국가의 관직에 복무하는 문무양반이나 직역을 부담하는 서리·군인 등에게 그들의 지위에 따라 응분의 田地와 柴地를 나누어준 제도를 말하는데, 景宗 원년(976)에 처음 제정된 이래〔始定田柴科〕큰 것만 하여도 穆宗 원년(998)의 개정을 거쳐〔改定田柴科〕문종 30년(1076)에 다시 고쳐지는〔更定田柴科〕등 몇 차례의 변천이 있었다. 그 마지막의 제도를 볼 것 같으면 전체 대상자를 18科等으로 분류하고, 최고의 과등인 제1과는 전지 100결과 시지 50결을 지급하는데, 그 해당자는 中書令·尙書令·門下侍中이었으며, 이하 차례로 내려가 군인·서리 등은 제15과 이하에 소속하였고, 전지 17결만을 받는 최하의 제18과에는 閑人·雜類가 배치되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전시과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제도를 의미했지마는, 그러나 이것 이외에도 무산계 소지자에게 지급하는 武散階田柴科와 관아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규정인 公廨田柴科 등 別定의 몇몇 종류가 더 있었다.

 이들 전시과에서 분급한 토지에는 방금 설명했듯이 전지와 함께 시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전지만 지급한 조선의 科田法과 차이가 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과전법에서 지급한 토지는 畿內에 한정되었던 데 비해 전시과의 그것은≪高麗圖經≫에 명시되어 있듯이 外州, 즉 지방에 산재해 있어서 역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전시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兩班科田 등이 어떤 성격의 토지로 지급되었으며, 또 그 지급의 내용이 어떠한 것이었느냐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려 있다. 이 문제에 있어 대략 이른 시기의 연구자들은 羅末麗初에 각 지방의 호족들이 지배하던 토지를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회수하였다가 전시과가 창설될 때에 그것을 새로이 분급해준 것이라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 지급도 토지 자체가 아니라 收租權을 준 것이며, 그리하여 당해 양반과전의 경작·생산을 감독하고 租를 수취하여 서울로 수송하는 일 등이 지방행정관인 수령에 맡겨져 있었다고 설명하였다.312)姜晋哲,<私田支配의 諸類型-兩班田>(≪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다만 이 논의에서도 군인전은 그들의 토지, 즉 민전 위에 설정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의견에 반대하는 연구자들은 전시과의 과전도 조선에서처럼 민전 위에 설정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때 그 토지는 수급자 자신이 마련해야 했으며, 그리하여 지급의 내용도 대체적으로는 당해 토지에 대한 免租權을 주는 것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이들 토지는 자연이 자가경영의 형식을 취하게 마련이었다는 것이다.313)浜中昇,<高麗田柴科の一考察>(≪東洋學報≫63-1·2, 1981:≪朝鮮古代の經濟と社會≫, 法政大學出版局, 1986).
金琪燮,<高麗前期 農民의 土地所有와 田柴科의 性格>(≪韓國史論≫17, 1987).
朴國相,<高麗時代의 土地分給과 田品>(≪韓國史論≫18, 1988).
이 문제는 고려사회의 역사적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의 하나인데, 앞으로 좀더 많이 검토해야 할 과제라는 말로 마무리지어 둔다.

 다음 녹봉은 대우 내지는 보수로 현물인 미곡 등을 급여하는 것이라 하거니와, 문종 30년(1076)에 정비된 내용을 볼 것 같으면 ①妃主祿 ②宗室祿 ③文武班祿 ④權務官祿 ⑤東宮官祿 ⑥西京官祿 ⑦外官祿 ⑧雜別賜 ⑨諸衙門工匠別賜의 9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문무백관을 비롯한 后妃·宗室과 胥吏·工匠 등 제계층에 녹봉이 지급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중 祿制의 중심을 이루었던 文武班祿을 보면 제1과 400石을 받는 중서령·상서영·문하시중으로부터 제47과 7석을 받는 國學學正·國學學錄·都染丞 등에 이르기까지 47과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와 같은 복잡한 과등은 仁宗(1122∼1146) 때의 更定時에 28과등으로 조정이 되지만 전시과의 18과등과 비교할 때 여전히 세분된 것이다. 그것은 아마 품계상의 차등뿐 아니라 동일 품계의 관직 사이에도 중요도에 차이가 있었던 데서 말미암은 결과가 아닌가 짐작된다.314)崔貞煥,<高麗 祿俸制의 運營實態와 그 性格>(≪慶北史學≫2, 1980:≪高麗·朝鮮時代 祿俸制硏究≫, 慶北大出版部, 1991).
李鎭漢,<高麗時代 叅上·叅外職과 祿俸>(≪韓國史硏究≫99·100, 1997:≪고려전기 官職과 祿俸의 관계 연구≫, 一志社, 1999).

 이 같은 체제는 상당한 기간 동안 비교적 잘 유지되었으나 12세기 초엽에이르러 동요의 양상을 보이더니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1170년)부터는 아예 파탄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간에 야기된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전시과체제의 모순이 표면화된 데다가 사회생산력의 발전으로 인해 종래의 질서는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형성된 사적인 대토지지배의 특수한 형태를 우리들은 農莊(農場·農庄)이라 부르고 있다. 당시의 권세가들과 심지어는 사원까지도 개간이나 買得·賜牌 등의 합법적 방법뿐 아니라 奪占·高利貸·寄進·投托 등 불법적인 방법까지 동원해 민전을 비롯한 각종 토지를 겸병하여 갔으며, 이렇게 하여 집적된 대규모의 땅을 농장으로 경영하였던 것이다. 이들 농장은 소유권에 입각한 것과 수조권에 의거한 것 등 두 종류가 있었는데, 현재 소유지형 농장이 일반적이었다는 주장과315)姜晋哲,<高麗의 農莊에 대한 一硏究-民田의 奪占에 의하여 형성된 權力型農莊의 實體追求->(≪史叢≫24, 1980:≪韓國中世土地所有硏究≫, 一潮閣, 1989). 그 보다는 수조지 집적형 농장이 우세했다는 견해로316)李景植,<高麗末期의 私田問題>(≪東方學志≫40, 1983:≪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 一潮閣, 1986).
위은숙,<사적 대토지소유와 경영형태>(≪高麗後期 農業經濟硏究≫, 혜안, 1998).
나뉘어 있다. 그러나 어떻든 그들 농장은 다 같이 노비를 사역시켜 경작하는 直營制經營과 處干으로 불리는 佃戶에게 경작케 하는 佃戶制經營을 취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 농장주는 그들대로 국가에 조세를 납부치 않았고 거기에 招集된 전호들 역시 공민으로서의 부담을 지지 않고 있었다는 점도 같았다.

 이에 나라의 재정은 파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국가는 관리들에게 토지를 분급하지 못하였을 뿐더러 녹봉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의 在地地主들과는 달리 주로 開京에 거주하는 不在地主로서 권세가이기도 했던 농장주들은 그에 크게 구애될 바가 없었으나 특히 신진의 관리들에게 있어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의 하나로元宗 12년(1271)에 부족한 녹봉을 보충하여 준다는 명목하에 祿科田이라 하여 경기 일원의 墾地를 나누어주지만,317)深谷敏鐵,<高麗祿科田考>(≪朝鮮學報≫48, 1968).
閔賢九,<高麗의 祿科田>(≪歷史學報≫53·54, 1972).
이 제도조차 어지러워졌을 뿐더러 또 그것이 국가 재정문제의 근본적인 대책도 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제기된 바 고려 말기 가장 큰 쟁점의 하나였던 ‘私田’革罷 문제는 바로 이 농장의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왕조로서는 끝내 이 과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였다.

 전시과제도와 녹봉은 고려 나름의 실정이 반영된 보수체계였다. 이 체제가 무너지면서 국가와 백성들에게 많은 폐단을 끼친 농장이 성립하였고, 그에 따라 야기되는 여러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고려왕조는 그와 운명을 같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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