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3. 고려
  • 3) 사회적 특성
  • (1) 신분구조와 그 성격

(1) 신분구조와 그 성격

 전근대 국가가 대개 그러하였듯이 고려도 신분제 사회였다. 신분이란 잘 알려져 있듯이 사회구성원을 집단으로 구분하는 단위의 하나로, 그 지위는 혈통에 따라서 세습되는 사회적 권리·특권과 의무·제약에 의하여 규정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신분층은 보다 많은 귄리와 특권을 누렸던 반면에 어떤 신분층은 보다 많은 의무를 지고 제약을 받도록 되어 있었거니와, 그것은 곧 각 신분계층이 가지는 사회적 기능과 연결되게 마련이었고, 고려에서는 그것이 役으로 표현되었다.329)洪承基,<(고려의)신분제도>(≪한국사≫15, 국사편찬위원회, 1995:≪高麗社會史硏究≫, 一潮閣, 2001).

 종래 이 같은 정연한 설명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략 유사한 기준에 의하여 신분계층을 크게 지배신분층과 피지배신분층으로 나누고, 거기에 다시 각각 2개씩의 신분층이 있어, 전자에는 양반·귀족과 중류층이, 그리고 후자에 양민과 천민이 소속했던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많았다. 이를 보기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배신분층 ① 양반과 귀족…文·武의 品官과 귀족 良身分層
② 중류층…서리·향리·남반·하급장교
피지배신분층 ③ 일반 양민…白丁農民·수공업자·상인
 하층 양민…鄕·所·部曲·莊·處民
④ 천민…공노비·사노비 賤身分層

 한데 근자에 고려의 신분구조를 이와는 좀 달리 법제상 良身分과 賤身分의 두 계층으로만 나뉘어져 있었다고 보려는 양천제 이론이 제기되었다.330)許興植,<高麗時代의 身分構造>(≪高麗社會史硏究≫, 亞細亞文化社, 1981).
洪承基,<高麗時代의 良人:士庶制·良賤制의 시행과 관련하여>(≪學術硏究論文集≫, 養英會, 1994:≪高麗社會史硏究≫, 一潮閣, 2001).
金蘭玉,<高麗時代 良人·賤人의 용례와 良賤制>(≪韓國史學報≫제2호, 1997:≪高麗時代 賤事·賤役良人 硏究≫, 신서원, 2000).
그에 따른 신분층의 분류는 위의 도표에 곁들인 바와 같은데, 보다시피 여기에서 종래의 이해와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은 양반·귀족과 양민과를 동일한 양신분층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도 있다. 즉, 이 같은 입장에서는 우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良·賤 곧 賤人과 非賤人(良民)으로 나누는 것은 전근대사회에서는 어느 시기, 어느 나라에나 적용될 수 있는 구분법이기 때문에 사회계층론으로서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라 비판하고, 또 양반·귀족과 양민은 士·庶로도 표현되듯이 상호 대칭되는 신분층으로 이들간의 상하·귀천의 질서는 양천의 그것에 못지 않게 중요하였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331)宋俊浩,<朝鮮兩班考-朝鮮朝社會의 階級構造에 관한 한 試論->(≪韓國史學≫4, 1983).
金蘭玉,<高麗時代 士庶의 用例와 신분적 의미>(≪史叢≫46, 1997:≪高麗時代 賤事·賤役良人 硏究≫, 신서원, 2000).

 이 부분을 役體制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양반·귀족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했던 仕宦權의 여부가 한 지표가 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그 가장 보편적인 방도의 하나였던 赴擧權이 양민에게도 주어졌는가가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현재 이견이 없지 않으나 과거에서 가장 중시됐던 製述科에 양민은 응시자격이 없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332)許興植,<高麗科擧制度의 檢討>(≪韓國史硏究≫10, 1974:≪高麗科擧制度史硏究≫, 一潮閣, 1981).
李基白,<科擧制와 支配勢力>(≪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74:≪高麗貴族社會의 形成≫, 一潮閣, 1990).
朴龍雲,<高麗時代의 科擧-製述科의 應試資格>(≪高麗時代 蔭敍制와 科擧制 硏究≫, 一志社, 1990).
그렇다고 한다면 양반·귀족과 양민을 동일한 범주의 신분층으로 파악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양민들도 明經科나 雜科에의 응시는 가능하였고, 또 군인직 등을 통해서도 자신의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333)李基白,<高麗社會에서의 身分의 世襲과 變動>(≪韓國의 傳統과 變遷≫, 高麗大亞細亞問題硏究所, 1973:≪高麗貴族社會의 形成≫, 一潮閣, 1990). 그런가 하면 胥吏나 鄕吏 등에게는 과거의 문이 활짝 열려 있기도 했으므로 이 문제 역시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양반과 귀족도 이와 좀 차원이 다른 것이긴 하지만 많이 논의되어 온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 논의의 초점이 된 것은 귀족의 범위에 관해서였는데, 종래 그들은 문·무양반, 곧 品官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였고,334)白南雲,<貴族群>(≪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 改造社, 1937). 근자에는 거기에다 南班을 포함시키는 견해까지 제시되었다.335)洪承基, 앞의 글(1995). 아울러 蔭敍와 같은 귀족적 특권을 누릴 수 있는 부류였는가의 여부에 기준을 두어 귀족을 관품 5품 이상관에 한정시키자는 주장이 나왔고,336)朴龍雲,<高麗 家産官僚制說과 貴族制說에 대한 檢討>(≪史叢≫21·22 합집, 1977:≪高麗時代 臺諫制度 硏究≫, 一志社, 1981).
―――,<高麗는 貴族社會임을 다시 논함>(上)·(下)(≪韓國學報≫93·94, 1998·1999).
이에 대해 귀족신분을 다루면서 官品에서 기준을 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비판과 함께, 설령 관품에 두더라도 “5품이라는 기준선은 귀족의 평가기준으로는 너무 낮다”는 의견337)金龍善,<高麗 貴族社會 成立論>(≪韓國社會發展史論≫, 一潮閣, 1992).
―――,<高麗門閥의 構成要件과 家系>(≪韓國史硏究≫93, 1996).
역시 제시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 귀족적 존재는 인정되나 고려를 귀족사회로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개진되었고,338)劉承源,<고려를 귀족사회로 보아야 할 것인가>(≪역사비평≫36, 1997). 그리하여 귀족사회라기보다는 차라리 양반사회로 규정하는 게 더 좋겠다는 주장마저도 제기되어 있는 것이다.339)金塘澤,<高麗 兩班社會와 한국사의 時代區分>(≪歷史學報≫166, 2000).

 다음 양민에 있어서는 향·소·부곡민이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처음에 이들은 집단천민으로 파악하였었는데, 점차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부곡민 등이 일반 군현민에 비해 사회적으로 차별대우를 받는 존재였으나 신분만은 양민이었다는 쪽으로 대략 의견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서 지방의 통치조직을 살필 때 간략하게나마 언급한 바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는 재론치 않도록 하겠다.

 공·사노비 등 천민에 대해서도 그들의 성격과 사회경제적 지위·역할 등에 걸쳐 커다란 연구의 진척이 있었다.340)洪承基,<高麗時代 私奴婢의 法制上 地位>(≪韓國學報≫12, 1978:≪高麗貴族社會와 奴婢≫, 一潮閣, 1983).
―――,<高麗時代 公奴婢의 性格>(≪歷史學報≫80, 1978:위의 책).
―――,<高麗時代 奴婢와 土地耕作>(≪韓國學報≫14, 1979:위의 책).
고려 때의 노비는 ‘一賤則賤’의 원칙에 따라 良賤交婚의 경우라 하더라도 그 소생은 모두 천인이 되었고, ‘賤者隨母法’에 의거하여 어머니 쪽 소유주에 귀속하였는데, 이들은 다른 왕조에서와 마찬가지로 국가나 개인에게 얽매어 지내면서 재물의 취급을 받는 부자유민이었다.

 고려사회에서 새로이 양반층이 형성되고 향리·서리 등 중류층의 사회적 지위가 비교적 높았으며, 일반 군현민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는 향·소·부곡민 등 하층 양민의 광범한 존재 등이 신분구조상의 한 특징이었다. 그런 가운데에 우리들이 보통 고려를 귀족사회라고 하는 데서 드러나듯이 귀족층이 정치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게 또 다른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각 신분층, 특히 노비층은 자기가 속한 신분을 원칙적으로 세습하게 되어 있었지마는, 그 다른 한편으로 일반 양민에게는 중류층 혹은 그 이상으로, 다시 중류층에게는 양반·귀족으로 신분 이동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었다. 고려에서는 이 중 신분의 이동과 상승의 억제·방지에 중점을 두면서도 상반되는 두 원칙이 균형과 조화를 잡아가는 바탕 위에서 신분제를 운영하였던 것이다.341)洪承基, 앞의 글(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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