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3. 고려
  • 4) 사상적 특성
  • (1) 불교와 유교

(1) 불교와 유교

 고려 때는 불교가 국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에 또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기능하였고, 도교와 풍수지리·도참사상 등도 유행하였다. 고려시대의 사상계는 이처럼 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리하여 각 사상 사이에서, 혹은 하나의 사상 내에서도 종파간에 대립과 융합, 또는 영향을 미치고 받으면서 공존하였던 것이다.

 이들 중에서 사회에 끼친 영향이 한층 큰 것은 불교였으며 다음이 유교였다. 그 가운데 불교는 國初에 所依經典을 주로 하는 교종이 여전히 교세를 이어가는 한편으로 개인주의적인 坐禪을 표방하고 나선 선종이 호족과 연결을 가지면서 번성하여 양립하는 형세를 이루었다.358)崔柄憲,<羅末麗初 禪宗의 社會的 性格>(≪史學硏究≫25, 1975). 그러던 것이 광종조에 오면 왕권의 상대적인 안정과 더불어 교종이 선종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 중심이 된 종파는 華嚴宗이었으며 이를 지도한 승려는 均如였다.359)金杜珍,<均如의 生涯와 著述>(≪歷史學報≫75·76 합집, 1977:≪均如華嚴思想硏究≫, 韓國硏究院, 1981).
―――,<均如의 “性相融會” 思想>(≪歷史學報≫90, 1981:위의 책).
崔柄憲,<高麗時代 華嚴宗의 變遷-均如派와 義天派의 對立을 중심으로->(≪韓國史硏究≫30, 1980).
이에 대하여 선종은 중국에서 새로이 도입된 法眼宗을 중심으로 정리가 되거니와,360)金杜珍,<高麗 光宗代 法眼宗의 登場과 그 性格>(≪韓國史學≫4, 1983). 僧科가 설치되는 것도 바로 이때였다.361)許興植,<高麗時代의 僧科制度와 그 機能>(≪歷史敎育≫19, 1976:≪高麗科擧制度史硏究≫, 一潮閣, 1981).

 그 뒤 문벌귀족사회가 형성되면서는 교종인 法相宗과 화엄종이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법상종은 국왕인 현종의 지원을 받은 위에 고려 최대의 문벌외척세력인 慶源李氏와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번성하였고,362)崔柄憲,<高麗中期 玄化寺의 創建과 法相宗의 隆盛>(≪韓㳓劤停年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1). 화엄종은 왕자 출신인 義天이 나오면서 절정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천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새로이 天台宗을 開立하였다. 天台學은 이미 고려초기부터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지마는,363)金哲埈,<高麗初의 天台學 硏究-諦觀과 義通->(≪東西文化≫2, 1968:≪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의천의 노력에 의해 이제는 一宗으로 개립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敎觀並修를 표방하고 새로운 불교혁신운동을 펴면서 개창된 이 천태종은 이후 많은 승려들의 호응을 얻어 번창하게 되는데,364)崔柄憲,<天台宗의 成立>(≪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75).
―――, 앞의 글(1980).
洪庭植,<高麗天台宗 開立과 義天>(≪韓國佛敎思想史≫, 圓光大出版局, 1975).
許興植,<高麗前期 佛敎界와 天台宗의 形成過程>(≪韓國學報≫11, 1978:≪高麗佛敎史硏究≫, 一潮閣, 1986).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의 입장에서 선을 흡수하는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선종은 한층 더 위축을 면치 못하였다.

 한편 유교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이 역시 고려조로 접어들어 통일신라 때와는 크게 달라진 사회체제와 분위기 속에서 새 전기를 맞았다. 그리하여 벌써 태조 주변에서 여러 유학자들이 활동을 하며, 광종조의 과거제 실시는 발전의 한 큰 계기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성종조(982∼997)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유교의례가 마련되고365)李範稷,<≪高麗史≫禮志의 分析>(≪韓㳓劤停年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1:≪韓國中世禮思想硏究≫, 一潮閣, 1991).
朴贊洙,<文廟享祀制의 成立과 變遷>(≪鄭在覺古稀記念 東洋學論叢≫, 고려원, 1984).
天人合一思想이 제자리를 잡는366)李熙德,<高麗時代의 天文觀과 儒敎主義的 政治理念>(≪韓國史硏究≫17, 1977:≪高麗儒敎政治思想의 硏究≫, 一潮閣, 1984).
―――,<高麗時代 五行說에 대한 硏究-≪高麗史≫五行志를 中心으로->(≪歷史學報≫79, 1978:≪高麗時代의 天文思想과 五行說 硏究≫, 一潮閣, 2000).
등 유교는 고려의 정치이념으로서 확고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후 유학은 崔冲의 활동과 더불어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발전한다. 그는 致仕 후 文憲公徒라고 불린 私學을 연 것으로 유명하거니와, 이 九齋學堂에 붙인 樂聖·大中 등의 명칭이나 六經·三史를 중심으로 하는 敎科目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유학 수준은 이미 漢唐의 訓詁學에서 탈피하여 철학적 내용이 상당히 가미된 宋代 유학에 접근하여 있었다는 평가가367)尹絲淳,<朱子學以前의 性理學導入問題-崔冲의 9齋와도 관련하여->(≪崔冲硏究論叢≫, 慶熙大 傳統文化硏究所, 1984). 나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발전을 거듭하던 유학은 예종·인종대에 이르러 국학의 정비와 경학에 대한 강론회의 개최,368)權延雄,<高麗時代의 經筵>(≪慶北史學≫6, 1983). 유학관계 서적의 편찬 등이 활발해지면서 한층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오래지 않아 武臣亂이 폭발하여(1170)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유학은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무신집권기에는 이처럼 유학이 위축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에 불교계의 교종도 탄압을 받은 반면 선종은 무인을 비롯한 상하의 호응을 얻어 커다란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曹溪宗의 중흥이 바로 그것으로서, 거기에는 闍崛山門 출신의 선승인 普照國師 知訥(1158∼1211)의 활동에 힘입은 바가 많았다. 그는 定慧雙修와 頓悟漸修를 宗旨로 삼고369)張元吉,<曹溪宗의 成立과 發展에 대한 考察>(≪佛敎學報≫1, 1963).
李鍾益,<普照國師의 禪敎觀>(≪佛敎學報≫9, 1972).
宋天恩,<知訥의 禪思想>(≪韓國佛敎思想史≫, 圓光大出版局, 1975).
吉熙星,<知訥 禪 사상의 구조>(≪知訥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修禪社를 중심으로 하는 信仰結社運動을 전개하여370)李智冠,<知訥의 定慧結社와 그 繼承>(≪韓國禪思想硏究≫, 東國大出版部, 1984).
秦星圭,<高麗後期 修禪社의 結社運動>(≪韓國學報≫36, 1984).
崔柄憲,<修禪結社의 思想史的 意義>(≪普照思想≫1, 1987).
蔡尙植,<고려후기 修禪結社 성립의 사회적 기반>(≪高麗後期佛敎史硏究≫, 一潮閣, 1991).
조계종을 부동의 위치에 올려놓는 것이다. 이어서 제2세 社主인 慧諶 때에 이르러서는 崔瑀政權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더욱 번창하였다.371)金塘澤,<高麗 崔氏武人政權과 修禪社>(≪歷史學硏究≫10, 1981:≪高麗武人政權硏究≫, 새문社, 1987).
秦星圭,<眞覺國師 慧諶의 修禪社 活動>(≪中央史論≫5, 1987).

 한데 결사운동은 天台宗에서도 전개하여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圓妙國師了世(1163∼1245)가 중심이 된 白蓮社結社가 그것인데, 天台止觀과 法華三昧懺·淨土往生을 표방한 그의 신앙운동은 특히 기층사회의 백성들에게서 많은 호응을 얻었다.372)高翊晉,<圓妙了世의 白蓮結社와 그 思想的 動機>(≪佛敎學報≫15, 1978).
蔡尙植,<高麗後期 天台宗의 白蓮結社>(≪韓國史論≫5, 1979).

 신앙결사로 나타난 이 같은 불교계의 혁신운동은, 그러나 元의 간섭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수선사의 경우 가지산문 출신의 一然(1206∼1289)이 나와 한동안 曹溪禪宗을 주도하였고,373)蔡尙植,<普覺國尊 一然에 대한 硏究-迦智山門의 登場과 관련하여->(≪韓國史硏究≫26, 1979).
―――,<高麗後期 佛敎史의 전개양상과 그 경향>(≪歷史敎育≫35, 1984).
공민왕 때에는 太古和尙 普愚(1301∼1382)와 懶翁和尙 慧勤(1320∼1376) 등이 배출되어 많은 활동을 폈으나374)金映遂,<曹溪禪宗에 대하여-五敎兩宗의 一派, 朝鮮佛敎의 根源->(≪震檀學報≫9, 1938).
韓基斗,<高麗後期의 禪思想>(≪韓國佛敎思想史≫, 圓光大出版局, 1975).
許興植,<中世 曹溪宗의 起源과 法統>(≪韓國中世佛敎史硏究≫, 一潮閣, 1994).
순수한 신앙결사운동 때와는 달리 보수적 성격을 띠고 있어 사회 전반적인 추세에 휩싸여 타락상을 드러내고 있던 당시 불교계의 모순을 극복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런가 하면 백련사계가 안고 있는 문제는 한층 심하여 附元勢力化하는 성향마저 보이면서 많은 폐단을 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375)蔡尙植, 앞의 글(1979a).
秦星圭,<高麗後期의 願刹에 대하여>(≪歷史敎育≫36, 1984).
許興植,<僧政의 紊亂과 宗派間의 葛藤>(≪高麗佛敎史硏究≫, 一潮閣, 1986).
이에 따라 불교가 지니는 사회적 기능은 자연이 축소되게 마련이었고 마침내는 그의 존립조차 위협을 받게 되었다.376)韓㳓劤,<麗末鮮初의 佛敎政策>(≪서울大 論文集≫6, 1957).
許興植, 위의 글.

 당시의 이 같은 불교에 대하여 도전한 세력은 性理學이었다. 朱子性理學은 南宋의 朱熹가 체계화하여 집대성한 신유학으로, 理·氣를 바탕으로 한 우주론·인성론을 주로 하는 사상체계였는데, 이것이 원을 통해 安珦·白頤正 등에 의하여 忠烈∼忠肅王代에 고려에도 전래, 수용되었다.377)尹瑢均,<朱子學の傳來とその影響に就いて>(≪尹文學士遺稿≫, 朝鮮印刷株式會社, 1933).
文喆永,<麗末 新興士大夫들의 新儒學 수용과 그 특징>(≪韓國文化≫3, 1982).
鄭玉子,<麗末 朱子性理學의 導入에 대한 試考-李齊賢을 中心으로->(≪震檀學報≫51, 1981).
都賢喆,<高麗後期 朱子學 受容과 朱子書 普及>(≪東方學志≫77·78·79, 1993:≪高麗末 士大夫의 政治思想硏究≫, 一潮閣, 1999).
한데 원의 성리학은 주자학 본래의 성격인 형이상학적·사변적 경향과는 좀 달리 실천윤리를 강조하는 학풍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거니와, 따라서 고려에 들어온 성리학 역시 의리론·명분론이 그 중심이 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를 받아들인 사대부들은 불교 및 그와 연결되어 있던 권문·세족들을 배척하면서 儒佛交替를 이루어가게 되는 것이다.378)邊東明,≪高麗後期 性理學受容硏究≫(一潮閣, 1995).
李源明,≪高麗時代 性理學受容硏究≫(國學資料院, 1997).
申千湜,≪高麗後期 性理學의 受容과 敎育思想≫(明知大出版部, 1998).
高惠玲,≪高麗後期 士大夫와 性理學 受容≫(一潮閣, 2001).
이 성리학이 그 본래의 성격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조선에서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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