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4. 조선
  • 1) 조선왕조사의 특징과 시기구분

1) 조선왕조사의 특징과 시기구분

 여기에서는 먼저 조선왕조사의 특징을 개관한 다음, 조선시대사를 초기·중기·후기의 3시기로 나누고 각 시기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순으로 총괄해 보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한국사≫제22권 ‘조선왕조의 성립’에서 제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까지 각 권의 ‘개요’를 다시 축약, 정리하되 주관은 가급적 배제시키고 객관적 자세를 견지하고자 노력하였다. 한정된 지면에 조선왕조 500년사 총설을 담아야 하므로 각 권의 ‘개요’를 그대로 싣지 못하고 나름대로 재단해서 정리하다보니 개요의 상당부분이 삭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왕조의 기본 성격을 ‘신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집권적 양반관료국가’로 규정할 때 ‘유교’나 ‘양반’ 및 ‘집권적 관료제’란 용어는 앞 왕조인 고려시대의 그것과는 구분된다. 麗末부터 신왕조의 창건주체가 추진해 온 崇儒·抑佛의 정책은 국시로 확정되었고 또 성리학이 수용된 뒤≪朱子家禮≫의 보급과≪小學≫교육의 장려로 인하여 유교이념과 유교의례는 상류사회로부터 점차 민중생활 속에까지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정치·경제·사회·사상에 功過 양면으로 심대한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그 정치체제는 명분상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유교적인 양반 관료에 의해서 통치되는 지배체제를 갖추었다. 유교정치가 왕권을 정점으로 삼고 있지만 실제는 유교적인 지배기구와 그 제도를 통해서만 권력이 행사되기 마련이었고 또 실제로 정권도 왕권을 기반으로 하는 양반 중심의 관료기구를 통해서만 발동되는 체제였다. 한편, 협소한 국토에서 그나마 고려 이래 중앙정부와 竝列해 있는 지방정권의 존재를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양반사대부는 ‘郡縣制’와 같은 중앙집권제를 발달된, 또는 최선의 지방통치 방식으로 간주한 데서 중앙집권적 지방통치체제가 줄곧 강화되어 갔다.

 조선왕조는 ‘사대부정권’이라 할만큼 독서유생인 士와 전·현직관료인 大夫가 재조와 재야에서 정치·사회적 지배세력으로서 역대의 정권을 담당해 나갔다. 이러한 사대부는 士族 또는 兩班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지만 그 형성시기는 고려 후기로 소급된다. 그들은 대개 지방의 군현 향리가문에서 출자하여 경제적으로는 지방의 중소지주적 기반을 가진 데다가 고려 후기 정치적 혼란과 北虜·南倭의 외침이 거듭되는 가운데 과거·군공·添設職 등을 통해 중앙관인 또는 그에 준하는 자격을 획득한 자들로서 ‘能文能吏’의 조건을 갖춘 새로운 관인상을 지닌 동시에 때마침 元나라로부터 전래된 신유학(朱子學)을 적극 수용하면서 고려말에 가서는 마침내 숭유배불과 반원친명책 및 왕조교체라는 방향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들은 14세기 말 왕조교체를 계기로 집권사대부와 재야사대부로 나누어졌는가 하면, 15세기 후반 세조의 왕위찬탈을 겪으면서 다시 훈구파와 士林派로 분기되어 갔다. 특히 후자는 왕조교체기의 재야사대부와 맥락을 같이 하면서 훈구파의 집권 아래 주자학적 향촌지배질서와 새로운 先進농법을 향촌사회에 적용하여 원만한 ‘主奴’관계와 地主佃戶制를 근간으로 지역개발을 활발히 추진하는 과정에서 향촌사회의 획기적인 성장과 함께 자신들의 정치·사회적 진출을 꾀하였다. 그 결과 세종조의 地理志에 각읍마다 戶口·田結數가 기재되고≪經國大典≫에 面里制가 비로소 法制化하며, 16세기 후반부터 새로 편찬되기 시작한≪邑誌≫에는 종전의 地志에서 볼 수 없던 ‘坊里’와 ‘人物’ 조항이 가장 상세하게 기술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바로 15세기 이래 재지사족들에 의해 꾸준히 개발되고 있던 향촌사회의 성장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15세기 후반 이래 재지사족의 활발한 진출과 鄕約을 비롯한 鄕村諸規約과 향안·동안 등의 제정, 실시는 바로 조선 초기 이래 재지세력들에 의한 지역개발과, 그 결과로 얻어진 사회·경제적 기반에 힘입은 바 컸던 것이다.

 조선 초기 재지사족에서 성장한 士林이 16세기 후반 정계장악과 함께 다시 동서·남북·노소의 당파로 나누어지기도 했지만, 그들은 교학과 신분상으로 본다면 모두 성리학에 훈도된 양반사류였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京鄕을 막론하고 사류가 중심이 된 양반지배가 확고한 사회인 동시에 사림이라 불리는 선비집단이 그 사회의 영도세력이었다. 그 결과 사림이란 호칭은 당대 최고의 영예이며, 그들의 여론인 士論과 그들의 기상인 士氣는 곧 국가·국민의 원기로 간주되어 위정자는 이를 적극 배양, 권장해 주어야 한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따라서 시부사장에 능한 文才와 성리학적 지식은 그만큼 출사와 향촌지배에 중요한 방편의 하나가 되었다.

 양반과 동의어로 사용된 사족이란 항상 士와 族의 문제가 동시에 고려되었고 어느 한쪽만을 취하지 않았다. 가령 입학·과거·銓注·任官문제와 관련하여 과거와 署經과정에서 당사자의 글재주·학식·덕행과 함께 혈통과 가계 및 族屬을 중히 따지는 취지는 바로 그 두 가지 요건을 필수조건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엄격한 신분제를 바탕에 깔고 성리학적 유교소양과 文·武·蔭(南行)의 3대 출사로와 관련하여 과거·천거·取才 등을 채택했다는 데서 사와 족의 두 가지 요건인 혈통·가계·문음을 따지는 성과 본관, 가문·혼인관계를 중시한 결과, 아무리 명문·거족이라 하더라도 개인적인 자질과 능력을 갖추지 않는 한 사족 곧 양반신분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다.

 중앙정부는 왕을 정점으로 전국의 군현토성에서 상경 종사한 양반관료에 의해 정권이 유지되고, 지방은 각 군현 단위로 중앙의 왕실과 조정의 屛藩으로서 중앙정부가 필요로 하는 인적·물적 자원을 공급해 주고 외적의 침입이나 지방 반란이 발생했을 때는 각기 재지 세력을 중심으로 지역 단위 방어체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북로·남왜와 같은 외침을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있었고 跨州包郡과 같은 여러 고을이 연합한 지방 반란이 쉽게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한국은 그 기간 동안 異民族에 의한 정복왕조나 전형적인 혁명에 의한 지배세력의 전면적인 교체는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지속성이 매우 강인하게 존속하였고 또 지배세력의 변화와 교체도 계기적·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한 양반사회의 강한 지속성은 사대부의 기본성격에도 연유한 바 컸다고 볼 수 있다. 즉 재조자인 대부와 재야자인 사는 시대적·사회적 변화에 따라 그 지위가 교체될 수 있으며, 또한 재조자 중의 관직의 고하와 재야자 중의 재산정도의 차이로 인해 사고와 행위가 서로 다를 수 있다. 재조자가 너무 오래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지나치게 권력을 부리는 처지에 있게 되거나, 반대로 재야자가 너무 오래 벼슬을 못하고 경제적으로 몰락해서 교양도 법도도 없게 되면 모두 사대부 집단에서 탈락된다. 여기에서 전자는 過한 것이고 후자는 不及한 것이다. 과도 불급도 아닌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조선시대 사대부의 기본성격이라 할 수 있다. 15세기의 훈구파나 16세기 전반의 척족처럼 지나치게 권귀화됨으로써 누적된 모순을 시정하기는 커녕 도리어 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시기마다 재야자들의 획책과 추진으로 정변이 생기고 정변에 의한 모순의 일시적 타개는 그런대로 역성혁명의 파국으로의 전락을 중지시켰던 것이다. 中宗反正과 仁祖反正 및 왜란과 호란과 같은 큰 정변과 외침이 아니더라도 그 사이에 정도상의 차이는 있지만 사대부의 정치적 대체행동에 의하여 왕조는 몇 번이고 위험한 그 통치체제를 정돈하고 체질을 개선하여 그만큼 더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벌열정치 내지 세도정치가 나타난 뒤에 사대부 재야자의 정치적 행동이 분쇄되다시피 된 것은 왕조가 앞으로의 정치적 대체세력을 잃고 말았다는 점에서 불행한 것이다. 이로 인한 왕조의 장기화는 결과적으로 근대를 지향하고 역사의 행정 속에서 새로운 사명을 담당할 다음 사회의 주체세력, 즉 기존 사대부외 변혁세력의 형성을 매우 늦추어 놓았던 것이다.

 또한 양반사회가 그러한 지속성을 갖게 된 사회적 기반으로서는 첫째, 世臣·世族으로서의 양반사대부와 향역을 세습하는 世吏로서의 향리, 世傳其業하는 잡과출신의 중인층, 둘째, 사족의 손발과 재산으로서의 世傳奴婢와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공신노비를 비롯한 賜牌田民과 조상의 유산 등 신분과 직역 및 재산상속의 세습성과 폐쇄성이 특히 강인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계급내혼제와 子女均分상속제가 철저하였으므로 사회신분의 지속성과 연속성이 잘 유지될 수 있었다. 조선사회의 ‘양반’제도와 노비세전법을 비롯하여≪세종실록지리지≫성씨조의 성관체제, 경재소와 유향소의 병존, 邑司향리의 철저한 향역세습, 越境地와 犬牙相入地의 광범한 존속, 八高祖圖와 男歸女家婚·남녀균분상속제 등은 중국과는 판이한 제도와 관습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 외에도 양반의 신분유지에는 유교(학)적인 소양과 文才·학식과 관직, 명조·현조의 가계 및 일정한 경제적 기반(토지와 노비)이 있어야 했다. 또한 조선사회는 중앙과 지방 또는 각 신분·계층별로 권력의 안배와 財富의 분배가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중·외 관청마다 官과 吏란 양반과 중인, 고을마다 관아와 향청 및 吏廳, 향교와 서원, 반촌과 민촌 및 씨족과 문중을 단위로 한 관권과 향권이 서로 균형과 견제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서 전통적인 지배세력인 양반 이외에 제3세력의 정권 참여는 거의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간에 대해 지금까지 학계는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해 왔다. 그러나 이번≪한국사≫에서는 초기·중기·후기로 나누는 새로운 시기 구분을 도입했다. 중기 설정이 새로운 점이다. 이 구분에서 새로 설정한 중기는 대체로 15세기 말엽에서 17세기 말엽까지 곧 성종 후반에서 숙종 전반기에 이르는 약 2세기의 기간이 이에 해당한다. 종래의 전기·후기의 양분법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임진왜란이란 外侵을 구분점으로 삼는 것은 역사를 내재적으로보다는 타율적으로 인식하게 할 위험성이 높으며, 둘째로 그간의 여러 部面의 연구에서 임진왜란 직전과 직후 사이에는 단절보다는 연속성이 더 많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런 문제점은 양분법을 더 이상 취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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