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5. 근현대
  • 1) 근대적 사회변동과 자주 개혁의 시련
  • (2) 개항의 역사성과 사상계의 동향

(2) 개항의 역사성과 사상계의 동향

 아시아국가들이 느림보 걸음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 서유럽국가들은 항해술을 발달시켜 아시아를 침략해 왔다. 이른바 西勢東漸이다. 그들은 스페인·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프랑스·독일 등의 서유럽국과 뒤따라 미국과 러시아도 그에 참가했는데 그들의 첫 번째 요구가 문호개방이었다. 결국 그들의 총칼 앞에 세계 모든 나라가 무릎을 꿇고 문호를 개방하였다. 한국에 대하여 문호개방을 요구한 최초의 나라는 영국이었다. 뒤이어 프랑스와 미국 등이 요구해 왔으나 그들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에서 격퇴되었다. 격퇴한 것을 쇄국으로 보거나 척사위정으로 규정할 것도 아니다. 소박하게 열강의 침략에 대한 국가 본원적 반격으로 보아야 한다. 거기에 위정척사가 편승하고 쇄국으로 비추어진 것을 제국주의자들이 과장했을 뿐이다. 그후 정국을 주도하던 대원군이 퇴각하고 광무황제(고종)의402)광무황제란 고종을 일컫는다. 고종이란 칭호는 1919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지어준 사후 왕시호이다. 광무황제는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사용한 연호를 광무라고 부른 데에서 연유한 호칭이다. 아직 대한제국도 성립하기 전에 광무황제라고 부르는 것이 눈과 귀에 익지 않으나 그 보다 더 뒤인 1919년에, 그것도 광무제를 폐위시킨 일본의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이름을 사용하기 보다는 광무제란 호칭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근래 몇몇 연구가 광무제의 평가를 새롭게 하고 있다. 이태진의 고종에 대한 긍정적 평가의 논문은≪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 2000)에 집중 게재되어 있는데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 책에서 전개한 이태진의 주장의 요지는 다음의 세 가지 특징으로 줄일 수 있다. ①고종시대의 역사는 조선 후기의 개혁사상과 사실을 계승하여 새롭게 발전하고 있었다. ②새롭게 발전하는 역사를 이끌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고종이었다. ③그렇게 자력으로 한국근대사가 형성 발전하는 것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사기와 군사력의 강제로 속이고 죽이고 빼앗을 것은 빼앗으며 망쳐 버렸다.
 사실 광무제는 대원군의 노욕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왕좌를 지켰다. 그리고 의병장에 밀지를 내려 격려하고 대한매일신보에 자금을 지원했던가 하면, 을사늑약의 비준을 거부했고, 헤이그특사사건 후에 추가 비준까지 거부하고 왕좌에서 물러난 광무제였다. 그러나 한편, 유림 의병장들이 명나라 毅宗의 모범을 따라 자결하라는 상소를 외면했던가 하면, 아무리 구식군대라고 해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치른 군대였는데 친정 후 갑신정변·갑오왜란·을미사변·을사늑약의 소동에서 궁전도 지키지 못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친정이 실시되면서 대원군 세력에 맞설 민비 척족정치가 실시되었는데 민씨정권은 문호개방의 일단으로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403)19세기 후반기의 역사는 대원군과 광무제(고종)의 부자관계, 그리고 대원군과 민비의 구부관계를 솔직하게 밝혀야 이해가 가능하다. 대원군의 개혁정치에 대한 평론은 한결같지가 않다. 필자는 반동적인 것도 있지만 발전적인 것도 컸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그의 앞 시기에 비하여 발전적이었느냐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변화와 개혁은 일시에 달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열 개의 손가락에서 한 개의 변화가 의미를 가지고 있듯이, 선구적 개혁이 있었느냐의 여부와 그 뒤에 얼마나 발전했던가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민씨 척족정치나 광무제가 친정하면서 개혁정치를 얼마나 계승하고 추진해 나갔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개혁정치도 마찬가지로 후계자가 계승하고 발전시켰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침략군을 격퇴한 것을 쇄국정치의 일단으로 보아서는 안되지만, 침략군을 격퇴한 다음에 세계조류에 뛰어들지 못하고 척화비를 세운 1871년의 처사가 쇄국을 불러 일으키고 말았던 것은 분명한 실책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 다음의 정책을 수립할 겨를없이 1873년에 물러났다. 그러한 1871∼1873년 2년간의 실책보다 그가 역사를 그르친 것은 가족관계의 잘못된 조율과 물러난 뒤의 행각에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도 구미 제국의 무력에 굴복하여 1854년부터 문호를 개방하였는데 문호개방 후 일본은 반전하여 서양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을 침략해 왔다. 그리하여 프랑스와 미국이 굴복시키지 못한 조선을 굴복시켰다. 그것이 강화도조약이다. 이러한 세계 대세를 간파한 개화파 정객들은 문호개방을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진로로 전망하고 타율적으로 개항한 문호개방을 자율의 역사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이 오경석·유홍기·이동인·탁정식·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 등 이른바 개화당 인사들이었다.

 그런데 문호개방을 자율화하기 위한 개화정책의 진행은404)역사는 자율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다고 언제나 자율적으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타율적으로도 전개된다는 말인데 타율적으로 전개된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그 역사도 나의 역사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876년의 개항이나 1945년의 국토분단이 타율적 사실이었지만 한국사의 사실로 고착된 것처럼 타율적 사실이라도 그를 자율적 힘으로 거부하지 못했다면 한국사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때 타율적 역사를 자율적 역량으로 수용하여 타율의 의미를 극복하거나 희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필자는 ‘타율성의 자율화 작업’이라 말하고 있다. 지지부진하였다. 1876년 일본과 통상조약을 맺고 다음에 1882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을 때까지 6년여의 세월을 소비하였다. 그 6년간은 일본의 독무대로 일본 제국주의의 기반이 형성된 기간이 되고 말았다. 그때의 각종 개화시설 또는 근대시설이란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통로를 만드는 시설이었다. 정상적이라면 강화도조약에 이어 열강과의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열국간의 세력균형을 이루도록 조치해야 됐다. 외세에 의지하는 것은 역사를 그르치지만 외세를 이용하는 것은 생존과 발전의 지혜인 것이다. 청나라까지도 1878·79년에 걸쳐 문호개방을 권고한 바 있었으나 거부하였다.405)權錫奉,<李鴻章의 對朝鮮列國立約勸導策에 대하여>(≪歷史學報≫21, 1963), 114쪽.
宋炳基,≪近代韓中關係史硏究≫(단국대 출판부, 1985), 36쪽.
그후 뒤늦게 일본에 건너갔던 수신사 金弘集의 주장과 黃遵憲의≪朝鮮策略≫을 검토한 1880년 10월 12일의 중신회의에서 문호개방을 결정한 것이다.406)중신회의는 黃遵憲의≪朝鮮策略≫의 권고에 따라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는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회의였다. 7:3 정도의 찬성으로 통상조약 체결을 결정하고 추진하게 되었는데 이 결정은 문호개방의 타율성을 자율화시켰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역사성을 가진다. 그러나 그에 반대한 1881년의 辛巳斥邪疏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5백년 유교왕조와 조선 중기 이래의 북벌론 의식의 기세를 고려하면 그것도 당연한 추세였다. 당연한 추세인 척사소에 대하여 정부에서는 모두 유배형으로 봉쇄하고 춘천의 洪在鶴은 일벌백계로 처단하여 척사소의 기세를 잠재웠다. 그것은 국왕과 정부의 문호개방 의지를 대변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타율적 개항을 자율적 문호개방으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조처였다. 문호개방을 반대한 홍재학은 춘천군 서면 신매리 출신으로 華西 李恒老의 문인 重菴 金平黙의 제자였다.≪朝鮮策略≫에는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청국 국기를 조선의 국기로 사용할 것 등에 대한 요구도 등재되어 있다. 국기는 1881년 이래 태극기를 사용하였는데 속방 문제는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중국과의 통상조약에서 명시하고 말았다. 그것을 완전히 탈피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후부터였다. 그에 따라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맺었지만 그것은 러시아의 남하에 대한 대비책이기도 했다. 문호개방을 추진한 조선은 중국과의 전통적 조공관계를 근대적 통상관계로 전환시키려고 했다. 그때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임오군란은 1876년 이래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방치한 나머지 그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군란이었다.407)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의 무역수지를 보면 일본에 대한 수출입이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총수입 185만 2천원 가운데 대일 수입이 156만 2천원인데 대청수입은 29만원에 불과하고, 수출은 대일 상품수출이 193만 1천원과 사금수출이 52만 9천원인데 비하여 대청수출은 총16만 2천원에 불과했다(도면회,<개항후의 국제무역>,≪한국사≫39, 국사편찬위원회, 1999, 148쪽). 그런데 임오군란으로 청군이 주둔하고 청군에 의해 대원군이 납치되고 청군에 의지했던 민비정권을 압박하여 246년간(1636∼1882) 왕실간의 조공관계를408)李萬敷(1664∼1732)는 사대관계를 왕실간의 관계에 한정하고 백성에게는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 조선 백성이 남의 나라 국왕을 추모하는 萬東廟 설치에 반대하면서 조선 백성은 자기 국왕에게 충성하면 그만이라고 했다(이만부,<萬東祠議>,≪息山全書二≫, 여강출판사 영인본, 1993, 269쪽). 국가간의 종속관계로 전환시켜<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 조선이 청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속국 규정도 그것이지만 조선 국왕은 청의 북양대신과 대등하다는 규정에, 청나라 상인이 조선내지에서 상행위를 하도록 규정하여 중국의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409)중국의 횡포에 반발한 개화당을 독립당이라고 부른 이유도 포악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때문이었다. 朴殷植을 비롯한 종전의 독립운동 저술에서 갑신정변부터 시작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것은 자주 개혁의 꿈이 무너지는 대사건이었다. 개화당이 쿠데타를 서두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이렇게 역사가 혼돈에 휘말린 것은 혁명적 개화세력 즉, 개화 주체의 약체성에 기인했다고 볼 수도 있다.410)일본과 미국과의 통상조약에 이어 열국과 통상조약의 체결이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조약들은 치외법권·관세특혜·최혜국대우 등을 규정한 불평등조약이었음은 제국주의 시대의 통례였다.
1882. 8. 朝鮮中國商民水陸貿易章程(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1883. 11. 영국과 수호통상조약
1883. 11. 독일과 수호통상조약
1884. 6. 이태리와 수호통상조약
1884. 7. 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
1886. 6. 프랑스와 수호통상조약
1892. 6. 오스트리아와 수호통상조약
1901. 3. 벨기에와 수호통상조약
1902. 7. 덴마크와 수호통상조약

 당시의 사상동향을 보면, 지배적 대세는 세도정치기에 정체되어 있던 실학의 개혁사상이 다시 활기를 찾아 대세를 주도하고 있었다. 대원군의 개혁정치도 그러한 추세의 일단으로 볼 수 있다.411)박규수·최한기 같은 실학자가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斥和論을 제기했다고 해서 개화를 반대했다고 말할 수 없듯이, 대원군의 척화론도 같은 성격으로 볼 수 있다. 외세의 침략에 대한 반침략 전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척화론을 鎖國으로 이해하기에 앞서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해야 하고, 斥和論이 斥邪論과 같은 것도 아니라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개혁사상이 서세동점의 파고가 높아지면서 ‘국가개방론’ 또는 ‘개량적(온건) 개화론’으로 변신해 갔다. 그것이 개항과 더불어 다시 동도서기론으로 다듬어진 것이다. 동도서기론을 사상사의 위치에서 보면, 실학의 재생과 같은 것이다. 그때 실학 방식의 구시대 논리에 만족하지 않고 자아비판을 통한 자아혁신론이 성장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혁명적(급진) 개화론’이었다. 그들은 서세동점의 대세를 보고 혁명적 발전을 모색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혁명적 지식인에 의해 주창되었다. 그들은 특히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폭력적 압력을 당하고도 중국에 관심을 쏟는<개량적 개화론>을 구시대의 보수로 보고 수구파·사대당이라고 공박하였다. 그러니까 개화론이 대두하여 온건노선과 급진노선으로 분화한 것이 아니라 실학사상이 온건(개량적) 개화론으로 전이하고 있었는데 그에 대한 반발로 급진(혁명적)개화론이 대두한 것이다. 혁명적 개화론자는 자기만을 개화파 또는 개화당으로 이해하고 있었다.412)李光麟,<穩健·急進開化派의 思想>(≪韓國史講座 近代篇≫Ⅴ, 일조각, 1981), 126쪽. 그런데 어느 개화론도 개화의 시계가 청과 일본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넘는다고 해도 청나라나 일본을 통해서 보는 정도였다. 서양의 책을 번역해도 중국이나 일본 번역서를 재번역하는 방식이었다. 개화를 중개받고 있었던 셈이다. 때문에 間接開化 또는 屈折開化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조선 후기부터 실학과 북학론에 밀려 세력을 잃고 있던 위정척사론이 서세동점의 거센 물결에 반발하여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위정척사사상은 효종조의 북벌론에서 발원했는데 발원 당시에는 국민적 호응도가 높았다.413)北伐論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노론정권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인의 고장인 안동에서 남인으로 알려진 瓢隱 金是榲이 崇禎處士를 자처하면서 은둔생활을 고집하였는가 하면, 영양의 醉睡堂 吳演도 은둔했다가 효종의 북벌계획이 알려지자 靑杞面 靑杞里 椒洞 산중에서 북벌군을 일으켜 훈련할 정도로 북벌론에 적극 참여했다. 청기리에는 지금도 軍幕址가 전해 온다. 그리하여 북벌론을 제기한 이후의 조선 왕조를 북벌론 정권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북벌론 즉, 위정척사론은 국론의 위치를 굳히고 있었다. 그것이 실학이나 북학론의 공격을 받아 조선 후기부터 위축되고 있었다. 더구나 신문물 신종교가 유입되면서 지도이념의 자리를 잃고 있었다. 척사의 대상도 확대되면서 척사의 개념도 모호해져 갔다.414)斥邪의 대상이 北伐論에서는 淸나라를 배척한 것이었는데 그후 서양문화-천주교→서양 제국주의→일본 제국주의로 배척의 중심이 이동하였다. 중심이 이동했다고 그 전의 척사의 대상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순서가 바뀌고 있었을 뿐이었다. 때문에 척사론이 모두를 감당하기에 부담이 컸다. 거기에 때마침 일어난 북학론에 이어 신문화와 신종교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아 척사론은 세력을 잃고 있었다. 그때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국민적 저항 속에서 다시 힘을 얻어 활기를 띄게 된 것이다. 그것이 다시 힘을 얻게 되는 것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전국적 척화 분위기에 편승하여 척사론이 힘을 얻었고, 다음에 1881년에는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추진한 조정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이른바 신사척사운동으로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1895년 을미사변 때 위정척사의 기치를 들고 의병을 일으켜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자, 위정척사사상은 반제국주의사상의 중심을 점하게 되었다. 그래서 을미의병을 위정척사사상의 마지막 꽃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격변기에 사상의 분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조선 중기의 북벌론을 수호하면서 유교주의 예론을 지상의 사회윤리로 생각한 위정척사사상의 지식인이 있었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또 조선 후기 유학자의 실학사상을 계승하여 개량주의적 개혁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것도 자연적 추세였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세계정세를 맞아 그에 호응하여 혁명적 변화를 모색한 것도 당연히 있어야 할 생각이었다. 마지막의 혁명적 개화사상이 새시대에 가장 적절한 생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혁명노선을 추구하면서도 혁명의 수단과 방법론에는 어두웠던 것 같다. 혁명적 개화와 개혁에 수반해서 유입되고 있는 제국주의에 대하여 주의하지 않았다. 혁명도 자체 역량을 통해서만 달성된다는 혁명원리를 외면했다. 그리하여 1884년 갑신정변은 실패했다.

 그렇게 지식인이 오류를 거듭하고 있었으므로 대중이 지도자를 따라가지 않고 자체 사상을 개발해 나갔다. 1860년에 민중종교로 일어난 동학사상이 그것을 말하고 동학이 전파력을 가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동학은 1871년에 경상도지방에서 李弼濟亂의 농민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대중 조직력이 약하여 농민전쟁이 아닌 단순 반란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회는 방향타를 잃고 혼란이 거듭되었다. 조선 후기 이래의 鄭鑑錄 사상이 확산되었던 것도 거기에 이유가 있었다. 한편 문호개방과 더불어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일본의 神敎와 일본 불교가 들어오고, 미국의 개신교, 영국의 성공회, 프랑스의 천주교가 급속하게 유입, 확산되어 그 동안의 문화적 구심점이었던 유학이 힘을 잃고 있었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종교 또는 사상의 무정부상태가 나라의 힘을 잃게 한 주요 이유라고도 말한다. 그것이 힘을 잃는 이유가 됐든 아니든, 문화나 사상의 구심점이 제국주의 침략을 맞은 그때에 분산된 것은 시기가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적전 분화가 아니라면 민주화에 도움이 된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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