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1. 언어
  • 2) 문자화의 긴 도정

2) 문자화의 긴 도정

 언어는 요행이나 기적으로 그 명맥이 유지되지 않는다. 끝임없이 발전하지 않으면 쇠퇴하고 만다. 발전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어지고 쓸모가 없어지면 버림받게 된다.

 오늘날까지 한국어를 지켜온 것은 민족 문화의 밑힘이다. 우리 민족은 아득한 옛날에 이미 독자적인 문화의 틀을 갖추고 있었기에 중국 문화의 거센 물결에도 휩쓸리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범상히 여기기 쉬우나 2천년이나 계속된 중국 문화의 압력은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웬만큼 튼튼한 밑힘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본바탕이 유지되기 어려웠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漢字를 받아들이고 漢文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가 가장 큰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言文二致의 상태는 오래 계속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선조들은 이 위기를 용케 이겨내었다. 한문을 自國語로 읽으려는 노력과 함께 한자로 자국어를 표기하려는 노력을 끈질기게 계속했던 것이다. 이것은 言文一致를 향한 엄청난 노력이었다. 이런 노력이 고대 삼국에서 이루어졌다.

 언어는 文字化로 틀이 잡힌다. 문자화를 계기로 해서 한 나라의 언어가 정비되고 전체적으로 位相을 높이게 된다. 문자화를 이룩할 때 그 나라는 비로소 문화 국가의 반열에 들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자, 한문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보려고 한 고대인들의 노력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인명, 지명, 관직명 등의 고유명사를 한자의 音을 빌어 표기하였다. 이것은 중국인들이 외국의 고유명사를 표기할 때 사용한 방법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에 만족할 수 없어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한자의 새김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새김이란 訓 또는 釋이라고도 불린 것으로 ‘天 하늘 천’의 ‘하늘’을 말한다. 이 새김이 고대 삼국에서 비롯되었으니 그 역사가 참으로 유구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한자마다 새김을 붙이는 것은 한자 학습의 매우 효과적인 방법인데, 이것이 아득한 고대에 개발되었음도 주목할 만하거니와 이것을 표기에 이용했다는 것은 더욱 주목할 사실이다. 쉽게 말하면 ‘天’자를 ‘천(옛날에는 ‘텬’)’으로도 읽었으나 ‘하늘(옛날에는 ‘하’)’로도 읽은 것이었다. 새김을 표기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새김이 사회적으로(적어도 한자를 쓴 지배계층에서) 확립되어 있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 새김의 관습이 뿌리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새김의 확립은 곧 자국어의 확립을 의미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아마도 한자의 새김은 일찍 고구려에서 싹텄고 신라·백제에서 그것을 본뜨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漢文을 읽을 때나 글을 쓸 때에도 독특한 방법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문의 語順은 자국어의 어순과 달라서 껄끄러웠고 이것을 매끄럽게 고쳐서 읽는 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에 한자를 새김으로 읽기도 하고 필요한 곳에 토를 단 飜譯體에 가까운 한문 독법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496)이러한 사실은 1973년 말 충청남도 서산군 文殊寺에서 고려시대에 간행된
≪舊譯仁王經≫낙장이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알려졌다. 그 뒤 고려시대의 자료
들이 잇달아 나타나 이 사실이 확증되었다. 이것은 한문을 내리 읽으며 구절 끝에 토를 다는 후대의 독법과는 다른 것이다. 국어학자들은≪구역인왕경≫과 같은 것을 釋讀口訣, 후대의 것을 順讀口訣이라 부른다.
이 독법을 표시하기 위하여 한자의 획을 극도로 줄인 略字나 點 같은 기호를 써넣게 되었다. 이것을 口訣이라 하였는데 아마도 삼국시대에 싹이 터서 통일 신라에 와서 다듬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하여(≪三國史記≫卷 46)에 薛聰이 “방언으로 九經을 읽어 後生을 가르쳐 오늘날도 배우는 자들이 이를 우러러 따른다.”라고 한 기록이 눈길을 끈다.497)우리 나라 口訣字는 일본의 가나(假名) 문자의 기본이 되었다. 이것은 동아시아 文字史에서 大書特筆할 사실이다.

 고대의 고구려와 신라에서는 한자로 기록을 할 때에도 자국어에 가깝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한 흔적을 오늘날 남아 있는 碑文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도가 점점 발전하여 이두[吏讀]가 되었는데 이두는 고구려에서 싹터서 신라에 와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신라어로 부른 鄕歌를 표기하기에 이르렀다. 향가를 모은≪三代目≫이 진성여왕 2년(888)에 편찬되었다고 하니, 이 책이 전하지 않음은 천추의 한이지만,≪三國遺事≫에 전하는 14수만으로도 신라어를 한자로 표기하는 체계가 잘 갖추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고대로부터 비록 한문을 썼다고 하나 그 속에는 민족어가 배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문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민족어에 대한 확고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 문자화를 위한 노력을 이어온 것이다.

 世宗大王의 訓民正音 창제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금자탑이다. 이것이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임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고대로부터 이어온 민족어에 대한 높은 자각과 그 표기에 대한 강렬한 염원이 그 밑받침이 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崔萬理가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여 올린 疏를 보고 “너희들이 用音合字가 모두 옛 것에 어긋난다고 했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을 달리한 것이 아니냐. 또 이두를 만든 본뜻이 便民을 위한 것이 아니냐. 편민으로 말하면 이제 언문도 또한 편민을 위한 것이 아니냐. 너희들이 설총만 옳게 여기고 君上의 일은 그르게 여기니 무슨 까닭이냐”(≪世宗實錄≫卷 103)라고 나무란 데서 세종대왕의 분명한 역사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선조들이 오래 겪어온 고민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세종대왕은 한자에 의존하는 길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어의 완전한 문자화의 길이 열렸으나 한문과 이두를 쓰는 관습은 너무나 강했다. 세종대왕도 이것을 뿌리칠 생각은 없었던 듯,≪훈민정음≫서문에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자가 많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 여덟 자를 만드니…”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龍飛御天歌≫와≪月印千江之曲≫을 지음으로써 대왕은 새 문자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언문일치의 기치가 오른 것은 고종 31년(1894)의 甲午更張 때였다. 그 해(11월 21일)에 내린<公文式>에 관문(國文)을 기본으로 삼음을 천명하였으나 한문과 국한문도 쓸 수 있다고 하여 과도적 성격을 드러내었다. 이보다 10여 년 뒤(1908년 2월 6일)≪官報≫에는 관청의 공문은 모두 國漢文으로 하고 국문·한문·이두 및 외국 문자의 혼용을 금함을 밝히었다. 이것은 그 무렵 우리 나라의 문자 생활에서 국한문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음을 반영한 것이다. 그 때만 해도 지독한 한문투였는데 차츰 좋아져서 30년대에는 얼추 언문일치가 달성되었다. 이 30년대는 우리말과 글의 역사에서 큰 획이 그어진 때였다. 맞춤법과 표준어가 이 때에 마련된 것이다. 먼저 표준어를 정하고 그 표준어를 적는 맞춤법을 정하는 것이 바른 순서인데 朝鮮語學會는 먼저<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을 정하고<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을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말엽, 20세기 초엽부터 맞춤법 제정을 위한 노력이 줄곧 主流를 이루어온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498)19세기 말엽에 제기된 맞춤법 제정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져서 1907년에 學部에 國文硏究所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이 연구소는 3년간의 연구 끝에<國文硏究議定案>을 작성하여 정부에 제출하였으나 공표를 보지 못하였다(李基文,
≪開化期의 國文 硏究≫, 1970, 一潮閣).

 맞춤법과 표준어의 정립을 위한 조선어학회의 노력은 학계·교육계·언론계·문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에 조선어학회는<외래어 표기법 통일안>(1941)을 마련하는 한편, 국어 사전 편찬 사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말과 글의 표준화는 사전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는 일본 침략자들의 魔手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사전의 간행은 광복 이후에야 이루어졌다(≪큰 사전≫6권, 을유문화사, 1947∼1957). 이로써 우리 민족도 어연번듯한 국어 사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지난 20세기의 80년대 말에 문교부는<외래어 표기법>(1986년 1월),<한글 맞춤법>(1988년 1월),<표준어 규정>(1988년 1월)을 고시하였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조선어학회의 규정을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이다. 그리고 한 민간 단체의 이름으로 되었던 것을 국가의 이름으로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991년 초에 국립국어연구원이 설립되면서 국어 사전을 새로 편찬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1999년 10월에≪표준 국어 대사전≫(3권, 두산동아)의 완간을 보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더욱 확고한 터전 위에서 통일된 어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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