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2. 문학
  • 2) 문학사의 전개

2) 문학사의 전개

 구비문학·한문학·국문문학은 언제나 같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다.505)이제부터 설명하는 한국문학사의 전개는 조동일,≪한국문학통사≫전5권(지식산업사, 1994)에 근거를 둔다. 그 셋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서 변했다. 바로 그 점에 근거를 두고 문학사의 시대구분을 할 수 있다. 한국문학사의 시대구분에 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고 논의가 복잡하지만, 구비문학·한문학·국문문학의 관계를 일차적인 기준으로 삼으면 우선 선명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처음에는 구비문학만 있었다. 그 시기를 고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기원 전후의 시기에 한문을 받아들이고 5세기 이전에 본격적인 한문학을 이룩하면서, 고대에서 중세로 들어섰다. 중세는 한문학의 시대였다. 중세문학은 한문학의 등장에서 퇴장까지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문학은 국문문학과 공존했다. 처음에는 한자를 이용한 향찰을 통해서, 그 다음에는 한국어를 직접 표기하는 훈민정음을 창안해서 국문문학을 육성했다. 17세기 이후에는 국문문학이 활발하게 창작되어, 한문학과 맞설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로 들어섰다.

 한문학이 물러나고 국문문학이 한문학의 위치까지 차지하게 된 시기의 문학이 근대문학이다. 1894년의 갑오경장에서,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국문을 공용의 글로 삼은 것이 근대문학 성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민족은 단일민족이고, 한국어는 방언 차이가 아주 적어, 민족어를 통일시키고 표준화해서 근대민족문학을 일으키는 과업을 쉽사리 수행할 수 있었다. 한문이 문어이고, 국문이 구어일 따름이고, 국문 안에는 문어체와 구어체의 장벽이 없어, 한문을 버리고 국문만 쓰자 언문일치가 바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국문학사 시대구분을 하는 두번째 기준은 문학갈래이다. 구비문학·한문학·국문문학이 각기 그것대로 특징이 있는 문학갈래를 제공해 문학사의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래서 문학갈래가 서로 경쟁하는 역사가 전개되었다. 시대에 따라서 두드러진 구실을 하는 문학갈래가 교체되고, 여러 문학갈래가 체계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양상이 바뀐 것을 정리해서 살피면, 문학사의 전개를 이해하는 관점을 한 차원 높일 수 있었다.

 구비문학의 시대인 고대에는 건국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건국서사시가 특히 중요한 구실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건국서사시 자체는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흔적은 남아 있다. 건국의 신이로운 내력을 말한 건국신화의 개요가 한문으로 기록되어 전한다. 나라굿을 하면서 영웅의 투쟁을 노래하던 방식은 서사무가로 이어지고 있다. 그 둘을 합쳐 보면, 건국사사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한문학이 등장하면서 서사시를 대신해 서정시가 주도적인 구실을 하게 되었다. 한문학의 정수인 한시가 세련되고 간결한 표현을 자랑하는 서정시였으며, 국문문학 또한 서정시를 가장 소중한 영역으로 삼았다. 향가는 민요에 근거를 둔 율격을 한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듬어, 심오한 사상을 함축한 서정시로 발전했다. 국문문학이 향가에서만 이룩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 시기에 서정시가 다른 어느 갈래보다 소중한 구실을 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향가를 대신해서 시조가 생겨나면서 문학갈래의 체계가 개편되었다. 향가 시대에는 서정시가 홀로 우뚝했던 것과 다르게, 시조는 가사와 공존했다. 시조는 서정시이지만, 가사는 교술시이다. 서정은 집약을, 교술을 확장을 특징으로 한다. 서정은 세계의 자아화라면, 교술은 자아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506)한국문학의 갈래를 이렇게 나누는 방법은 조동일,≪한국문학의 갈래 이론≫(집문당, 1992)에서 자세하게 논했다. 가사뿐만 아니라 景幾體歌, 樂章 등도 교술시이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더불어 국문문학의 확장이 가능해지자, 장형 교술시가 기록문학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었다.

 교술은 문학의 세계에 오래 전부터 있었다. 한문학의 文은 거의 다 교술이었다. 그런데 국문문학 교술시 갈래가 여럿 등장한 시기에, 한문학에서도 실용적인 쓰임새는 없고, 서사적인 수법을 빌려 흥미를 끄는 교술문학 갈래인 假傳이나 夢遊錄이 생겨났다. 교술이 활성화되는 변화가 국문문학과 한문학 양쪽에서 나타나 문학의 판도를 전과 다르게 바꾸어놓았다. 그렇게 해서 중세전기가 끝나고, 중세후기문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국문문학이 한문학과 대등한 위치로 성장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이르러서는, 소설이 발달해, 서정·교술·서사가 맞서게 되었다. 소설에는 한문소설도 있고, 국문소설도 있어, 서로 경쟁하고 자극했다. 국문소설의 발전으로 국문문학의 영역이 확대되고, 작품의 수와 분량이 대폭 늘어났다. 서정 영역의 시조에서 사설시조가 나타나고, 교술시인 가사가 더욱 장편으로 늘어나 생활의 실상을 자세하게 다루게 된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것은 서사문학 발달에 상응하는 변화가 다른 영역에서도 일어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구비문학 또한 활기를 띠고, 새로운 문학갈래를 산출했다. 민요와 설화의 재창조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서사무가를 기반으로 해서 판소리가 생겨나 서사문학을 쇄신하는 구실을 적극 수행했다. 판소리는 영웅서사시를 범인서사시로 바꾸어 놓고, 교훈과 풍자가 서로 부딪치는 복합적인 구조를 만들어 당대의 논쟁을 수렴했으며, 음악이나 공연 방식 또한 뛰어나 흥행에서 크게 성공했다. 오랜 내력을 가진 농촌탈춤이 더욱 규모가 크고, 사회비판에 더욱 적극적인 도시탈춤으로 발전해서, 구비문학까지 고려하면 서정·교술·서사·희곡의 네 가지 기본 갈래가 경쟁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근대문학이 시작되면서 문학갈래의 체계에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교술의 몰락이다. 한문학이 퇴장하면서 교술의 커다란 영역이 사라졌다. 근대 국문문학에서는 교술산문 가운데 수필이라고 하는 것만 문학에 속한다고 인정되었다. 시조와 가사는 운명이 서로 달라, 시조는 부흥하려고 애쓰면서 가사는 구시대 문학의 잔존 형태로서도 존속할 수 없게 해서, 교술의 몰락을 공화했다. 그 대신에 희곡이 기록문학의 영역에 들어서서, 서정·서사·희곡의 갈래 삽분법이 확립되었다.

 한국 근대문학 형성에 한국의 전통과 서양의 영향이 어떻게 작용했는가 하는 것이 오랜 논란거리이다. 그런데 그 양상이 서정·서사·희곡의 세 영에서 각기 다르게 나타났다. 서사 영역 소설에서는 고전소설의 성장이 근대소설로 거의 그대로 연장되어, 언어사용, 사건 전개, 독자와의 관계 설정 등에서 단절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서정시에서는 고전시가의 전통이 이면에서 계승되고, 표면에서는 서양의 전례를 따르는 근대자유시를 이룩하려고 노력이 두드러졌다. 희곡에서는 사정이 달라, 구비문학으로 전승되는 데 그친 탈춤과는 아주 다른 기록문학이고 개인작인 희곡이 이식되었디.

 문학갈래의 체계가 지금까지 살핀 바와 같이 변한 것은 문학담당이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문학을 창조하고 수용하는 집단이 문학담당층이다. 문학담당층은 여럿이 공존하면서 서로 경쟁한다. 사회의 지배층, 그 비판 세력, 피지배 민중이 모두 문학당담층으로서 각기 그 나름대로의 구실을 하면서 서로 경쟁했다. 문학사를 문학담당층끼리 주도권 경합을 벌여온 역사로 이해하는 작업을 언어와 문학갈래에 기준을 둔 지금까지의 고찰에다 보태야 이차원을 넘어서서 삼차원에 이를 수 있다. 문학담당층의 일원으로 대표적인 작가를 들어 논하는 것이 이제 가능하고 필요하게 되었다.

 고대의 건국서사시는 정복전쟁의 주역인 군사적인 귀족이 스스로 창작하고 전승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때는 정치의 지배자가 종교의 사제자이면서, 문학과 예술도 직접 관장했을 것이다. 건국의 시조가 하늘의 아들이고, 지배자가 하늘과 통하고 있어 자기 집단이 배타적인 우월감을 가져 마땅하다는 고대 자기중심주의를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방식을 건국서사시에서 마련했다.

 그런데 한문학을 받아들이고, 격조 높은 서정시를 창작해야 하는 중세에 이르자, 문학을 관장하는 전문가 집단이 있어야만 했다. 신라에서는 六頭品이 바로 그런 임무를 맡았다. 육두품은 최고 지배신분인 眞骨의 지위에는 오를 수 없는 하급귀족이었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실제로 기여하는 기능인이면서, 한문학과 불교 양면에서 중세보편주의의 이상을 추구하는 갈등을 겪었다. 신라에서 뜻을 펴지 못해 당나라에 가야 했던 崔致遠의 번민이 그런 사정 때문에 심각해졌다.

 10세기에 신라를 대신해 고려가 들어설 때에는 중세문학 담당층이 그런 지위에서 벗어나 스스로 지배신분으로 올라서고, 과거를 보아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그 결과 한문학 창작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렇지만, 누구나 실력을 기르면 과거에 급제할 수 있다는 원칙이 그대로 실현되지 않고 몇몇 가문이 기득권을 누렸으므로, 고려 전기의 지배층을 문벌귀족이라고 일컫는다. 그때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한 金富軾의 문학 창작과 역사 서술에서 문벌귀족의 의식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12세기말에 무신란이 일어나고, 이어서 몽고족이 침입하는 동안에 오랜 내력을 가진 문벌귀족은 밀려나고, 그 대신에 등장한 권문세족이라고 일컬어지는 새로운 집권층이 생겨나 이념 수립의 능력은 없으면서 횡포를 일삼았다. 문벌귀족에 눌려지내던 지방 향리 가운데 한문학을 익혀 실력을 쌓은 인재가 중앙정계에 등장해 신흥 사대부로 성장하면서, 권문세족과 맞서서 사회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래서 중세전기문학에서 중세후기문학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그 선구자 李奎報가 민족을 생각하고 민족을 옹호하는 문학을 하는 길을 열었다. 安軸이나 李穡의 세대에 이르러서 방향 전환을 더욱 뚜렷하게 하고, 경기체가와 시조를 창안해 국문시가를 혁신하기도 했다.

 사대부가 스스로 권력을 잡고 조선왕조를 창건해, 신유학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 15세기 이후의 시기에, 그 때문에 노선 대립의 진통이 생겨났다. 文과 道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공동의 강령으로 삼으면서, 徐居正을 위시한 기득권층 훈구파는 文을 더욱 중요시하고, 李滉을 이론적인 지도자 노릇을 한 비판세력 사림파는 道에 힘쓰는 것이 더욱 긴요하다고 했다. 金時習을 선구자로 한 방외인들은 사대부로서의 특권이나 우월감을 버리고 민중과의 동질성을 느끼면서, 조선왕조의 지배질서에 대해서 반발하는 문학을 했다.

 17세기 이후의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이르면, 신유학의 이념과 한문학의 규범을 더욱 배타적으로 옹호하려고 하는 집권 사대부들의 노력이 강화되었으나, 시대가 바뀌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사대부문학 내부의 분열이 확대되고, 사대부의 주도권이 흔들렸다. 지배체제의 모순을 절감하는 사대부 지식인들 가운데 朴趾源·丁若鏞 등의 실학파 문인들이 나타나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새로운 한문학을 이룩했다. 남성의 문학으로 일관되던 사대부문학이 남녀의 문학으로 나누어졌으며, 사대부 부녀자들이 국문문학의 작자와 독자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었다.

 중인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 한시를 짓고, 시조를 전문적으로 노래하는 가객 노릇을 하고, 판소리의 애호가가 되기도 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가객으로서 金天澤과 金壽長이 두드러진 활동을 하면서, 시조를 창작하기도 하고, 시조집을 엮기도 했다. 申在孝는 판소리를 후원하고, 판소리 사설을 다듬었다. 중인 또는 그 이하 신분층에서 장사를 해서 돈을 모은 시민층이 형성되면서, 흥밋거리의 문학을 요구하고, 문학의 상품화하는 방식을 마련해서, 특히 소설의 발전에 적극 기여했다. 소설을 빌려주고 돈을 받기도 하고, 목판본으로 간행해 시장에 내놓아 널리 판매했다. 연행활동을 직업으로 삼는 광대가 크게 활약해 판소리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농민도 구비문학의 재창조에 힘써 민중의식 성장의 저변을 튼튼하게 했다.

 사대부가 퇴장하고, 시민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면서 근대문학이 시작되었다. 廉想涉·玄鎭健·羅稻는 서울 중인의 후예인 시민이어서 근대소설을 이룩하는 데 앞장설 수 있었다. 李光洙·金東仁·金素月 등 평안도 상민 출신 시민층도 근대문학 형성에서 큰 몫을 담당했다. 근대문학의 주역인 시민은 자기 계급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옹호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사대부문학의 유산을 계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문학과 제휴해, 중세보편주의와는 다른 근대민족주의의 문학을 발전시키는 의무를 감당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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