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3. 종교와 사상
  • 5) 한국 종교사의 전개
  • (2) 고대

(2) 고대

 이러한 과정에서 점차 천상의 영역을 지배하는 천신의 관념이 부각되고, 이를 중심으로 초월적 영역의 질서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529)Robert N. Bellah, Religious Evolution, Sociology of Religion(ed. by Roland Robertson, Penguin books, 1969), p.272. 단군신화에서 천신 桓雄이 風伯·雨師·雲師를 거느렸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나아가 단군신화에는 弘益人間의 이상이 보인다. 이것은 주술적 기복사상을 넘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의 틀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530)윤이흠,<한국종교의 개관>(≪宗敎年鑑≫, 종교사회연구소, 1995), 38쪽.

 이러한 바탕이 있었기에 삼국시대에는 동양의 고전종교인 불교·유교·도교가 수용된다. 이들 종교의 수용은 고대국가의 체제 정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은 왕권 중심의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이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때 불교는 왕권의 초월성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제공할 수 있었고, 유교는 忠孝의 덕목으로 이에 기여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불교와 유교가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 종교의 수용은 한국의 종교, 나아가 한국 문화의 수준을 한 차원 높였다. 그것은 첫째, 인간의 이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이다. 인간의 1차적 목표는 생존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들 종교는 각각 해탈·군자·신선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제시하고, 이를 추구하는 것이 이상적 삶이라 했다. 이에 따라 이상의 실현을 위한 자기 희생과 求道的 삶이 높이 평가되기 시작한다.

 둘째, 우주에 대한 통일적 해석을 제시했다. 우주가 조각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法·天·道와 같은 원리에 의해 구성되고 조직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인간 사회도 우주의 통일적 질서의 한 부분으로 보면서, 우주와 사회의 조화를 강조했다. 따라서 이들 종교의 수용은 한국종교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일본에 전함으로써, 일본 문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에도 기여했다. 백제의 阿直岐와 王仁에 의한 유교의 전파, 성왕 30년(552) 백제 怒利斯致契에 의한 불교 전파 등이 그것이다.

 한편 이들 종교는 각각 다른 측면에서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불교의 경우, 첫째, 호국정신을 뒷받침했다. 즉 불교는 자국을 佛國土, 즉 불교적으로 선택된 국가라고 이상화하면서 국토 수호의 당위성을 천명했다. 나아가 불국토 확대를 명분으로 정복전쟁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둘째,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의 전통종교는 현세 중심적이었다. 즉 현세에서의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목표로 했으며, 이를 위해 의례를 중시했다. 그리고 내세는 막연히 현세의 연장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불교는 현세 부정적이었다. 즉 과거·현재·미래가 인과관계에 의해 끝없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현세는 과정의 한 부분에 불과하며, 덧없는 것이라 했다. 이에 따라 불교에서는 미래, 즉 내세관이 발달했는데, 그것은 생전의 삶의 질에 따라 극락·지옥 등으로 다변화되어 있다고 했다. 따라서 현세를 위해서는 물론 내세를 위해서도 도덕적 삶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셋째, 철학적 성찰을 심화시켰다. 수용 당시의 불교는 중국의 그것을 받아들여 모방하는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신라의 반도 통일을 전후한 시기부터 동아시아 불교계의 최고 지성들이 등장한다. 당시 동아시아 불교학을 대표하는 華嚴學에서는 義相(625∼702), 唯識學에서는 圓測(613∼696) 등이 등장한다. 나아가 元曉(617∼686)는 불교계의 근본 문제였던 대승불교의 2대 조류, 즉 中觀과 唯識의 대립을 一心으로 종합하는 和諍의 논리를 제시했다.

 넷째, 한국 문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석굴암·다보탑·석가탑 등 고대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재들이 불교의 산물임을 생각할 때, 이러한 사실은 새삼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고 하겠다.

 유교는 超世間的인 불교와 달리, 현세를 중시하며 합리성을 존중한다. 따라서 유교는 불교와 조화를 이루면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그것은 국가를 조직하고 경영하는 분야에서였다. 그 중에서도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의 기능이 컸다. 고구려의 太學이나 扃堂, 신라의 國學이 바로 유교 교육기관인데, 여기서는 주로 五經 중심의 교육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 유교의 기능은 스스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개인의 학식이나 품행을 중시하는 유교가 골품제 같이 폐쇄적인 신분제 하에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교는 신선사상에 老莊思想을 결합시켜 체계화한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이것 역시 儒·佛과 함께 지식인들의 필수적인 교양이었고, 고구려의 淵蓋蘇文은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고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도교는 문화의 저변으로 확산되었지만, 개인적 성격이 강하여 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한편 이와 같이 불교·유교·도교가 수용됨에 따라 토착종교는 왕권을 정당화하고 국가를 이끌어 가는 기능, 즉 정치적 기능을 상실하고 점차 기층사회로 침전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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