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4. 과학기술 -한국 과학기술사의 시기별 특징-
  • 1) 전통과학시대
  • (1) 한국 과학전통의 평가와 반성

(1) 한국 과학전통의 평가와 반성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의 과학기술은 전반적으로 완만하게 발전되어 왔다. 그것은 구태여 서양의 과학 발달 과정과 비교하여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세계사에서 과학은 동서를 가릴 것 없이 아주 천천히 싹트고 자랐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서양에서는 16세기에 들어가 과학이 거의 폭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그후 그 발달 과정이 결코 멈추지 않았던데 비하자면, 동양의 과학수준은 16세기 이후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기원전부터 중국에서는 학문과 사상이 상당히 발달했다. 그것은 특히 춘추전국시대에 그 절정을 이루어 많은 사상가들의 주장들이 책이 되어 남아 있기도 하다. 하지만 같은 시기 이 땅에서는 아직 그런 학문과 사상의 전개가 이뤄지지는 못했다. 당연히 중국에서는 기원전부터 이미 과학을 말할 수 있는 자료가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기원전의 과학을 말하기에는 자료가 절대 부족하다. 다만 기록으로 남겨져 있지 않은 원시시대의 여러 생활 기술만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따름이다.

 삼국시대로 들어 가면서는 보다 확실한 과학기술의 유물이나 유적, 그리고 보다 확실한 기록을 근거로 한국 과학기술사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러기에 근대역사학이 시작된 이후 한국의 역사는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의 과학기술사의 대표적 성과로 여러 가지를 예로 들어 설명해 왔다. 그 대표적인 것들은 첨성대, 인쇄술과 금속활자, 거북선, 측우기 등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과학기술 유물 유적에 대해서 전통사회는 이들을 거의 무시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완전히 무시되어 왔던 이들 과학기술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대략 1세기 전부터였다. 근대 서구 문명의 세례 속에서 비로소 과학기술 문명 부분에 주목하게 되었던 까닭이다. 특히 이들 과학 유산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민족 사이의 갈등 속에 나라를 잃은 다음 새롭게 눈을 뜬 식민지 시대 조선의 지식층 사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에게는 이런 빛나는 과학기술 유산이 우리에게도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발견이었고, 자못 자랑스러운 역사라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일부 자랑이 지나치는 경향을 나타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해방 반세기를 훨씬 지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한국인들은 그런 민족의식 넘치는 역사 평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몇 가지 대표적인 유산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었고, 그런 반성적 연구와 서술이 최근 한국과학기술사의 서술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첨성대를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첨성대가 오늘처럼 널리 그리고 높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부터의 일이다. 특히 일본의 천문기상 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가 이에 대해 글을 써서 발표함으로써 첨성대는 일부 주목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곧 세계적 관심까지 받을 수가 있게 되었다. 실제로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던 우리 선조들 가운데에는 첨성대를 비롯한 몇 가지 과학기술상의 업적을 들어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할 필요성이 있었던 점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첨성대가 633년 또는 647년 건조되었다하여, 같은 시기의 신라가 특별히 천문학 분야에서 다른 나라보다 월등하게 앞서는 다른 천문학 발달을 성취했었던지 증명할 길은 없다. 당시 기록을 근거로 편찬된≪삼국사기≫에는 상당한 천문 기록이 첨성대를 건조하던 시기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천문 기록이 조직적인 천문학 발달에서 비롯한 것이라기 보다는 당대에 발달했던 災異論을 근거로 한 것임이 분명하다.

 70년대에 과학사 또는 일반 역사가 사이에 첨성대의 본질을 두고 논전이 벌어진 것은 이러한 반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우리는 오늘 과학기술 문명 속에서 익숙해진 덕택에 첨성대를 과학 유산으로 꼽고 예찬하고 있지만, 1세기 전까지의 우리 조상들에게 그것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7세기 초에 이미 이런 천문관련 건조물을 지어 남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삼국시대에 우리 선조들의 천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은 분명히 당시 세계에서는 첨단 수준에 있었다는 평가를 할 수도 있다.

 인쇄술이 다음으로 거론된 대표적 전통기술의 열매라 할 만하다. 가장 대표적인 과학기술의 유물로는 1966년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무구정광대다라니경>(보통<陀羅尼經>이라 약칭)을 들 수 있다. 이 두루말이 불경은 700년대 초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세계 最古의 인쇄물로 인정되어 왔다. 인류 역사에서 인쇄술의 발명은 대단히 중요한-아니 어쩌면 가장 중요한-발명의 하나로 꼽을 수가 있다. 당연히 이에 대해서는 세계적 주목도 받았고, 이것을 중국 학계에서는 신라 승려가 중국에서 얻어간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기도 하다. 여하간 불교가 크게 일고 있던 이 시기 신라에서는 불경을 인쇄하려는 관심이 당연히 높았을 수밖에 없다. 이런 관심은 그후 고려에서 계승되어 13세기에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경판을 목판으로 남겼던 것이다. 이것이 국보로 지정된 해인사에 보관되고 있는 八萬大藏經이다.

 전세계 모든 민족의 과학 기술을 돌이켜 볼 때 중국이나 아랍을 제외하고는 한국만큼 과학기술의 수준이 높았던 곳은 별로 없을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15세기 경 까지는 중국이 세계를 앞서고 있었다고 평가되는데, 삼국시대-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1천년 이상의 기록으로 남은 역사시대를 통하여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은 세계적으로 선진 위치를 지켜왔다고 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물론 이 시기 동안 중국 문명은 절대적으로 이 땅에 영향을 주어 온 점을 무시할 수가 없고, 크게 보면 한국 과학기술사의 대부분이 중국의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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