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4. 과학기술 -한국 과학기술사의 시기별 특징-
  • 1) 전통과학시대
  • (2) 전통과학의 관 주도적 특성

(2) 전통과학의 관 주도적 특성

 전통시대의 과학기술을 특징짓는 가장 대표적인 점은 그것이 ‘官治科學’이었다는 사실이다. 중세 말에서 르네상스 시기의 서양의 봉건 영주들은 과학, 기술, 예술 활동 일체를 후원해서 여러 분야를 발달시켰다. 이런 점으로는 동서의 전통 과학기술에 공통 요소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서양의 중세에서 근세 초기까지의 사회가 봉건구조를 갖고 있어서, 그 사회를 지배하는 계층이 봉건 영주들이고 상당히 많은 수의 영주들이 서로 각축하는 전쟁 내지는 경쟁 상태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중국과 한국의 전통사회는 대체로 안정된 중앙집권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규모도 유럽사회의 봉건 국가들에 비해서는 아주 크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았지만, 고려와 조선이란 이 땅의 왕국 역시 그 규모에 있어서는 유럽 중세의 영주국보다는 대체로 큰 규모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치적 특성은 일부 과학기술의 발달을 보장하는 듯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발달을 한계지웠다고 하겠다. 어느 정도 발달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 이상의 발달을 억제해 주는 효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치과학의 대표 분야라면 중국의 경우나 비슷하게 천문학과 의학을 꼽을 수 있다. 그 밖에 나라가 필요로하는 기술 분야 역시 관치기술로 수용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대표 분야라 할 수 있는 의학과 천문학이 크게 발달한 장점이 있는가하면, 그 밖의 분야는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불균형의 과학기술 발달을 좌우한 근원에는 지배적 이데올로기 문제가 있었음을 주목하게 된다. 한국의 경우 잘 알려진 것처럼 역사 시기에 들어와 압도적으로 지배적이었던 사상체계로 불교와 유교를 들 수 있다. 불교는 삼국 통일 직전 시기부터 고려시대까지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고, 유교는 조선시대를 좌우했던 것이다.

 이 불교 내지 유교적 가치관이나 사상이 과학기술을 ‘낮은 문화’로 묶어주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불교는 중세 서양의 기독교와도 흡사하게 현세를 초월할 것을 가르쳤다. 현세에 대한 지나친 부정은 과학기술에 주목할 여유를 없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자면 불교를 배척하면서 등장한 조선시대의 유교는 대단히 현실적 사상체계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교의 현실주의란 정치와 교육을 통한 사회개조 내지 새로운 이상사회를 내세운 것이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연구하며 이용하겠다는 그런 현실 인식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관료사회로 향하는 과정을 보이기는 했지만 고려사회는 본질적으로 귀족사회였고, 귀족사회의 고려 지배계층은 과학기술을 직접 담당하는 계급도 아니었고, 또 과학기술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조선사회로 들어가 양반, 중인, 상인, 천인으로 구성된 본격적인 신분제도가 자리잡으면서 지배층 양반의 관심에도 과학기술은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양반은 본질적으로 과거에 의해서 신분상승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 과거시험에는 과학기술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당연히 양반 관료층은 그들의 학문 수업에서 과학기술 분야를 置之度外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관치과학기술의 주요 분야를 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연히 그런 분야-천문학과 의학 등-에 종사하는 계층은 서서히 양반 아래의 별도 계급으로 성장해 자리잡았다.

 이 양반층 아래 계층으로 조선 전기 동안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이 바로 중인 계층이다. 그리고 그런 중인의 등장은 조선사회를 이웃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아주 특이한 사회구성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인층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천문학·수학·의학 등등 오늘날 과학기술 분야 종사자들이 중심이었지만, 여기에 조선 초부터 차별화되기 시작한 서얼 출신도 포함되었다. 또 법률이나 외국어 전공자들 역시 이 부류에 포함되었다. 말하자면 오늘날 전문직업으로 분류됨직한 분야가 중인층의 분야로 인정된 것이다.

 중국과 마찬가지 관치과학이었지만, 한국사에서의 과학기술 분야는 중요한 부분에서 중국과는 차별화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중국과 다른 사회발달을 거치면서 한국에서는 독특한 ‘기술 천시’와 ‘중인 의식’의 발달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조선사회가 유교화하면서 더욱 심해졌다고 생각된다.

 전통사회에서는 동·서 어디서나 과학기술이 크게 발달하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조선 초의 한국에서는 그런대로 놀라운 과학기술상의 성취를 이룩했다고 평가할 수가 있다. 특히 세종대에는 수많은 과학적 성취를 주목하게 되는데, 이미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역사 서술에서 측우기를 서양보다 2세기 앞서 발명한 조선 역사상의 일대 자랑이라 여겨왔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세종은 실로 수많은 과학기술 분야에서 뚜렷하게 성공을 보이고 있다. 널리 알려진 장영실의 물시계 자격루도 세종 때의 일이며, 여러 가지 해시계와 물시계 그리고 천문 기구 등이 발명되거나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이런 천문학상의 발달은 세종 24년(1442) 七政算의 완성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 밖에도≪鄕藥集成方≫으로 대표되는 의약학의 발달, 인쇄 기술과 화약 기술의 발달 등 많은 성과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오늘 우리가 하는 과학과 같은 성격의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간단히 답하기가 어렵다. 이들 가운데 일부 과학적 업적은 그 수준이 보기에 따라서는 당대 세계적이라 할만도 하다. 그러나 세종대의 과학은 그후 계승 발전 전개된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세종대에 발달하고는 그만인 것이다. 예를 들면 세종보다 1세기를 지난 중종 이후 명종 시기까지에는 대단한 학자들이 나와서 크게 활동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시기를 대표하는 李滉과 李珥 등 신유학의 대표적 학자의 삶과 학문 세계를 살펴 보면, 그들은 과학에 대해 거의 무관심했음을 알 수가 있다. 세종의 과학기술상의 성과는 새로 세운 왕조의 권위를 높이려는 정치적 노력의 일부였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새 왕조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려는 노력이 과학기술상의 발달도 가져왔던 셈이다. 그러나 일단 정통성이 확고해진 다음에는 과학기술 분야 같은 부분에 대한 국가적 관심은 상당 부분 사그러졌고, 그 때문에 조선왕조 중기에는 대표적 학자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도 없어졌고, 과학기술이 특히 발달하지도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중기 이후의 조선사회에서 과학기술은 더욱 천시되어 갔다. 일부 양반층이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 분야에 호기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조선 중기 이후의 과학기술은 “중인의 과학, 천인의 기술”이라 단적으로 특징지을 수도 있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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