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총설
  • 01권 한국사의 전개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6. 음악
  • 2) 한국음악사의 전개양상
  • (1) 고대음악사의 형성과 발전

(1) 고대음악사의 형성과 발전

 향악시대인 고대를 음악수용층의 관점에서 조명해 볼 때, 부여의 迎鼓나 고구려의 東盟 또는 穢의 舞天과 같은 國中大會에서 공연된 歌舞활동에서 볼 수 있듯이 백성과 지배자의 구분이 처음에는 뚜렷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왕족과 귀족층의 등장으로 인하여 음악수용층의 변화가 생겼다. 중국 北朝를 통한 고구려에서의 西域樂器 수용이나 백제에서 南朝를 통한 외래악기의 수용이 각국의 왕족과 귀족사회에서 이루어짐으로써, 그것은 음악수용층의 변화를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한민족의 음악적 특징을 지닌 향악이 고대음악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隋나라의 七部伎와 九部伎 그리고 당나라의 十部伎에 자국의 악사와 악공들을 파견하여 해외에서 국위를 선양할 수 있었다. 또한 백제·고구려·신라의 악사와 악생들이 구다라가쿠(百濟樂)·고마가쿠(高麗樂)·시라기가쿠(新羅樂)의 이름으로 三國樂을 고대 일본조정에 소개할 수 있었던 사실도 삼국 향악의 굳건한 기반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고대 향악의 형성과 전승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악사의 사회적 지위는 중세사회에서보다 비교적 높았다. 거문고를 창시한 왕산악은 고구려의 宰相이었고, 신라땅에 거문고를 전파하고 30여 곡을 창제한 옥보고는 6두품 출신의 沙湌 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신라 進興王(540∼575) 때 가야금을 전해준 가야국의 악사 우륵이 신라 17관등의 12관등 大奈麻의 법지와 계고 및 12관등의 大舍 만덕에게 노래와 춤 그리고 가야금을 가르쳤다. 옥보고의 제자 貴金先生의 琴道를 전수하기 위하여 南原에 파견한 신라왕족 출신 2관등의 伊湌 允興이 귀금선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술잔을 대접한 결과, 淸長과 安長이 귀금선생의 금도를 전승할 수 있었다.≪삼국사기≫樂志에 전하는 이런 모든 사실들은 악사의 사회적 지위가 고대사회에서 매우 높았음을 입증해주는 증거물이다.

 7세기 후반부터의 고대 후기에는 통일신라의 조정에 등장한 당나라의 俗樂에서 사용된 唐樂器와 唐樂調가 서서히 한반도에서 당악의 물줄기를 형성하였다.≪삼국사기≫악지와 고고학자료에 보이는 唐琵琶·唐觱篥·拍板·大鼓와 같은 당악기들이 그 실례이다. 그리고 唐俗樂에 사용된 28調 중에서 黃鍾調·般涉調·越調와 같은 당악조들이 三竹에서 사용된 사례도 통일신라조정에서 당악의 수용을 입증해주는 증거물이다. 이렇게 고대 후기의 당악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나, 그 갈래가 고대 후기의 향악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

 고대 후기 통일신라의 향악은 伽倻琴·거문고〔玄琴〕·鄕琵琶의 三絃과 大笒·中笒·小笒의 三竹에 의하여 고대 전기 삼국에서 형성된 향악의 확고한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삼현과 삼죽의 鄕樂器는 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의 향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향악기를 수용하여 고대 전기 신라 향악의 터전 위에 발전시킨 결과였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향악은 고대 후기에 이르러 서서히 등장한 당악의 물줄기에도 불구하고 고대 전기 향악의 전통을 전승하여 고대음악사의 대세를 유지시킨 갈래의 음악이다. 향악이 고대의 전후시기를 거치면서 고대음악사의 대세를 형성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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