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Ⅱ. 신석기문화
  • 2.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 3) 신석기시대의 유물
  • (1) 토기

가. 신석기시대 토기에 대한 논의

 토기는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만들어지고 쓰여진 것으로서 간석기(磨製石器)와 함께 신석기시대를 나타내는 지표유물로 여겨져 왔다. 우리 나라에서도 신석기시대부터 토기가 등장했으며, 그를 대표하는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빗살무늬토기에 앞서는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가 있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석기시대의 토기를 개관하기에 앞서 이들 토기가 알려지게 된 경위와 그간의 논의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처음으로 발굴·조사된 것은 1916년이며 그 결과는 1917년에 보고서로 나왔다. 그러나 여기에는 평안남도 용강 용반리와 대동강가의 미림리 및 고방산, 평양 사동 등과 황해도 해주 남산, 옹진 점암동, 은율 군량리, 장연 몽금포유적 등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구분되지 못한 채 소개되어 있다.544)鳥居龍藏,<平安南道·黃海道古蹟調査報告書>(≪大正五年度古蹟調査報告≫, 1917), 767∼850쪽. 당시에는 두 시기에 각각 해당하는 토기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들을「有紋土器(혹은 有紋厚手土器)」와 「無紋土器(혹은 無紋薄手土器)」로 나누었다. 이 가운데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토기는 물론 유문후수토기이다.

 유문토기라는 이름을 벗어나서 빗살무늬의 뜻인 「櫛文」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30년에 발표된 글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글의 원래 목적은 석기시대 문화의 전파와 토기무늬와의 관계를 밝혀 보려 한 것이었다.545)藤田亮策,<櫛目文樣土器の分布につきて>(≪靑丘學叢≫ 2, 1930). 즐목문토기란 이름은 櫛齒모양으로 평행해서 밀접한 이를 가진 것으로 토기면에 무늬를 인각했다고 보는 데서 유래하며, 독일에서 Kamm Keramik라고 부르는 것의 번역어이기도 하다고 정의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즐목문토기 및 석기문화는 단독으로 조선에서 발달한 것이 아니라 시베리아·스칸디나비아·알래스카 및 북미주를 포함하는 歐亞美 3대륙의 북단을 연락하는 일종의 문화연쇄로서 「북방문화」의 한 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조선의 즐문토기문화 혹은 석기시대 문화가 단독으로 발달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 문화의 기원지가 어느 계통인가(당시에는 시베리아) 하는 점과, 이를 만든 인종 혹은 주민집단, 그리고 전파루트를 찾는 것이 중요한 관심거리가 된다. 결국 계통을 추구하는 연구는 언제나 위의 세 가지 주제에로 귀결된다. 그리고 위의 글은 우리 나라 근 100여년의 신석기연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것 가운데 하나인 만큼, 이 이후로 한국의 빗살무늬토기에 대한 논의는 위의 주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갔다. 요컨대 한국 신석기문화의 시베리아기원설이 뿌리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오산리유적546)서울大博物館,≪鰲山里遺蹟≫ Ⅰ·Ⅱ·Ⅲ(1984·1985·1988).의 발굴은 그 동안 커다란 영향력을 끼쳐 왔던 시베리아기원설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우리 나라의 빗살무늬토기와 북구의 캄케라믹은 구별된다고 하는 주장들547)橫山將三郞,<釜山府絶影島東三洞貝塚報告>(≪史前學雜誌≫ 5-4, 1933), 1∼48쪽.
三上次男,<朝鮮における有文土器の分布とその文化の擴がりについて>(≪朝鮮學報≫ 14, 1959), 309∼321쪽.
有光敎一,≪朝鮮櫛目文樣土器の硏究≫(1962), 1∼48쪽.
이 있었으며, 동삼동과 한강 주위의 신석기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가지고 각각 한국의 신석기문화를 연구한 경우548)Sample, L. L., Tongsamdong : A Contribution to Korean Neolithic Culture History, Arctic Anthropology 11-2, 1974, p. 110.
Nelson, S. M., Han River Chulmuntogi, 1975, pp. 70∼79.
도 양자의 관련성을 강하게 부정하였다. 이들은 한국의 빗살무늬토기가 시베리아의 것과 시문법도 다르며 토착적인 요소가 많아 지역적인 발달형식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동삼동발굴로 인해 빗살무늬토기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덧무늬토기의 존재가 강하게 부각된 것도 이러한 주장을 재고하는 계기를 가져다 주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산리유적에서 얻게 된 일련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값은 우리 나라의 신석기의 개시연대와 전파관계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바꾸도록 하였다. 오산리유적은 대략 기원전 6000년 무렵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연대값을 가지고 연대가 더 내려가는 시베리아로부터의 기원설을 주장하기는 곤란하였던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오자 남해안지방의 조개더미유적에서 빗살무늬토기보다 더 이른 시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덧무늬토기들이 잇따라 출토되었고, 마침내 많은 관심이 덧무늬토기에 관한 문제 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연구의 향방은 여전히 전통 깊은 것으로서 예의 기원과 전파문제가 덧무늬토기에도 적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를 또다시 논의한다는 것은 연구자가 의식하든 못하든 덧무늬토기를 빗살무늬토기와 별개의 것으로 다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처음부터 그러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우리 나라에서 덧무늬토기는 비교적 일찍부터 드러나기 시작했으나 처음부터 색다른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니다. 1930년 동삼동의 발굴에서는 하나의 무늬요소를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새김무늬는 沈刻式으로, 덧무늬는 隆起式으로 나뉘어진다고 보았으며, 혹은 덧무늬토기를 紐線文土器라고 하여 여러 종류의 토기무늬 가운데 하나로 보았다.549)橫山將三郞, 앞의 글, 23쪽. 대동강가의 청호리유적550)笠原烏丸,<櫛目文土器を發見せる北鮮淸湖里遺蹟について>(≪人類學雜誌≫51-5, 1936), 183∼197쪽.에서도 덧무늬토기가 나왔으나 이들 역시 별다른 취급은 받지 않았다. 광복 후 북한은 1956년 금탄리유적을 발굴하였으며551)김용간,≪금탄리 원시유적 발굴보고≫(1964). 여기에서도 덧무늬토기 여러 개체가 나왔으나 주목되지 않았다.

 덧무늬토기가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 동삼동 및 남해도서지방에서 잇따라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 덧무늬토기를 둘러싼 논의가 일어났는데 주로 덧무늬토기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러한 토기를 만든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인가 아닌가, 등에 집중되어 있다.

 덧무늬토기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고찰에는 주변지역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남해안지방의 덧무늬토기보다 연대가 더 올라가는 유적은 일본에 많이 분포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 나라의 융기문토기가 규슈지방의 토도로키(轟)식토기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552)廣瀨雄一,<韓國隆起文土器論>(≪異貌≫ 11, 1984).
최근에는 토도로키토기와 우리 나라의 덧무늬토기가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토도로키보다 연대가 올라가는 일본 最古의 덧무늬토기가 시기·문화적으로 우리 나라의 것과 더 유사하다고 본 견해가 나왔다.
李東注,≪韓國 先史時代 南海岸 有文土器硏究≫(東亞大 博士學位論文, 1996) 참조.
한편, 아무르강유역의 덧무늬토기에서 기원했다고 하는 견해553)鄭澄元,<中國東北地方의 隆起文土器>(≪韓國考古學報≫ 26, 1991), 5∼35쪽.도 있다. 또 다른 경우는 중국 동북지방으로부터 남해안지방까지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보는 가운데 요동지방의 신석기문화를 우리 나라 신석기의 기준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554)宮本一夫,<中國東北地方における先史土器の編年と地域性>(≪史林≫ 68-2, 1985). 그리고 한·일 양국의 토기를 철저히 연구하기 전에 속단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취하면서555)任孝宰,<新石器時代의 韓·日文化交流>(≪韓國史論≫16, 國史編纂委員會, 1986), 1∼29쪽. 아울러 중국 동북지방의 신석기토기들과 우리 나라 토기들의 관련성에 대해서 주목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이전의 막연한 시베리아기원설과는 달리, 한국과 시베리아(알타이)지역에서의 빗살무늬토기·뼈작살·동쪽으로 펴묻기(東枕伸展葬)·돌톱(植刃尖頭器) 등 여러 문화요소에서 찾아지는 유사성에 주목하여 우리 나라 빗살무늬토기의 기원지가 알타이지역 일대를 포함하는 바이칼호 주변이라고 추정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556)韓永熙,<유물로 본 Altai와 한반도>(≪알타이문명전≫, 국립중앙박물관, 1995), 186∼189쪽.

 이러한 고찰과 주장들을 통해 우리 나라의 신석기연구가 점차 달라져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출자와 기원에 대한 관심은 변함없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신석기문화를 선사시대 동아시아의 전체 속에서 조망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기원을 빨리 단정하기보다는 문화의 상호 관련성을 추구하는 연구로 이어져 가고 있다. 앞으로 우리 나라 및 주변지역의 신석기문화가 유물의 단순비교에서 벗어나 심도있게 연구된다면 그 주제도 기원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각 지역의 자연환경이라든가 당시의 주민 및 생활상 등에 대해서도 종합적으로 파악되어 가리라고 본다.

 덧무늬토기와 빗살무늬토기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의문에는 아직 무어라 답하기 어렵다. 현재로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덧무늬토기에도 빗살무늬토기의 무늬새김 양식이 들어 있으며, 이와 공반되는 석기 및 석기제작수법·뼈연모 등을 살펴볼 때 양자 사이에 이질적이거나 비약적인 요소란 그다지 찾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최근 우리 나라 남해안지방의 조개더미유적에서 덧무늬토기 또는 빗살무늬토기를 공반한 사람뼈화석이 자주 출토되고 있으므로 이들을 이웃한 중국·연해주지방 및 일본의 사람뼈 자료들과 비교하고, 언어학·언어연대학 등 인접학문들을 잘 활용한다면 원래 모습에 근접하는 像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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