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Ⅱ. 신석기문화
  • 3. 신석기시대의 생업과 사회
  • 1) 생업
  • (2) 농경과 목축

가. 농경

 현재까지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재배식물유체로는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2지구 2호 주거지 내부 벽가에서 출토된 피 혹은 조로 보이는 탄화된 곡물680)도유호·황기덕,≪지탑리 원시유적 발굴보고≫(과학원출판사, 1963).과, 황해도 봉산군 마산리 7호 주거지와 평양 남경 31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탄화된 조681)김용간·석광준,≪남경유적에 관한 연구≫(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4).
변사성·고영남,<마산리유적의 신석기시대 집자리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 4, 1989), 18쪽.
가 있다. 지탑리유적과 마산리 7호 주거지는 기원전 4천년기로 편년되기 때문에 중서부지방에서는 늦어도 신석기시대의 중기부터 조 중심의 밭농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유물의 조합에서 농경도구의 비중이 크지 않아 농경이 전체 생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는 할 수 없고 한반도의 신석기시대는 일본의 죠몬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수렵채집경제의 연속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先즐문토기문화는 수렵·어로 중심의 문화로 농경이 있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북한에서는 신석기 초기단계부터 농경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괭이농사에서 보습농사로의 발전단계를 상정하고 있다.682)서국태, 앞의 글, 79∼90쪽.
남한의 한 연구에서도 뒤지개농사→괭이농사→보습농사로의 단계를 설정하였으나 괭이농사는 채집경제단계, 보습농사는 농경단계로 간주하고 있다(길경택, <한국선사시대의 농경과 농구의 발달에 관한 연구>,≪古文化≫27, 韓國大學博物館協會, 1985).
즉 서포항 1·2기, 궁산문화 1기에 보이는 괭이·뒤지개·연석의 존재를 근거로 화전과 괭이농사가 있었다고 보고 지탑리 2지구가 속하는 궁산문화 2기부터 보습농사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지탑리에서 출토된 「돌보습」은 크기·생김새·무게 등으로 보아 쟁기의 초기형태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돌보습」의 용도에 대해서는 괭이·가래·삽 등 여러 견해가 있어 보습농사단계의 설정이 불확실하며683)安承模,<遼西地方의 先史時代 石製耕具>(≪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Ⅰ, 一志社, 1987), 721쪽.「보습」은 오히려 堀地棒에서 발전한 일종의 외날따비일 가능성이 크다. 초기의 괭이농사도 재배식물유체의 발견이 없는 한 가설단계에 머무를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의 벼농사는 청동기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보는 학설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벼농사가 신석기시대 후기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제시되기 시작한 것은 영산강유역의 화분분석결과와 경기도 우도패총에서 출토된 토기 바닥에 인디카로 추정되는 볍씨자국이 발견되고서부터이다. 그러나 전자는 연대추정에 오류가 있고 후자도 신석기시대 토기가 아니라는 지적이 있었다.684)安承模,<稻作과 稻作文化의 出現>(≪한국짚문화≫, 국립민속박물관, 1991), 139쪽. 그런데 최근 들어서 신석기시대 후기인 기원전 2천년경 전후에 속한다는 볍씨들이 한강 하류 김포와 일산의 토탄층에서 잇따라 발견되어 신석기 후기 도작농경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김포 가현리의 토탄층에서는 쌀과 조의 탄화물이 검출되었으며 토탄 자체는 4020±25BP의 연대가 얻어졌다. 일산지구의 성저리(1지역)와 가와지(2지역)에서도 4070±80BP·4330±80BP의 연대를 가진 토탄층에서 볍씨가 출토되었는데, 성저리 볍씨는 길이 6.45∼7.18㎜, 폭 2.92∼3.24㎜, 장폭비 1.99∼2.33이며, 가와지의 볍씨는 길이 6.6∼7.4㎜, 폭 2.5∼3.0㎜, 장폭비 평균 2.53의 크기를 보여준다.685)한국선사문화연구소·경기도,≪일산새도시개발지역 학술조사보고 1≫(1992).
박태식·이융조,<高陽 家瓦地 1地區出土 벼 낟알들과 韓國先史時代 벼농사>(≪農業科學論文集≫ 37-2, 농업진흥청 농사시험연구소, 1995), 1∼12쪽.
이들 볍씨들은 전형적인 자포니카도 있으나 그 중에는 현재 재배되고 있는 벼보다는 크기가 약간 작고 세장하여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단립형의 벼와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들도 있다. 한편 낙동강 하류역의 김해 농소리패총에서 출토된 말기 즐문토기의 胎土에서 벼의 식물규소체가 검출되기도 하였다.686)郭鍾喆 外,<新石器時代 土器胎土에서 검출된 벼의 plant-opal>(≪韓國考古學報≫ 32, 1995), 149∼162쪽. 그러나 이들 볍씨와 토기가 출토된 층위와 연대에 대하여 회의적 견해를 보이는 고고학자들도 있기 때문에 신석기시대 벼농사의 존재 여부는 앞으로도 계속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주제이다.687)안승모,<재배식물로 본 동아시아의 신석기시대 농경>(≪東아시아의 新石器文化≫, 文化財硏究所, 1994), 15∼17쪽.
―――,<韓國 先史農耕硏究의 成果와 課題>(≪先史와 古代≫ 7, 韓國古代學會, 1996),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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