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Ⅱ. 신석기문화
  • 4. 주변지역 신석기문화와의 비교
  • 2) 동아시아 신석기문화의 이동
  • (1) 신석기문화의 이동

(1) 신석기문화의 이동

 두 지역간 문화의 전파경로를 추적해 보는데 비교연구의 대상으로 가장 크게 부각되는 것이 토기이다. 토기는 만들기도 쉬운 반면, 구운 온도가 높지 않아 깨지기도 쉬우므로 비교적 사용기간이 짧아 다른 재질이나 다른 용도의 유물보다는 유적발굴조사에서 항상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또한 제작자의 의도가 보다 많이 반영되고 용도에 따른 기형변화가 아직 충분히 분화되지 않은 이른 시기일수록 제작전통이 보다 많이 남아 있게 된다. 한편 밖으로부터 더 나은 새로운 토기제작기술이 유입되면 사용기간은 짧아지게 되고 제작빈도는 반비례하여 잦아지게 되니까 곧 제작에 반영되는, 앞서 이야기한 제작자의 전통이 오래 남는다는 속성에 상반되는 모습도 보이게 된다. 이러한 점에 의해 토기는 신석기시대에 있어서 지역에 따른 문화접변과 한 지역의 시대편년에 가장 큰 자료가 된다.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편년은 각 지역마다 큰 차이점이 보이지만 주변지역의 연대관과 비교하여 볼 때 그 개시연대는 BC10,000년 이상으로 소급된다.787)韓永熙,<新石器時代 中·西部地方 土器文化의 再認識>(≪韓國의 農耕文化≫ 5, 京畿大 博物館, 1996), 104∼141쪽. 한반도 최초의 토기문화로는 제주 高山里788)李淸圭·高才元,<高山里遺蹟과 石器遺物>(≪濟州 新石器文化의 源流≫-1995年度 韓國新石器硏究會 發表要旨-, 1995), 6∼26쪽.와 청도 梧津里유적789)釜山大博物館,≪淸道 梧津里岩蔭遺蹟≫(1994), 210∼216쪽.에서 출토된 민무늬토기가 덧무늬(隆起文)토기에 앞서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아직 출토된 예가 많지 않아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남해안 일대의 해안가와 도서지역, 웅기 西浦項, 양양 鰲山里, 울산 新岩里 등지를 중심으로 하는 동해안에서 주로 출토되는 덧무늬토기가 가장 이른 시기의 확실한 토기양식으로 여겨진다. 덧무늬토기는 단양 상시동굴유적790)홍현선,<상시 3바위그늘의 문화연구>(延世大 碩士學位論文, 1987).과 거창 壬佛里유적791)安春培,<居昌 壬佛里遺蹟 發掘進展報告>(≪제12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발표요지≫, 1988), 135∼148쪽.에서도 출토되는 등 내륙지방에서의 출토사례도 증가하고 있어 앞으로의 조사에서 분포범위가 더욱 넓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덧무늬토기는 C14연대의 분석에서 그 상한이 BC5,000년 무렵인 것으로 밝혀져 있으나 층위를 갖추어 출토되는 오산리 I식토기와의 형식학적 비교에서 10,000년 전까지 소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한편 임불리유적에서는 덧무늬토기에 잔석기(細石器)들이 함께 출토되어 그 상한연대는 더욱더 올라갈 수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덧무늬토기 다음 단계의 토기로는 한반도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가 전국적인 범위로 출토된다. 이것은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문화영역을 5개로 구분하는 기본자료가 되는데 서북지방에서는 중국 동북지방에 넓게 분포하는 之字文深鉢形토기를 비롯해 요하 이서지방의 요동반도와 유사한 토기양식을 보이는 新岩里 I·II식토기가 출토되고 있으며 동북지방에서는 아무르중·하류역과 연해주 남부해안지방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납작바닥의 심발형토기문화권을 이루고 있다. 한편 중·서부지방에서는 尖底長卵形의 岩寺洞 I·II·III식, 金灘里 I·II식, 內坪式, 矢島式토기 등이 대표적 토기양식이 되고 있으며, 남부지방에서는 덧무늬토기에 이어 영선동식토기, 남해안식의 둥근바닥빗살무늬토기, 겹아가리(二重口緣)토기가 나타난다.

 위에 열거한 신석기시대의 한반도출토 토기 가운데 주변지역과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토기로는 중국 동북지방, 아무르유역과 연해주 그리고 일본열도의 혼슈·규슈지방과의 관련을 보여주는 덧무늬토기, 그리고 규슈지방과 덧무늬토기 이래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는 영선동식토기(押引文토기), 남해안식 빗살무늬토기(沈線文토기)가 있다.

 일본열도에서의 덧무늬토기는 홋카이도(北海道)를 제외한 혼슈와 시코쿠(四國) 그리고 규슈에 넓게 분포되고 있다.792)橫浜市歷史博物館,≪繩文時代初創期≫(1996), 7쪽.
小野昭 外,≪圖解日本の人類遺蹟≫(東京大學出版會, 1992), 54쪽.
혼슈에서는 니이가타(新瀉)縣 코세가자와(小瀨が澤)洞窟遺蹟, 후쿠이(福井)縣 토리하마(鳥浜)貝塚 등 해안가와 내륙지방에서 고루 발견되고 있으며 규슈지역에서는 해안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한반도와 일본지역에서의 덧무늬토기의 출토양상으로 볼 때 이것은 동해를 중심으로 하여 그 양안에 고루 분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북쪽 내륙지방에서의 덧무늬토기는 송화강의 북쪽 지류인 嫩江과 洮兒河流域·아무르중류역의 昻昻溪地區, 鎭賚縣, 安廣縣, 洮安縣, Novopetrovka, Gromatukha, 연해주 우수리강 상류의 Chanka호 북쪽에 위치하는 新開流遺蹟 등이 알려져 있다.

 이상 세 지역의 덧무늬토기는 덧무늬의 시문방법과 무늬내용에서 유사하고 여기에 口緣部孔列, 豆粒文手法의 토기가 공반되고 있으며 석기문화에서도 잔석기문화라는 공통인자를 갖고 있다. 이 토기양식이 동해를 중심으로 해서 그 주변에 넓게 퍼지는 분포의 특징으로 볼 때 각기 해당지역에서의 자체 발생보다는 어느 한 지역에서 발생하여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을 가능성을 더 크게 보여준다. 이제 각 지역별로 연대관을 살펴봄으로써 이 토기의 기원지를 추적해 보도록 한다.

 규슈 나가사키(長崎)縣의 泉福寺와 福井洞窟, 에히메(愛媛)縣의 上黑岩岩蔭遺蹟 등에서는 층위적 발굴에 의해 확인된 덧무늬토기층에서 BP12,000년 전후의 C14연대가 얻어졌으며 남규슈지방의 鹿兒島市 婦除山遺蹟 등에서는 화산재층의 연대에 의해 BP11,000년 전으로 확인된 薩摩화산재층 아래에서 無文·豆粒文·隆帶文·隆線文·微隆起線文토기 등이 확인되어 일본지역의 덧무늬토기가 대체로 BP12,000년경에는 존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무르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지역 토기문화의 출현시기는 30년 전까지만 해도 BC5,000년경인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최근 15년간의 고고학적 조사에서 BP12,000년을 상회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고 덧무늬토기로 대표되는 Novopetrovkaya 2호 주거지는 BP11,000∼9,000년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이제까지의 자료와 정보에 따르면 아무르강유역이 동부시베리아 초창기 토기문화의 중심지가 되고 있으며 최초의 토기제작자는 Osivskaya문화의 담당자로 그 연대는 BC13,000∼10.000년경에 편년된다.

 한반도의 덧무늬토기는 전술한 대로 그 상한이 10,000년 전으로 소급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나 현재의 자료로는 BC5,000년경인 것으로 의견이 모여지고 있다. 특히 이것이 가장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는 남해안지역의 패총유적에서는 일본의 동굴유적과는 달리 덧무늬토기와 함께 豆粒文·無文·口緣孔列文 등이 층위의 구분없이 섞여서 출토되고 있다. 이렇게 C14연대가 BC5,000년 이하로 나오고 서로 다른 문양의 토기들이 혼합상태로 출토되고 있는 것은 남해안 덧무늬토기의 규슈전래설을 주장케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거창 임불리와 제주 고산리유적에서 잔석기와 덧무늬토기가 공반되는 층위의 출현 가능성이 높아졌고 오산리 B지구에서 BC10,000년에 해당하는 C14연대도 얻어지고 있어 한반도에서의 덧무늬토기 출현시기의 연대가 아무르강유역과 일본지역의 그것과 비슷한 시기로 상향조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와 같이 덧무늬토기를 중심으로 해서 문화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세 지역은 비슷한 시기에 편년된다. 그렇다면 그 문화의 기원지가 어디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한다. 한국과 일본의 고고학자나 유전인자의 연구자에 따르면 두 나라 민족의 기원은 자체 기원설보다는 북방기원설에 더 큰 비중을 둔 것으로 판단된다. 북방계문화의 일본 쪽으로의 남하는 바이칼→아무르강→사할린→홋카이도→혼슈 쪽으로의 유입설, 아무르→송화강→우수리강→연해주→북륙지방을 통한 혼슈유입설, 그리고 한반도를 통한 규슈유입설 등이 상정되어 있다. 이러한 북방계문화의 일본유입은 GM유전자를 비롯한 여러 유전자의 분석을 통해 볼 때 그 원류를 바이칼호 주변에 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북방계문화의 한반도로의 남하는 내몽고→발해만→서해를 통한 서부지방으로의 루트와 아무르→송화강→우수리강→연해주→동해를 통한 동·남부지방으로의 루트가 알려져 있다. 이러한 문화전파의 루트 그리고 한·일 두 지역에서의 덧무늬토기의 분포로 볼 때 이 토기는 아무르중류역의 기원지로부터 각각 두번째 루트를 통해 동해를 중심으로 하는 한·일 두 나라 일대에 널리 분포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추정은 최근 발표된 아무르유역의 고고학적 성과 그리고 일본의 홋카이도지역에서 아직 덧무늬토기유적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도 뒷받침된다 하겠다.793)덧무늬토기의 분포지역·연대에 대해서는 韓永熙, 앞의 글, 133∼135쪽 참조.

 시베리아지역에서는 후기 구석기인 30,000년경부터 石刃기법의 석기제작기술이 발달하여 신석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사용된다. 이 기법은 동아시아 일대로 확산되어 시베리아를 비롯해 중국 동북지방, 한반도, 사할린과 홋카이도지역을 포함하는 일본 전역에서 출토의 예가 보고되어 있고 그 연대는 대체로 15,000년 전쯤인 것으로 밝혀졌다.794)木村英明,<北海道の石刃鏃文化と東北アジアの文化>(≪季刊考古學≫38, 1992), 43∼47쪽. 이러한 수법으로 만든 石刃鏃은 동아시아 각지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토기와 함께 출토되는데 노보페트로후카유적을 중심으로 시원되는 덧무늬토기문화는 세루게네후카·오시노붜에호·구로마도우·콘돈·新開流 등 아무르하류역과 우수리강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으로 확산된다. 노보페트로후카덧무늬토기는 진흙띠를 만들어 붙이는 貼付덧무늬토기(진흙띠의 굵기에 따라 太線덧무늬토기와 細線덧무늬토기로 구분된다)와 판상의 整面具를 가로로 이어 눌러 당길 때 자연적으로 양쪽에 돋게 되는 微덧무늬토기로 구분된다. 송눈평원지대와 아무르중류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첩부덧무늬토기와 미덧무늬토기는 시기를 달리하여 아무르하류역→송화강→우수리강→연해주지방을 경유하여 해안가를 따라 한반도 동해안지방으로 그리고 동해의 해류를 따라 일본열도의 북륙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해역으로 전파되어 내륙지방으로 확산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이 덧무늬토기가 첩부덧무늬토기와 미덧무늬토기로 구분되는 것은 일본과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나 한반도에서는 대부분이 융기선문토기인데 반해 일본지역에서는 한 토기에 융기선문과 微덧무늬가 같이 베풀어져 있는 토기 외에 미덧무늬가 단독으로 들어 있는 토기가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특히 규슈지방에서는 繩文전기 前半토기의 대표적 양식인 토도로키식(轟式)토기가 미덧무늬토기에 기본을 두고 있어 두 지역 덧무늬토기의 지역차를 뚜렷이 보여준다.

 과거 한반도와 일본열도 덧무늬토기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할 때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덧무늬토기가 출토되는 규슈지역의 유적에서 얻어진 C14연대를 근거로 해서 덧무늬토기가 규슈에서 한반도 남해안으로 북상 전파되었다는 견해도 있었고795)廣瀨雄一,<韓國隆起文土器の系譜と年代>(≪異貌≫12, 共同體硏究會, 1986), 18쪽. 거꾸로 화산재에 의한 규슈지역 주민이 절멸된 뒤 한반도로부터 남하 전래되었다는 견해도 있었다.796)甲元眞之,<日本の古代文化と朝鮮半島>(≪日本人の起源≫, 小學館, 1986), 109∼113쪽. 그러나 아무르중류역·한반도·일본열도의 덧무늬토기를 살펴본 결과에 따르면 이 토기가 아무르중류역에서 시원되어 연해주를 경유해서 따로따로 두 지역으로 내려가 정착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다만 한반도에는 두립문·구멍무늬(孔列文) 일부 공반관계에 있는 첩부덧무늬토기가 동해안지방과 남해안지방에 정착한 후 한반도내의 중·서부지방계 토기인 尖底半卵形빗살무늬토기의 영향에 의해 침선문계빗살무늬토기로 변화되기까지 오랜 기간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되며 일본열도에서는 첩부덧무늬토기가 전래된 후 미덧무늬가 다시 들어와 공존하였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첩부덧무늬토기가 없어지고 미덧무늬토기만이 존재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확대보기
팝업창 닫기

 위에서 보면 한반도 남해안에서 덧무늬토기가 만들어질 때 같은 시기 규슈에서는 덧무늬에서 條痕文에 의한 미융기선문을 특징으로 하는 뾰족·둥근·납작바닥의 깊은바리형(深鉢形)토기의 토도로키식토기문화로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앞서 언급한 문화유입단계의 생략과정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보여지나 그 밖에 두 지역 주민의 토기제작 및 문양시문의 방법에 있어서의 선호도에 더 큰 까닭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시기 두 지역의 토기문화는 근본적으로 독자적인 지역성을 바탕으로 생성·발전해 나갔다고 보는 것이 현재의 고고학적 자료로서는 보다 타당한 결론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러나 두 지역의 주민은 북방어로민에 뿌리를 둔 주민으로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공동어로구역인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공통의 문화권으로 설정될 만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음이 두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상에서 밝혀진다. 이러한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로는 두 지역에서 출토되는 이음식낚시, 뼈작살, 植刃石器의 한 부분인 石鋸와 돌작살(石銛), 조가비가면(貝面), Scraper류석기, 土製멧돼지조각품, 조가비팔찌(貝輪) 등이 있다.797)島津義昭,<日韓の文物交流>(≪季刊考古學≫38, 雄山閣出版, 1992), 54∼58쪽. 한편 남해안의 각 유적에서 출토되는 돌살촉(石鏃) 등의 재료인 黑曜石은 규슈 佐賀縣의 腰岳産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며 연대도패총에서 출토된 石匙와 조흔문에 의한 미덧무늬가 베풀어진 토도로키식토기 그리고 울산 신암리와 통영 연대도패총에서 출토된 몸통부에 段을 갖는 토도로키 B식토기는 규슈지역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798)李相均,<繩文前期前半期における轟B式土器群の樣相>(≪東京大學文學部 考古學硏究室 硏究紀要≫12, 1994), 157∼158쪽. 그러나 여기에 보이는 규슈계유물은 남해안주민의 문화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 있어 두 지역간의 교역관계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부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