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Ⅰ. 청동기문화
  • 3. 청동기시대의 사회와 경제
  • 2) 사회
  • (1) 사회구성

가. 청동기시대 사회구성 복원상의 문제점

 우리 나라 고고학계의 통상적인 시대구분에 따르면, 신석기시대는 바로 櫛文土器文化(빗살무늬토기문화)의 시기이며 따라서 즐문토기문화의 다음에 나타나는 시기부터가 청동기시대가 되고 이러한 청동기시대는 그 안에 철기가 등장하여 확산되면서 初期鐵器時代로 넘어간다고 한다.

 청동기시대의 연대에 대하여는 다소의 견해차는 있지만 대체로 신석기시대의 즐문토기문화가 끝나가는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한 때로부터 철기가 들어오는 기원전 300년경을 전후한 시기까지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다시 대체로 청동유물 자체의 형식분류를 통하여 전후 두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전기는 소위 遼寧式銅劍을 표지유물로 하는 청동기조합의 시기이며, 후기는 細形銅劍 또는 韓國式銅劍을 표지유물로 하는 청동기 조합의 시기에 해당한다.0448)金元龍,≪韓國考古學槪說≫(一志社, 1973), 60∼118쪽.
尹武炳,≪韓國靑銅器文化硏究≫(藝耕出版社, 1987), 59∼123쪽.
李靑圭,<광복후 남북한 청동기시대의 연구성과>(≪韓國考古學報≫21, 韓國考古學會, 1988), 63∼84쪽.

 전기단계의 요령식청동기 조합은 그 분포의 중심이 현 중국의 요령성지방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요서와 만주 및 한반도를 그 문화권에 포함시키고 있다.0449)박진욱 외, ≪비파형단검문화에 관한 연구≫(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7). 이에 비하여 소위 한국식동검과 그 유물조합은 분포가 한반도 안에 국한되어 나타나고 있다.0450)尹武炳,<韓國靑銅遺物의 硏究>(≪白山學報≫12, 1972).

 이렇게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는 청동유물의 출현 및 사용과 그 형식 변천을 기준으로 하여 정립되기는 하였지만 실제 문화의 내용에 있어서는 그 양상이 매우 복잡하다.

 따라서 청동유물을 기준으로 하여 설정된 청동기시대의 사회구성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청동기시대로 설정된 전기간 동안에 나타난 다양한 문화양태와 그들의 변화과정에 대한 전반적이고 총체적인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청동기시대의 개념이란 ‘청동기의 출현 및 사용과 그에 따른 청동기 기술의 수립과 그러한 청동기술의 영향으로 전개되는 문화형성 과정’이라는 단순하고 일률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선사시대 가운데서 청동기시대로 설정된 기간에 포함된 문화의 내용은 청동기술과 그에 따르는 문화형성 과정뿐만 아니라, 그 유래와 성격, 그리고 담당민족이 서로 다른 여러 갈래의 문화전통과 사회유형이 혼재하고 있으며, 그러한 사회유형·문화전통·담당민족의 차이에 따라서 청동기문화의 성격과 수준과 양상이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한국의 선사시대에는 청동기시대라는 시기가 있었으며, 그러한 청동기시대에 살았던 청동기인들이 각종 청동유물을 사용하였고, 그릇으로 무문토기를 사용하였고 고인돌과 석관묘 등의 무덤을 축조하였으며 한반도와 요령지방을 무대로 稻作을 위시한 농경생활을 영위하였다”는 이해방식으로는 청동기시대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정상적인 이해가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실존하지도 않았던 독자적인 집단으로의 ‘청동기인’을 상정하여서 그들의 생활에 대한 비실제적이고 일반화된 이야기를 전개하기보다는, 먼저 청동기시대로 설정된 기간에 포함되는 여러 민족과 사회유형과 문화전통을 실제의 역사적인 상황에 맞게 분류 정돈해서 그 각각의 성격과 사회문화적인 한계를 구분하고, 해당 문화내용을 복원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 그러한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다루어 소위 청동기시대의 사회상 전반에 대한 추론을 도출해야만 현재 청동기시대로 설정한 기간의 사회구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아무튼 현재 통용되고 있는 시대구분에 따르면,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하여 바로 즐문토기문화와 함께 끝이나고 그 다음부터가 청동기시대의 시작이고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하여 그 안에 철기가 등장하여 확산되면서 초기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러한 청동기시대의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화내용으로는 신석기 즐문토기문화의 첨저빗살문토기와는 다른 적갈색평저무문토기의 사용, 각종 발달한 마제석기의 성용, 도작을 포함한 알곡농사의 실시, 정착 취락생활, 무덤으로서의 지석묘와 석관묘 등의 구축, 그리고 청동검과 거울 등을 포함한 각종 청동유물의 사용 등이 열거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문화의 내용을 포함하는 청동기시대라는 기간은 이전의 신석기시대의 즐문토기문화가 하나의 사회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문화로 볼 수 있는 반면에 서로 문화전통과 사회성격과 그 유래가 다른 최소한 둘 이상의 민족집단의 문화를 포함하고 있음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우선 이러한 민족집단들을 구분하여 각 집단의 고고학적 문화내용을 정돈하여 각각의 사회구성을 복원한 후에 청동기시대 전반의 사회상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청동기시대 안에 존재하였던 독립적인 사회집단으로서 지금까지 밝혀진 것으로는 소위 無文土器文化와 遼寧靑銅文化, 그리고 韓國式靑銅文化를 설정할 수 있다.

 무문토기문화는 한반도를 그 문화권의 중심지대로 하고 도작을 비롯한 알곡농경을 주생계로 하였고, 한반도의 평야지대나 구릉지대나 강변퇴적지대에 정착취락을 이룩하였다. 또 지석묘를 주 묘제로 사용하였고, 독특한 평저의 무문토기를 다양하게 제작 사용하였으며, 전무후무하게 각종의 마제석기를 성용하였다.0451)盧爀眞,<時代區分에 대한 一見解>(≪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記念論叢≫Ⅰ, 一志社, 1987), 761∼762쪽.

 한편 요령청동문화란 북한에서는 古朝鮮의 前期文化로 다루어져 왔던 문화로서 지금의 중국 요령반도를 그 문화권의 중심지대로 하여 석관묘나 적석석관묘를 주 묘제로 사용하였고, 각종의 기마용 무기와 마구 부속품을 포함하여 강력한 청동제의 무기를 비롯한 청동이기를 사용하였으며 토기도 일반 무문토기와는 구분되는 소위 미송리식단지라는 독특한 형식의 것을 사용하였던 문화를 지칭한다.0452)盧爀眞, 위의 글, 761∼762쪽. 이 문화의 사회는 잡곡농경과 유목을 혼합실시하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0453)박영초,≪조선인민경제사(원시-고대편)≫(사회과학출판사, 1988), 97∼98쪽.

 한편 한국식청동문화란 무문토기문화와 요령청동문화가 한반도안에서 接變하여 이룩한 독자적인 청동문화로서 요령식동검과 각종 청동기를 발전시킨 세련된 청동기류와 역시 요령지방의 석관묘 전통을 이어 받은 석관묘 묘제와 여기서 발전한 토광묘제, 그리고 토기 일부에서 소위 요령식의 미송리식 전통을 이어 받은 黑陶長頸壺와 粘土帶土器 등에서 요령청동문화의 계승을 보이고 있다. 경기도 양주군 수석리0454)金元龍,<水石里先史時代聚落住居址調査報告>(≪美術資料≫11, 1966), 1∼16쪽.와 서울시 응봉동,0455)橫山長三郞,<京城郊外應峰山遺跡報告>(≪史前學雜誌≫2-5, 1930). 그리고 대구직할시 연암산0456)尹容鎭,<琴湖江流域의 先史遺跡硏究(1)>(≪古文化≫5·6, 韓國大學博物館協會, 1969). 등지에서 처럼 한반도의 평안도 이남의 지역에서 정착 취락을 이룩하여 도작을 비롯한 정착 알곡농경을 실시하고 적갈색심발형토기와 같은 무문토기문화의 토기와 半月形石刀와 有溝石斧0457)盧爀眞,<有溝石斧遺跡의 性格考察>(≪論文集≫, 翰林大, 1983), 17∼28쪽. 등의 마제석기를 채용하고 있는 점 등에서 또한 한반도의 무문토기문화를 수용하고 있는 문화이다.0458)盧爀眞, 앞의 글(1987), 765쪽.
―――,<韓國의 先史美術>(≪韓國美術史의 現況≫, 翰林科學院叢書 7, 藝耕出版社, 1992), 14∼15쪽.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소위 청동기시대의 사회구성을 복원하려면 먼저 무문토기문화와 요령청동문화의 사회구성을 먼저 복원하고 나아가서 두 사회의 접변으로 나타난 복합문화인 한국식청동문화의 사회구성을 복원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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