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Ⅱ. 철기문화
  • 1. 철기시대
  • 1) 철기시대의 시기구분
  • (3) 문헌자료와 철기시대

(3) 문헌자료와 철기시대

 고고학상의 철기시대와 관련된 문헌자료는 크게 고조선의 후기사회에 관한 것, 고조선 주변의 진국·부여 등에 관한 것, 衛滿朝鮮에 관한 것, 고구려와 삼한사회에 관한 것, 낙랑을 비롯한 漢四郡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룬다. 이 가운데 가장 주된 것은 古朝鮮에서 위만조선으로의 이행과 위만조선의 성장과 멸망에 관한 것이 많다. 그러한 자료들 가운데 철기시대 전기와 관련된 것들을 위만조선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면0601)철기시대 후기에 대해서는≪三國史記≫와 같은 우리 나라 기록에도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삼국사기≫가 그때까지 현존해 있던 철기시대에 관한 기록이나 문헌자료를 참고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기시대가 역사시대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시기 문헌자료와 관련된 부분에 대하여는 다른 책에서 다룰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깊이 다루지 않기로 한다.
한편 문자 사용이나 문헌기록을 방증할 고고학 자료로서 다호리유적 출토의 붓은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위만조선 이전의 기록과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 설치 이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관한 문헌기록은 주로≪三國志≫나≪史記≫,≪漢書≫등 중국측 기록에 의존해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반면 철기시대 후기에 접어들면 중국측 사서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三國史記≫에도 당시 사회상의 일면이 보이고 있다. 삼한의 사회상 및 삼국시대의 개시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신라·고구려·백제의 초기 모습에 대한 기록이 그것이다.

 우선, 위만조선 성립 이전의 고조선 후기사회에 대한 기록 중 중국 燕나라(기원전 323∼222년)와의 접촉에 관한 중국 사서의 기록은 우리 나라 철기시대의 개시기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해 준다.≪三國志≫에 등장하는 燕 장수 秦開의 침입으로0602)≪魏略≫의 기록을≪史記≫<朝鮮列傳>과 연결시켜 보면 秦開의 침임시기는 燕나라의 전성기인 昭王(기원전 311∼279)代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尹乃鉉,≪韓國古代史新論≫, 一志社, 1986). 인해 조선은 약 2,000여 리에 해당하는 영토를 잃게 되어 한반도로 영역이 축소되게 되었다.0603)≪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이러한 기록은 앞서 살핀 고고학적 문화상 즉, 세형동검(한국식동검)이나 같은 시기 중국 북동부의 조문경과는 형식학적으로 판이한 정문식세문경의 분포상 등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원전 300년경에 시작되었던 우리 나라 철기문화는 중국계 철기문화와 관련이 있는데 당시 중원지역보다 우수한 철기 제조기술을 갖고 있던 연나라0604)이남규,<연국철기고>(≪제35회 전국역사학대회 논문 및 발표요지≫, 1992).와의 접촉 등을 통해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청천강 이북지역에서 나타나는 세죽리-연화보유형의 유적들에서 중국계 철기와 명도전이 공반되는 고고학적인 문화상은 그러한 추론을 방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현재까지 발견된 자료로 보아 중국측에서 고조선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도 이무렵, 즉 기원전 4세기대로서 중국사서0605)≪戰國策≫권 29, 燕策 1에 蘇秦이 燕 文侯(기원전 361∼333년)에 대해 당시 연 주변 상황을 말하면서 “燕의 동쪽에는 朝鮮, 遼東이 있고 북쪽에는 林胡, 樓煩이 있으며…”라고 하여 조선의 존재가 분명해짐을 알 수 있다.에서의 출현빈도가 이전 시기에 비해 늘어난다. 고조선의 존재와 함께 당시로서 중국적 천하질서에 반했던 연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듯이 당시 고조되어 있던 고조선과 연의 긴장관계0606)秦開의 침입사건은≪魏略≫에 나타나는 것처럼 323년 燕侯의 稱王에 대응하여 朝鮮侯의 稱王 및 古朝鮮의 擧兵 등과 같은 갈등관계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다음으로 위만조선과 관련된 중국사서의 기록들은 위만조선의 출자 및 성립, 사회구조, 위만조선의 국가적 성격 및 주변지역의 사회, 그리고 위만조선의 무역 및 대중국관계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연나라 왕 노관이 흉노로 망명하자 그 밑의 부장으로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위만이 무리 1,000여 명을 모아서 동쪽으로 浿水를 건너 上下障이라는 곳에 정착하였다. 당시 고조선의 왕이었던 準王은 위만을 신임하여 그에게 변방을 지키게 했으나, 위만은 차츰 진번조선·연·제의 유민들을 모아서 결국 준왕을 몰아내고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왕권을 잡은 후에 위만은 중국으로부터 外臣의 직함을 받고, 그 대가로 한나라로부터 兵威財物을 받았으며 조선 주위의 다른 나라가 한나라와 직접 통교하는 것을 막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위만조선의 성립이나 그 집단의 성격의 일단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위만집단은 고조선으로 편입되기 이전부터 이미 중국적 천하질서에는 위배되는 자치권을 가진 무력집단이었을0607)權五重,≪樂浪郡硏究≫(一潮閣, 1992). 가능성이 농후하며, 고조선으로 편입된 이후에도 중국측의 침입을 방어하는 군사집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위만조선을 우리 나라 최초의 고대국가로 비정하기 위해서 선결되어야 할 것은 위만조선의 출자문제, 즉 위만집단의 족속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위만이 고조선에 투항할 당시, 蠻夷의 복장을 하고 상투를 틀었다0608)≪史記≫권 115, 朝鮮列傳 55.는 점이나, 당시에 거부감 없이 고조선사회에 융합될 수 있었던 상황증거를 통해 볼 때 위만집단이 당시 고조선의 주민과 동일한 혹은 최소한 상당한 친연성이 있는 비중국계의 족속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위만이 정치적으로만 중국세력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혹은 정서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반중국적인 자세를 견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위만집단이 준왕세력으로 대표되는 고조선을 병합하는 과정은 우선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주변집단에 대한 무력적 정복에서 출발한다. 그러한 무력 정복의 원인에 대해서는 당초 좁은 지역에 정착한 뒤에 발생한 人口壓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지닐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복활동을 가능하게 했던 우세한 무력의 배경에는 선진 중국의 철기제조술의 접촉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인구압이나 기타 원인 등에 의한 정복활동은 위만조선의 전기간 동안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기존의 지배층과 많은 알력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後漢書≫ 東夷列傳 濊條에 “元朔 1년(기원전 128) 예군 南閭가 右渠에 반기를 들고 28만 명을 데리고 요동으로 갔다”라는 귀절이나,≪三國志≫魏書 東夷傳 韓條에 “朝鮮相 歷谿卿이 우거에 반하여 2,000여 호를 데리고 辰國에 망명하였다”는 기사들은 그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한편 주변 소국과 관련하여 볼 때,≪한서≫,≪사기≫,≪삼국지≫등에 나타나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위만조선 주변의 사회로는 예·옥저·변진·진국 등이 대표적인데, 이 외에도 조그마한 소국들이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가지고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중국 조공무역에 있어 이들이 생활필수품을 수출하는 대신 권위상징물(위세품) 등을 수입하는 기사0609)위와 같음.로 보아 이들의 수장은 그러한 수입품이 절실히 필요한 족장이었을 것이며, 그들 사회는 사회진화상 이미 족장사회(Chiefdom society) 이상의 단계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주변 소국과 고조선을 병합하는 외에≪사기≫조선열전에 한과 예, 변진간의 직접 통교를 막았다는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만조선은 당시의 주변 소국과 한의 조공로를 차단하고 중간 이득을 취하는 형태의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함으로써 국가적 성격과 지배구조를 공고히 해가게 된다. 그러한 교역 형태가 서구이론에서 말하는 중심지무역으로서 이는 곧 위만조선이 한의 침략을 받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한 원인으로 인해 위만의 손자 우거왕대인 기원전 109년에 한 무제의 침입을 받고 1년 후인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게 된다. 당시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인 대제국이었던 한에 대항하여 1년 넘도록 항거할 수 있었던 것도 위만조선의 탄탄한 국가적 기반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4대 87년간을 존속했던 위만조선은 위만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아들을 거쳐 손자인 우거에 이르는 혈연에 의한 세습왕권이었다. 위만과 우거 이외에 기록에 나타나는 비왕장, 朝鮮相 路人, 相 韓陶(韓陰), 大臣 成己, 將軍 王唊, 尼谿相 參 등은 그러한 세습왕권을 유지하는 고위각료들이었던0610)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고구려의 ‘상가’가 각 부족(加)의 장(相)이었던 점에 주목하여 위만조선이 몇몇 부족의 연맹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다. 것으로 생각되며 이들이 곧 전문화된 군사·행정집단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상 노인의 아들 최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왕위와 마찬가지로 상위계층에서도 지위세습이 존재했으며 그러한 상위계층에 대응하는 하나 이상의 하위 신분계층이 더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러한 신분체계와 아울러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위만조선의 사회구조에 관한 것은 내부의 부족구성과 인구수 등이다. 우거왕대에 망명한 歷谿卿의 2,000여 호나 예군 남려의 28만의 존재로 보아 위만조선의 무력에 눌리어 그 아래 복속되었으나 어느 정도 자치권을 가진 서너개 이상의 부족공동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0611)이남규, 앞의 글. 그러나 중국측 기록에 나타난 대부분의 인구 관련 기록은 상당히 과장된 경향이 있으며0612)20∼3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사회를 족장단계의 사회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중국측이 상당히 정확한 자료를 접할 수 있었던 한사군의 인구 규모에 관한≪한서≫와≪후한서≫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위만조선의 인구는 약 5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0613)崔夢龍,<韓國古代國家形成에 대한 一考察>(≪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족장단계를 넘어서는 이러한 인구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배경이나 영토, 그 밖에 법령과 치안을 담당할 군대가 필요하다.≪한서≫지리지에는 한의 풍속이 영향을 미친 이후 80여 조에 달하는 법령이 제정되었다는 기록이 있고≪후한서≫동이전 예조에도 역시 그와 유사한 기록이 있다.

 위만조선의 멸망 이후 한은 예와 위만조선의 고토에 낙랑·임둔·진번·현토의 4군을 설치하는데 이들은 한사회와의 교역, 고구려와의 갈등관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멸망 시기를 달리하면서 313년(낙랑군)까지 존속하게 된다. 특히 지금의 평양지역에 전축분, 목곽분을 남긴 낙랑군은 우리 나라 특히, 중부 이남의 철기시대 전기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위만조선에 의해 지배력을 상실한 준왕은 남쪽의 진국으로 이주하게 된다.0614)準王은 남쪽 辰國으로 가서 韓王이라고 칭하였다고 하였다. 진국이 문헌상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세기경 한과의 직접 통교를 원하는 글을 보내면서부터이다. 준왕의 남하 이외에도 우거왕대 歷谿卿의 세력이나 한사군의 설치 이후 위만조선의 유이민들은 철기제조술 등 선진의 문물을 그대로 지닌 채 남하함으로써 당시 진국을 비롯한 그 지역의 토착세력과 결합하여 남부의 여러 사회들이 삼한사회로 재편되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철기문화와 관련된 삼한사회에 대한 기록 중 중요한 것은 철생산 및 수출0615)≪後漢書≫권 85, 東夷列傳 75, 三韓條와≪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弁辰條에는 변진에 철이 많이 나서 이를 예, 마한, 왜 및 2군(낙랑·대방)에도 수출했으며 철을 돈으로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에 관한 부분과 사회발전 단계0616)≪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弁辰條에 보면 漢으로부터 읍군의 인수나 의책을 받으려는 韓 社會의 신지들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이러한 신분상징물이 요구되는 사회는 족장사회라 할 수 있다.에 관련된 것으로서 당시 삼한사회는 철을 주변으로 수출하는 족장사회였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삼국의 건국 관련기사에 의하면 철기시대 전기가 끝날 무렵인 기원전 37년에 朱蒙이 이끄는 夫餘族의 일파가 압록강 중류의 동가강유역에 자리잡으면서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0617)≪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始祖東明聖王. 고구려가 건국하는 지역은 예군 남려가 한에 투항한 뒤 滄海郡(기원전 128년)0618)창해군은 지도상의 계획에 그치고 말 뿐 실제로 설치되지는 않았다.이 설치된 지역으로서 고구려의 선구세력이라 할 수 있는 예맥이 존재하던 곳이다. 고구려의 선구세력이 결집하고 있을 무렵인 기원전 4세기경 송화강유역을 무대로 성장하고 있던 부여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를 제외한 신라와 백제의 성립은≪삼국사기≫초기 기록을 참고할 경우, 철기시대 전기 말 또는 후기 초엽에는 이루어지지만 그렇지 않다면 철기시대 후기로 미루어지게 된다.

<崔夢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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