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Ⅱ. 철기문화
  • 1. 철기시대
  • 2) 철기시대 유적의 분포
  • (2) 주요 철기유적

가. 북부지역

가) 생활유적

① 회령 오동유적0620)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회령 오동 원시 유적 발굴 보고≫(유적발굴보고 7, 과학원출판사, 1960).

 두만강 중류의 오른쪽 평야에 위치한 회령 오동유적은 1954∼1955년에 조사되어 9기의 집터가 발굴되었다. 그 중 철기시대에 속하는 6호 집터가 최상층에서 확인되었는데 기둥구멍이 없고 벽면에 화덕이 붙어 있는 등 다른 집터와 다른 점이 많다.

 유물은 鑄造의 쇠도끼(鐵斧) 2점과 화덕 주변에서 철부스러기가 출토되었다. 북한학자들은 이 집터를 기원전 6∼4세기경으로 편년하고 있으나 주조 쇠도끼의 연대로 보아 기원전 3세기경의 것으로 보인다.

② 무산 호곡동유적0621)황기덕,<무산 범의구석유적 발굴보고>(≪고고민속론문집≫6,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5).

 함북 무산읍 호곡동유적에서는 모두 40여 기의 집터가 조사되어 시기별로 6기로 나누고 있는데 5기와 6기의 집터가 철기시대에 속한다. 5기의 철기류로는 5호 집터(2점), 18호 집터(철부편 1점), 2호 집터(2점), 27호 집터(1점), 42호 집터(1점)와 제2시굴갱(3점) 등에서 모두 10점이 출토되었다. 6기에 속하는 집터에서는 도끼·반달칼·활촉(鐵鏃)·낫(鐵鎌)·낚시(鐵釣) 등과 骨柄鐵刀子 등 다량의 철기가 출토되었다. 북한에서는 5기를 기원전 7∼5세기로, 6기를 기원전 3세기로 편년하고 있으나 5기의 연대는 지나치게 올려 본 것이다.

③ 웅기 송평동유적0622)藤田亮策,<雄基松坪洞石器時代遺蹟の發掘>(≪靑丘學叢≫2, 1930).

 송평동유적은 웅기읍 서편에 있는 용수호 동쪽 모래언덕의 낮은 대지와 그 경사면에 위치한다.

 유적의 층위는 표토층인 담흑색 부식토층(30㎝ 미만)밑에 흑갈색의 패각포함층(30∼50㎝), 흑색사질토층(100㎝ 이상)과 생토층인 갈색사질토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석기·골각기·토기·동물뼈·인골 등은 두텁게 퇴적되어 있는 흑색사질토에서 출토되었다.

 또한 이 유적에서는 괴석을 장방형의 터널형으로 쌓은 외곬형 화덕과 여러 개의 石溝를 병렬하여 세운 위에 판석을 덮어 만든 다곬형 화덕이 발견되었다. 다곬형은 외곬형 및 ㄱ자형 시설이 보다 발전된 양식으로 이 유적에서만 발견되었다.

④ 영흥 소라리유적0623)박진욱,<함경남도일대의 고대유적 조사보고>(≪고고학자료집≫4, 사회과학출판사, 1974).

 1956년 所羅里土城 안의 유적을 조사하다가 발견된 집터유적으로 그 길이는 길이 5.6m, 너비 3m이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제의 활촉(鐵柄이 달림), 노기(鐵弩)·검파·蓋弓帽·乙字形器·筒形器와 철제의 창·단검편·송곳·통형기·除草器 등의 무기류, 농공구, 마구류와 무문토기·타날문토기 및 기와편 등이 발굴되었다.

⑤ 위원 용연리유적0624)梅原末治·藤田亮策,≪朝鮮古文化綜鑑≫1(奈良;養德社, 1947).

 1927년 도로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용연리유적에서는 다량의 명도전과 함께 다양한 철기가 공반되었다. 직경 12척의 원형적석총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 유적의 출토유물로는 쇠창(鐵矛)·쇠도끼(鐵斧)·비수(鐵金㐌)·괭이·호미·낫·반달칼·쇠활촉(鐵鏃)·三角錐銅鏃·靑銅帶鉤 및 明刀錢 등의 무기류와 농공구류 등이 있다.

⑥ 영변 세죽리유적0625)김정문,<세죽리 유적발굴 중간보고(1)>(≪고고민속≫1964-2).
김영우,<세죽리 유적발굴 중간보고(2)>(≪고고민속≫1964-4).

 신석기문화층으로부터 철기문화층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퇴적되었는데 철기문화층이 제일 위층이다. 동서 1∼1.3km, 남북 200∼300m의 넓은 범위에서 확인된 이 세죽리유적의 철기시대 집터는 3기가 발굴되었으나 규모를 알 수 있는 것은 1호 집터뿐이다.

 1호는 500㎝×580㎝의 장방형 수혈집터로 수혈 깊이는 15㎝이고 바닥은 진흙을 다졌다. 화덕은 ㄱ자 모양으로 구불어진 터널형이다. 즉 강돌을 두 줄로 평행되게 줄지어 세우고 그 위에 돌을 덮어 만든 터널형 시설과 이 시설과 직각으로 꺾어지게 땅굴식으로 구멍을 파고 그 끝나는 곳에 火口로 생각되는 타원형 구덩이가 패여 있다.

 이 유적에서는 철제의 호미·괭이·낫·도끼·끌·손칼·비수 등과 청동제의 활촉·검자루끝장식, 명도전·布錢, 승석문토기·갈색토기·흑갈색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그 연대는 기원전 3∼2세기로 보고 있다.

⑦ 시중 노남리유적0626)정찬영,<초기 고구려문화의 몇가지 측면>(≪고고민속≫1965-4).

 강계시에서 독로강을 따라 북쪽으로 28km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한 노남리유적 가까이에는 강을 끼고 북안에는 간평유적이, 남안에는 남파동유적이 있다. 이 중 남파동유적에서 철기시대 집터가 조사되었다.

 남파동유적의 층위는 청동기시대 문화층인 아래층과 철기시대 문화층인 위층으로 구분되는데 위층에서 집터 2기와 제철로 1기가 조사되었다. 2호 집터는 거의 지상가옥에 가까운 맞배형 집터로 남북 11m, 동서 14m의 대형이다. 진흙을 펴 다진 바닥의 중앙부 동·서편에는 터널형 화덕이 한 개씩(한 개는 ㄱ자형, 한 개는 외곬형) 만들어져 있고 화덕의 남쪽에는 장축에 따라 4개의 기둥구멍이 일렬로 뚫려 있었다.

 출토유물은 쇠도끼·쇠활촉·낚시·송곳·꺾쇠·띠고리 등의 철제품과 활촉·팔찌·명도전·오수전 등의 청동제품, 그리고 갈색마연토기·흑색마연토기·회색경질토기·갈색연질토기·백색연질토기 등이다. 토기 중에는 특히 帶狀把手가 붙어있는 흑색마연토기가 다량 출토되었다.

 노남리 상층문화의 편년은 상한을 기원전 4∼3세기로, 하한을 기원후 1세기로 보고 있다.

⑧ 중강 토성리유적0627)이병선,<중강군 토성리 원시 및 고대유적발굴 중간보고>(≪고고민속≫1961-6).

 토성리유적은 중강군 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35km 떨어져 있는 압록강 중류의 조그만 마을인 토성리 서·남·북쪽에서 강쪽을 향해 만들어져 있는 토성의 내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은 토성중학교 운동장을 만들기 위한 공사로 인해 지표면이 1m 정도 깎여 버려 문화층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철기시대의 유구가 조사된 곳은 2·3·4구이다. 3·4구에는 확실한 집터는 없고 터널형 화덕만 조사되었다. 이 지구의 층위는 발굴 당시 지표면인 흑갈색 사질토층인 문화층이 40∼50㎝로 두께로 연장되고 있으나 그 밑은 바로 생토층인 황색 사질토이었다. 터널형 화덕은 4구의 남쪽에서 2개소, 북쪽과 동쪽에서 각각 1개소씩 조사되었다.

 2구의 층위는 위로부터 20㎝의 흑황색 사질토층(2층), 30∼55㎝의 흑색 사질토층(1층)과 그 밑의 생토층인 황색 사질토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2층에서 철기시대 집터 2기가 조사되었다.

 이 토성리유적의 편년은 도끼날형 쇠활촉·회색경질토기·오수전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노남리유적과 같은 고구려 초기로 보고 있다.

⑨ 북창 대평리유적0628)정찬영,<북창군 대평리유적 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4, 1974).

 북창읍에서 2km 떨어져 있는 대동강 기슭의 강안 퇴적층에 위치하고 있는 대평리유적의 동쪽(제1지점)에서는 청동기시대의 포함층이, 서쪽(제2지점)에서는 철기시대의 포함층이 조사되었다.

 제2지점의 층위는 표토층(50∼60㎝) 밑에 60∼70㎝의 층(3층), 20㎝의 진흙 층(2층), 50∼60㎝의 황색 사질토층(1층)과 10㎝의 명갈색층으로 형성되어 있다. 철기시대의 집터는 1층에서 5기, 2층에서 4기가 조사되었다. 집터의 규모는 청동기시대의 집터에 비해 작았으며 수혈의 깊이도 낮고 화덕은 ㄱ자형이거나 외곬의 터널형이다(<그림 2>).

 출토유로는 회청색 승석문토기, 무문토기 외반구연호, 방추차, 철기편 등이 있다.

 이 유적의 연대는 1층은 기원전 2∼1세기, 2층은 기원후 1∼2세기, 3층은 기원후 3∼4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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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북창 대평리유적 집터
<그림 2>북창 대평리유적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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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분묘유적

① 함흥 이화동 토광묘0629)박진욱, 앞의 글.

 바닥에 판상석의 작은 돌을 깔았을 뿐 별다른 시설이 없는 토광묘로 남북장축에 길이 220㎝, 너비 70㎝이다.

 묘광의 서남쪽 끝에서 세형동검·창·십자형의 검자루끝장식 등이 나왔고, 서북쪽에서는 세문경이, 묘광의 동북쪽에서는 주조의 쇠도끼가 1점 나왔다. 칼자루끝장식은 천곡리 출토품과 같이 철광석제이다.

② 강서 태성리 고분군0630)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태성리 고분군 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5, 1959).

 태성리 한 우물 마을의 북쪽으로 750m 거리에 있고 해발 92m에 이르는 능선을 중심으로 집중 분포하고 있다. 석실분은 서쪽 구릉상에 있고, 토광묘·옹관묘·목곽묘·전실분 등은 동쪽을 차지하고 있어 이들 고분군 사이에 지역적인 구분을 보인다.

 옹관묘는 5기가 발굴되었는데 그 연대는 토광묘와 같은 시기로 대개 기원전 2세기를 넘지 않고 기원후 1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다고 보았다.

 토광묘는 모두 12기가 발굴되었다. 출토유물을 보면 10호와 11호의 경우 청동기가 주류를 이루어 細形銅劍, 狹鋒銅矛, 乙字形銅器, 管形銅器, 笠頭形銅器, 鈴頭圓筒形銅器, 수레굴대끝(車軸頭), 일산살꼭지(蓋弓帽), 고리 등이 출토되고 6·8·13·15호에서는 철기류가 주류를 이루어 철제검·손칼·도끼·창·끌·낫·말자갈 등이 출토되었다.

③ 평양 토성동 4호 토광묘0631)김동혁,<토성동 제4호 무덤 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4, 1974).

 평양시 낙랑구 토성동에 위치한 토성동 4호 토광묘는 비교적 그 유구가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장방형 토광의 크기는 길이 365㎝, 너비 187㎝이다. 토광의 어깨선으로부터 밑으로 80㎝ 내려가고 서벽면으로부터 35㎝ 들어와서 목곽이 있었으며 목곽은 내외면으로 구분되어 있다. 유물은 북쪽 부곽부와 중앙관, 내외관부분에 놓여 있었다.

 출토유물은 세형동검·검자루끝장식·활촉·긴쇠칼·수레굴대끝·일산대 및 일산살꼭지·乙자형동기·화분형토기·배부른단지·星雲文鏡 등이 있다.

④ 평양 석암동유적0632)梅原末治·藤田亮策, 앞의 책.
백련행,<석암리에서 나온 고조선유물>(≪고고민속≫1965-4).

 정확한 출토위치와 유구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출토유물은 秦戈·동창·도씨검 등이 있다. 진과에는 ‘秦始皇 25年’銘(기원전 221년)이 있어 그 제작연대와 출처를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1962년에 토목건설공사 중 발견된 일괄유물이 있으나 무덤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었다. 유물은 세형동검·청동방울 등 청동기와 함께 쇠창·말자갈·乙자형동기·갈구리창(鐵戟), 화분형토기 등이었다.

⑤ 평양 장진동유적0633)梅原末治,<朝鮮出土銅劍·銅矛の新資料>(≪人類學雜誌≫48-4, 東京人類學會, 1934).

 출토지점이 미상이고 무덤의 부장품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청동검과 청동창이 있고, 철기로는 쇠도끼가 있는데 주조품으로 추정된다.

⑥ 평양 정백동유적0634)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락랑구역 일대의 무덤떼>(≪고고학자료집≫5, 1978).
―――,<락랑구역일대의 고분 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6, 1983).

 평양시 정백동 서남쪽에 솟아 있는 오봉산에서 동북방향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약 500m 떨어진 지역에 위치한 정백동유적에는 수백여 기의 고분이 밀집 분포하고 있다. 언덕의 경사면 상단과 중앙부에 목곽묘가, 아래쪽에는 전축분이 있다. 이 고분군에서 서쪽으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 토성이 위치하고 있다. 고분에는 토광목곽묘·목곽분·전축분·기와널무덤·옹관묘 등이 있다.

 부장품으로는 긴쇠칼·쇠단검·검코·검자루끝장식 등 무기류와 수레굴대끝·일산대꼭지·청동고리·말자갈 등 마구류, 띠고리·띠걸이·구슬 등 장신구, 화분형토기·배부른 단지 등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특히 정백동 2호(高常賢墓)에서는 ‘夫租長印’, ‘高常賢印’이라는 글이 새겨진 도장과 ‘永始三年’(기원전 14년)이 새겨진 일산살대가 출토되었다.

⑦ 평양 정백동 부조예군묘0635)리순진,<부조예군무덤 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4, 1974).

 토광 목곽묘로 무덤에서 ‘夫租濊君’이라는 도장이 출토되어 ‘부조예군묘’라고 부르고 있다. 보고자는 ‘남은 바닥 상태로 미루어 보아 수직으로 내리판 장방형의 무덤 구덩이 안에 장방형의 나무곽을 만들고 거기에 하나의 관을 넣고 묻은 나무곽무덤’이라고 하였다.

 부장품으로는 세형동검, 석제 칼자루끝장식·검코·청동창·청동활촉 등과 쇠단검·긴쇠칼·쇠창·갈구리창·쇠도끼·철끌·쇠뇌·비수 등의 무기류와 생산도구·말관자·말자갈·말자갈멈추개·놋방울·말굴레장식못 등의 마구류, 굴대끝·멍에끝장식·삿갓모양동기·일산살꼭지 등의 수레부속, 그리고 부조예군도장, 무기류를 싼 천(작잠직), 옥장식, 화분형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⑧ 봉산 송산리 솔뫼골 위석묘0636)황기덕,<황해북도 봉산군 송산리 솔뫼골 돌돌림무덤>(≪고고학자료집≫3, 1963).

 지표 아래 50㎝ 위치에서 주먹만한 크기의 자갈돌이 남북으로 길게 깔린 圍石이 나타났다. 그 서남쪽 자갈돌 곁에서 세문경과 청동 자귀편이 출토되었고 청동제 괭이와 비수의 파편이 나왔다. 그리고 감실 남쪽벽에서 주조의 쇠도끼가 출토되었다.

⑨ 봉산 송산리 당촌 토광묘0637)황기덕,<1958년 춘하기 어지돈지구 관개공사 유적정리 간략보고(1)>(≪문화유산≫1959-1).

 토광을 파고 그 속에 길이 230㎝, 너비 100㎝, 높이 30㎝의 목곽을 직경 8∼9㎝의 굵은 통나무로 바닥과 벽을 돌렸으며 북쪽의 끝 70㎝를 따로 구획하여 토기류를 부장하는 부곽으로 하였다. 천장에는 판자를 덮고 목곽 남쪽 바닥의 통나무 위에 판자 8매를 더 깔았다. 지표에서 바닥까지의 깊이는 100㎝ 정도이며 목곽 전체에 회색의 부드러운 흙을 5∼10㎝ 두께로 발랐다.

 출토유물로는 나무집에 들어 있는 세형동검과 화분형토기·평저단경호 등이 있다.

⑩ 은파 갈현리 토광묘0638)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황해북도 은파군 갈현리 하석동 토광묘 유적 조사 보고>(≪고고학자료집≫2, 1959).

 동서 260㎝, 남북 250㎝, 깊이 약 110㎝의 방형에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는 토광묘의 벽면은 다소 경사를 이루어 밑으로 내려가면서 좁아들었고 벽면은 거칠게 한 번 파낸 그대로였다. 서쪽벽은 동서 80㎝ 정도의 너비로 2단으로 되어 있어 바닥에서 약 40㎝ 높다. 여기에는 철제무기류가 부장되었던 것 같다. 목곽시설 같은 것은 없었고 부식한 골편 및 부식토층으로 미루어 보아 목곽을 사용한 듯하나 관재편은 발견되지 않았다.

 출토유물로는 세형동검, 검자루끝장식, 笠頭筒形銅器, 乙자형동기, 靑銅環, 청동띠고리(帶鉤), 쇠칼, 쇠창, 쇠도끼, 쇠못, 유리옥, 화분형토기 등이 있다.

⑪ 배천 석산리 토광묘0639)황기덕,<최근에 새로 알려진 비파형단검과 좁은놋단검 관계의 유적유물>(≪고고학자료집≫4, 1974).

 지표에서 50∼60㎝ 내려가서 회색 모래층이 나타나고, 그 밑 약 40㎝ 더 내려가서 유물이 나왔다. 4년 뒤 재조사 당시 80㎝ 너비로 나무와 금속이 삭아서 된 검푸른 장방형 구획이 발견되어 토광묘임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동검·동과와 함께 폭이 좁은 장방형의 쇠도끼가 있다.

⑫ 신천 명사리 옹관0640)도유호,<신천 명사리에서 드러난 고조선 독널에 관하여>(≪문화유산≫1962-3).

 동서방향으로 놓인 항아리와 화분형토기의 합구식옹관이다. 동쪽의 항아리는 꼭지파수가 달린 물동이 모양의 경질토기이며 원저이고 구연부의 직경 은 22㎝, 높이가 약 33㎝이다. 서쪽의 화분형토기는 평저이며 구연부의 직경은 약 20㎝, 높이는 약 29㎝이다.

⑬ 은율 운성리 고분군0641)리순진,<운성리유적 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4, 1974).

 황해도 은율군 운성리 가말리 마을에 있다. 이 마을은 산과 바다로 둘러막힌 구릉평야지대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데 그 서쪽과 북쪽은 4∼5km 반경으로 황해가 둘러싸여 있고 남쪽 약 5km 지점에는 해발 458m의 구왕산이 솟아 있다. 마을 동쪽 경사면 중턱에 토성이 있고, 토성 남쪽 야산에 고분군이 있는데 토성과의 거리는 400m밖에 되지 않는다.

 고분은 동, 서 두 봉우리와 그 북쪽에 많고 동쪽 봉우리의 동남쪽 줄기 남쪽 경사면에 10여 기, 동쪽 줄기 중앙부에 3기가 각각 하나의 군을 이루고 있다. 이 유적에는 토광묘·옹관묘·목곽묘·목곽분·전축분 등이 있다. 출토유물은 세형동검·쇠단검·긴쇠칼·고리자루쇠칼·쇠창·쇠도끼·쇠낫·말자갈·굴대끝·일산대꼭지 등의 무기와 생산도구, 마구·수레부속(차여구), 청동가락지·청동팔찌·구슬(수정, 옥, 유리 등) 등의 장신구가 반출되었다.

 화분형토기를 관으로 사용한 옹관묘는 움무덤 혹은 나무곽무덤들 사이에서, 회색승석문토기를 사용한 옹관묘는 귀틀무덤 사이에서 주로 발견된다. 옹관으로 사용된 화분형토기는 귀가 높고 배가 부른 것으로 크기는 움무덤 출토품보다 크다.

 토성에서는 화분형토기와 단지·대접·잔·나무그루손잡이토기 등과 쇠칼·활촉(골촉·철촉), 쇠낫, 쇠보습 등의 무기와 생산도구, 기와·막새·벽돌 등이 출토되었다.

 운성리의 연대는 좁은놋단검·나무그루형파수토기 등으로 보아 기원전 2세기 후반기에서 좀더 소급하는 기원전 3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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