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Ⅱ. 철기문화
  • 3. 주변지역 철기문화와의 비교
  • 2) 일본
  • (1) 초기 철기문화의 시기별 추이

(1) 초기 철기문화의 시기별 추이

 일본은 야요이문화 전기초두를 철제 공구의 출현기, 중기전반을 철제 공구의 보급기, 중기후반을 철제무기 보급기, 후기후반을 철제 공구의 실질적인 제작·개시 및 보급기로 구분하고 그 중심지는 키타규슈지역이라고 보고 있다.

 규슈지역에서 가장 선행하는 철기 자료가 출토된 곳은 후쿠오카(福岡)현 이토시마군(糸島郡) 니죠마치(二丈町) 이시자키(石崎) 구릉에 위치한 마가리타(曲り田)유적이다.1091)橋口達也 編,≪石崎曲り田遺跡≫Ⅲ(福岡縣敎育委員會, 1984). 지난 1980∼1981년에 걸쳐 조사된 마가리타유적 가운데 죠몬문화 만기 또는 야요이문화 초두의 유우스식(夜臼式) 토기 단순기에 해당하는 제16호 주거지 바닥에서 철편이 출토되었다. 이 철편은 板狀鐵斧의 기부 파편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세하지는 않다.

 이보다 시기적으로 약간 늦은 것으로 구마모토현(熊本縣) 사이토산(齊藤山)유적 출토 철기편이 있다.1092)乙益重隆,<熊本縣 齊藤山遺跡>(≪日本農耕文化の生成≫, 1961). 이 철기편은 지난 1955년 구마모토현 타마나군(玉名郡) 텐수이마치(天水町)에 소재하는 사이토산 패총 2차 조사 때에 발견되었다. 袋狀鐵斧의 인부 파편인데 길이 4.7㎝, 폭 5.6㎝ 크기이며 兩刃 형태의 것이었다. 자루를 끼우는 袋部는 단면 장방형이다.

 또 이보다 시기적으로 약간 늦은 것이지만 구마모토현 카모토군(鹿本郡) 우에키미치(植木町) 토도로키(轟)유적에서도 같은 형태의 것이 출토되었으며,1093)潮見浩, 앞의 책. 身部의 길이에 비해 인부 폭이 큰 철부라고 생각된다. 사이토산유적 출토 철부가 주조품인지 단조품인지에 대한 관심이 많으나 扁平方形의 대부 특징이나 단조품에서 잘 나타나는 표면 산화에 의한 板狀剝離가 없는 점 등의 특징은 주조품일 가능성이 많다. 만약 이들 철부편이 모두 주조품에 속한다면 우리 나라 북부지방에서 출토된 초기 철기들이 주조철기라는 점에서 같은 특징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야요이 전기에 해당하는 철기 출토 유적은 카고시마현(鹿兒島縣) 高橋(철편 2점),1094)河口貞德,<鹿兒島縣高橋貝塚>(≪考古學集刊≫3-2, 1965). 야마구치현(山口縣) 綾羅木鄕(철도자·철사 각 1점씩),1095)國分直一 外,≪綾羅木鄕彌生社會と生産技術≫(どるめん 10, 1976). 히로시마현(廣島縣) 中山(철편 2점),1096)藤田等·川月哲志,<彌生時代鐵器出土地名表>(≪日本製鐵史論≫, 1960). 효고현(兵庫縣) 吉田(철편),1097)直良信夫·小林行雄,<播磨國吉田史前遺跡の硏究>(≪考古學≫3-5, 1932). 오사카시(大阪市) 요스이케(四ツ池)(철도자 1점)1098)森浩一·炭田知子,<考古學から見た鐵>(≪日本古代文化の探究≫鐵, 1974). 등 규슈지역에서 킨키(近畿)지방에까지 그 분포를 넓히고 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연속성이 없고 철부·철사·철도자 등의 공구류 파편이 대부분인 점 등은 우발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후쿠오카시 쥬로쿠쵸(拾六町) 쯔이지(ツイジ)유적1099)山口讓治,≪拾六町ツイジ遺跡≫(福岡市埋藏文化財調査報告書 92, 1983).에서 출토된 전기후반으로 추정되는 철부자루의 존재는 이들 철기가 실제 利器로서 사용되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 다음 중기전반에서 중기중반이 되면 종래의 공구류에서 농구나 무기로서의 철기가 나타난다. 이 때의 철부는 銎斧와 板狀斧가 있으나 대부분이 단조품이다. 그 가운데 후쿠오카현 이쿠하시(行橋市) 시모히에다(下稗田)유적 출토품1100)長嶺正秀 編,≪下稗田遺跡調査槪報≫Ⅳ(行橋市文化財調査報告書 13, 1983).이나 다쟈이후시(大宰府市) 요시가우라(吉ケ浦)유적 출토 철부1101)橋口達也,<ふたたび初期鐵製品をめぐる二·三の問題について>(≪日本製鐵史論集≫, 1983).와 같이 우리 나라 제품이 일본에 전파된 것이라고 확증되는 것도 있다.

 무기류 가운데 후쿠오카현 온가군(遠賀郡) 모토마츠바라(元松原)遺蹟1102)高倉洋彰, 앞의 책.에서 출토된 철모는 우리 나라 용연동 출토1103)梅原末治·藤田亮策,≪朝鮮古文化綜鑑≫(1)(奈良;養德社, 1947).유물과 유사하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일부 철촉과 공부의 단면이 타원형인 철부는 일본에서 처음 생산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1104)橋口達也,<初期鐵製品をめぐる二·三の問題>(≪考古學雜誌≫ 60-1, 東京;日本考古學會, 1974). 예를 들면 야마구치현(山口縣) 시모노세키시(下關市) 아야라기(綾羅木) 출토 부정형 철편이나 후쿠오카현 키타규슈시 바바야마(馬場山) 출토 부정형 철편 등이 철의 소재라고 가정한다면1105)橋口達也, 앞의 책. 이와 같은 추정도 가능한 일이겠지만 지금의 단계에서는 확언하기 어렵다. 특히 이와 비슷한 형태의 예가 부산 내성유적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서1106)宋桂鉉·河仁秀,≪東萊福泉洞萊城遺跡≫(부산시 시립박물관 조사보고서 5, 1990). 앞으로 일본 철의 가공 또는 생산 시기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 단계인 중기후반에서 후기전반이 되면 철기의 무기화와 그 보급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획기를 찾을 수 있다. 즉 철제무기 가운데 검·모·과·도·촉은 중기전반 무렵부터 보이지만 중기중반 이후 특히 중기후반에 많이 보급되고 있으며, 우리 나라 철제 무기와 매우 닮고 있다. 이 가운데 철과의 경우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처음 생산된 것이라고도 말해 왔으나1107)高倉洋彰, 앞의 책. 최근 같은 특징의 것이 창원 다호리유적에서 출토되고1108)李健茂 외,<義昌 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Ⅰ)>(≪考古學誌≫1, 한국고고미술연구소, 1989). 있어 종래의 설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지배적이다. 더욱이 이 시기 주목되는 사실은 분묘에 철기를 부장하는 풍속에 연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후쿠오카현 이이츠카시(飯塚市) 타테이와(立岩)유적의 경우,1109)小田富士雄,<鐵器>(≪立岩遺跡≫, 立岩遺跡調査委員會, 1977). 중기후반의 타테이와식(立岩式) 옹관묘에서 철기가 출토되었는데 검·과·모 중 어느 것이 단독 또는 세트를 이루는 수도 있고, 때로는 동경과 함께 부장된 예도 있다. 특히 철기와 동경과의 동시 부장은 종래의 청동기의 검·과·모·경의 세트관계에서 무기는 청동기에서 철기로 재질을 바꾸어 계속 부장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 뒤 후기전반에서 후기중반의 경우는 무기뿐만 아니라 다른 철기류도 양적으로 증가하고 어느 정도 철기가 일반화된 단계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무기 이외의 철기는 후기중반 이후에야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후기후반에서 종말기에 이르면 앞 시기에 유행하였던 철제무기의 출토량이 급격히 감소하는 반면, 농경구의 철기화와 그 보급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집락의 주거지 내부나 그 포함층에서 많은 철기가 출토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재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버려지고 있는 사실에서 당시 철기 자체의 보급과 공급이 충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집락내에서 종종 단야유구가 검출되는 것도 철기 공급의 안정성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특히 농공구의 경우 그 형태에 있어서는 큰 변화없이 이전의 특징을 연속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철기의 보급이 당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였다고 생각되며 야요이시대에서 고분시대로 바뀌어지는 과정에서 철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고도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일본의 초기 철기문화는 지리적으로 우리 나라와 가장 인접한 규슈지역이 중심이 되어 당시 우리 나라에서 전파된 야요이문화와 그 발전 과정을 같이 하면서 점차 일본 전역에 파급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본 초기 야요이문화 요소와는 달리 철기의 본격적인 파급은 야요이시대 중기중반 이후부터이며 지역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그 이전 단계는 마제석기와 청동기가 철기를 대신하는 상황이었고, 간혹 산발적으로 철기 공구류가 혼재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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