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Ⅱ. 고조선
  • 1. 고조선의 국가형성
  • 5)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 (2) 문헌에 나타난 고조선의 영역

가. 춘추전국시기 고조선의 영역

 고조선과 관련된 문헌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사의 전개과정에서 등장한 여러 국가들과의 관계속에서 고조선의 존재 시기와 정치적 성격 및 지리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중국문헌 가운데 조선이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管子≫인데, 춘추시대 齊나라 宰相인 管仲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관자≫는 기원전 7세기경에 중국인들에게 이미 조선의 존재가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① (제나라의) 桓公이 管子에게 “내가 듣건대 海內에 귀중한 예물 일곱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에 대해 들을 수 있겠소”라고 하니 管子가 “陰山의 유민이 그 한 가지요, 燕의 자산 백금이 그 한 가지요, 發과 朝鮮의 文皮가 그 한 가지요…”라고 답하였다(≪管子≫권 23, 揆道篇).

② 桓公이 말하기를 “사방의 오랑캐가 복종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잘못된 정치가 천하에 퍼져서 그런 것이 아닌가 걱정인데… 發과 朝鮮이 朝勤을 오지 않는 것은 문피와 태복을 예물로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한 장의 표범가죽이라도 여유있는 값으로 계산해 준다면 8천 리 떨어진 발과 조선도 조근을 오게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管子≫권 24, 輕重甲篇).

 위의 사료는 조선의 존재가 이미 중국 춘추시대에 알려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관자≫의 상당수 내용이 전국시대에 저술되었다고는 하지만 당시에 이같은 전승이 수록되었다는 것은 이 시기를 내려가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관중이 山戎族들을 축출하기 위해 燕지역까지 왔던 사실을 감안할 때 조선의 존재와 함께 그 위치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생각되며, 그 내용으로 보아 조선이 연 등의 지역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기원전 4∼3세기경 이미 간행되었으나 뒤에 郭樸(276∼324)에 의해 다시 편찬된≪山海經≫海內北經에는 “조선은 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海의 북쪽이며 山의 남쪽이다. 열양은 燕에 속한다”라고 하여 구체적으로 조선이 연에 인접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戰國策≫燕策에도 “蘇秦이… 燕文侯(기원전 361∼333)에게 말하기를 연의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으며”라 하여 기원전 4세기경 연의 동쪽에 조선이 있었음이 언급되어 있다. 이같이 조선이 연과 지리적으로 인접하였음이 부각되어 있고 관련 지명으로 ‘遼東’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선진시대 문헌에 나타나 있는 조선은 적어도 기원전 7세기경 춘추시대의 중국인들이 교역을 한 대상이었으며 정치적 복속문제도 염두에 두고 있는 존재였다. 또한 전국시대 문헌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연나라와의 지역적 인접성이 강조되면서 관련 지명으로 ‘열양’·‘요동’ 등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시기부터 중국세력과 고조선과의 본격적인 정치·군사적 갈등이 전개되고 있음이≪史記≫朝鮮傳과≪三國志≫東夷傳 韓條에 인용되어 있는≪魏略≫에 잘 나타나 있다. 우선 관련 부분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③ 옛 箕子의 후예인 朝鮮侯는 周나라가 쇠약해지자 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王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으로 보고, 그도 역시 스스로 王號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逆攻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고 하였는데 그의 大夫 禮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인용≪魏略≫).

④ 그 뒤에 자손이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은 장군 秦開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인용≪魏略≫).

⑤ 조선왕 滿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부터 일찍이 眞番과 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障塞를 쌓았다(≪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위의 사료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전국시대부터 조선과 중국의 정치체들이 본격적인 관계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먼저 연과 고조선은 정치적 대립과 갈등을 겪었으며 급기야 군사적 충돌까지 일으켰는데, ③에서는 연이 稱王하는 시기에 조선도 함께 칭왕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왕을 칭한 시기는 연의 易王(기원전 332∼321)이 처음으로 왕칭호를 사용하고 있으므로205)전국시대 중국의 稱王은 齊나라가 기원전 334년, 秦과 韓은 기원전 325년, 魏·趙·燕 등은 기원전 323년으로 이해되고 있다. 대체로 기원전 4세기 후반일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조선은 이미 왕을 칭하며 신하인 大夫 禮를 연에 파견하여 외교적 공세를 펼치고 군사적으로 맞대응할 정도로 국가적 체제를 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④와 ⑤에는 이같은 고조선의 성장에 대한 연의 구체적 공세과정, 즉 고조선의 영역축소와 관련된 중대 사건인 燕將 秦開의 고조선 西邊 2천 리 공취사건이 나타나 있다. 이는 진개가 東胡를 치고 천 리를 개척하여 5군을 설치하였다는≪사기≫匈奴傳에 나타나 있는 내용과 관련된다.

그 후 燕에는 현명한 장수 秦開가 있어 東胡에 인질로 갔었는데 동호가 그를 상당히 신임하였다. 진개가 돌아와 동호를 습격하여 그들을 敗走시켜 천여 리 땅을 빼앗았다. …연은 또한 長城을 쌓았는데 朝陽으로부터 襄平에 이르렀다. 그리고 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을 설치하여 동호에 대항하였다(≪史記≫권 110, 列傳 50, 匈奴).

 위의 사료에는 구체적으로 진개와 고조선과의 관계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연이 長城을 쌓았다는 사실과 5郡을 설치하였다는 내용만이 보이고 있다. 그런데≪鹽鐵論≫에 나타나 있는 다음 내용은 연이 동호를 공격하면서 함께 요동지역을 넘어 조선을 공격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燕이 東胡를 습격하여 바깥으로 천 리를 물러나게 하였으며 遼東을 지나 동쪽으로 朝鮮을 공략하였다(≪鹽鐵論≫권 8, 伐攻篇).

 이 사건은 고조선의 영역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즉 기원전 3세기경 요동 서쪽까지 뻗어 있던 고조선의 영역은 진개의 공격에 의해 2천 리를 상실하는 상당한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는 고조선이 遼河線까지 유지하고 있던 영역 가운데 요동지역 거점을 상실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앞의 사료 ④에 ‘滿番汗’이라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이 고조선과 접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된 것으로 보아 새로 설치된 5군 가운데 요서·요동군지역은 고조선과 관련이 깊은 곳임을 알 수 있다.206)≪遼東志≫를 토대로 하여 북경에서 산해관까지 670리, 산해관에서 심양까지 810리, 심양에서 압록강까지를 600리라고 보고,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2천 리가 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는 정약용이 義州에서 北京까지의 거리가 2천 리라고 한 것과 합치한다면서 고조선의 영역이 요서, 요동에 걸쳤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리지린, 앞의 책, 17쪽). 이 만번한이 구체적으로 어디인가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논란을 벌여 왔다. 만번한을≪漢書≫地理志에 나타나 있는 前漢代 요동군의 속현인 文縣과 番汗縣의 연칭으로207)≪漢書≫권 28 下, 志 8 下, 地理. 이해하는 데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지역이 현재의 어디인가인데 이에 대해서≪讀史方輿紀要≫에서는 文縣故城이 蓋州衛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문현은 오늘날 요동반도의 蓋平 서쪽으로 비정할 수 있으며,≪한서≫지리지 번한현조에 나오는 沛水는208)≪漢書≫권 28, 志 8 下, 地理 遼東郡. 淤泥河로 볼 수 있으므로 번한현은 현재의 요동 海城縣 및 蓋平 일대로 볼 수 있다.209)盧泰敦, 앞의 글, 49∼51쪽.

 따라서 기원전 7세기경의 춘추시기부터 나타나고 있는 고조선과 중국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전국 초기의 고조선은 燕에 대하여 적극적인 공세와 대등한 정치·군사적 역량을 보여주는 등 연에 대한 위협세력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 중반 연의 昭王 때에 이루어진 진개에 의한 동호 공략과 고조선 공략으로 고조선은 연에 의해 서쪽 경계의 영역을 축소당하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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