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Ⅱ. 고조선
  • 2. 고조선의 변천
  • 1) 고조선사회의 국가적 성장

1) 고조선사회의 국가적 성장

 중국문헌 가운데 朝鮮이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기록은≪管子≫로서 기원전 7세기경의 중국인들에게 이미 조선의 존재가 인식되고 있었음을 앞에서 보았다. 이 시기의 고조선은 이른바 箕子朝鮮234)箕子朝鮮의 실체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箕子東來에 입각한 인식이 제시되었으나 이에 대한 학계의 입장은 기자동래를 부정하고 대신 그 실체의 성격에 대해 李丙燾의 ‘韓氏朝鮮說’, 金貞培의 ‘濊貊朝鮮說’, 千寬宇의 ‘箕子族團移動說’ 등의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李丙燾,<三韓問題의 新考察>(≪震檀學報≫3, 1935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金貞培,<古朝鮮의 住民構成과 文化的 複合>(≪白山學報≫12, 1972 ;≪韓國民族文化의 起源≫, 高麗大 出版部, 1973).
―――,<準王 및 辰國과 ‘三韓正統論’의 諸問題>(≪韓國史硏究≫13, 1976 ;≪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高麗大 出版部, 1986).
千寬宇,<箕子攷>(≪東方學志≫15, 1974 ;≪古朝鮮·三韓史硏究≫, 一潮閣, 1989).
즉 濊貊朝鮮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山海經≫과≪戰國策≫등에 의하면 보다 구체적으로 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 燕의 동쪽에 존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 先秦시대 문헌에 나타나 있는 고조선은 적어도 기원전 7세기경 춘추시대의 중국인들이 교역을 행하는 대상이었으며 정치적 복속문제도 염두에 두고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들 선진시대 문헌에는 고조선의 존재만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어서 구체적인 사회수준이나 성격은 파악할 수 없다. 이 시기 고조선사회의 성격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음 사료가 참고된다.

옛 箕子의 후예인 朝鮮侯는 周나라가 쇠약해져 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王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으로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王號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공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고 하였는데 그의 大夫 禮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인용≪魏略≫).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난 시기는 燕이 王을 칭하는 기원전 4세기 후반경인데, 연과 정치·군사적 갈등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당시 고조선사회의 수준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즉 연과 함께 고조선이 왕호를 취하고 있으며 신하인 大夫의 존재가 나타나고 있는 점이나, 연과의 전쟁도 불사하는 외교적 강경조치를 강구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고조선의 세력이 연에 버금가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원전 4세기경의 예맥조선 후기 단계에 이르게 되면 이미 고조선이 국가로서 발돋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기원전 3세기 중반의 연의 昭王代에 秦開가 조선을 공략하여 2천여 리라는 광대한 지역을 빼앗았으며, 이후 秦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조선왕 否가 복속의 예를 갖추었다는 후속 사료에서 더욱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연에게 빼앗긴 고조선의 일부 영역이 2천 리라는 사실은 그 나머지 영역이 매우 광대하였으며, 진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조선에 대한 정치적 복속을 강요한 것은 고조선의 세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같은 고조선사회의 보다 발전된 모습을 위만과 관련된 사료에서 볼 수 있다. 즉 위만과의 관계에서 볼 때 후기 예맥조선은 이미 초기국가적 성격을 띠고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235)Fried는 階層社會(Stratified Society)와 國家(State)의 단계를 더 설정하고 있는데 후자의 두 단계는 구별에 신중을 기해야 된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Fried는 국가를 初期國家(Pristine State 이를 原初 또는 原生國家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와 二次國家(Secondary State)의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서 고찰하고 있다. 초기국가는 그 지역에서 발생·발전된 것이며, 2차국가는 외부로부터 물리적 힘에 의해서 형성된 국가이다(Service, E.R., Origins of the State and Civilization., W. W. Norton & Company Inc., 1975, p.304 및 金貞培, 앞의 책, 1986, 180쪽). 예맥조선 말기의 여러 양상은 그 단계를 初期國家(Pristine State)로 규정하게 하는데, 사회계급이 발생하였다는 사실 이외에 국가가 성립될 때 지니게 되는 여러 면을 일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맥조선은 君長社會(Chiefdom)의 단계가 아니라 초기국가 단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한국사에서 국가의 기원과 형성문제는 고조선에서 그 시발을 찾을 수 있다.236)金貞培,<韓國 古代國家의 起源論>(≪白山學報≫14, 1973 ; 위의 책, 1986). 고조선으로 지칭되는 우리 역사 최초의 정치체는 기본적으로 ‘檀君朝鮮’·‘箕子朝鮮’·‘衛滿朝鮮’ 등으로 구별되는 정치체를 포함하고 있는 사회로서 이들의 사회적 수준을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하나의 논란거리이다. 특히 이들의 존재 시기와 중심지 및 사회성격 등과 관련한 논의는 현재까지도 상당한 견해차를 보이며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237)盧泰敦,<古朝鮮史硏究의 現況과 課題>(≪韓國上古史≫, 民音社, 1989). 실제로 우리 나라의 국가 기원 및 형성문제에 관한 논의는 이른바 기자조선과 관련된 자료를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다.238)金貞培,<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格>(≪史叢≫21·22, 1977 ; 앞의 책, 1986, 24∼45쪽). 즉 위만조선의 성립 이전 이른바 기자조선 후기 단계에 이미 국가로서의 조직체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이 국가로서 출발한 시점은 연과의 관련성 등을 감안할 때 기원전 4∼3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짐작되는데, 국가적 정치조직체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우선 ‘朝鮮侯’라는 최고의 정치적 존재가 ‘王’239)‘王’은 조선후가 참칭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周代의 경우 최고의 통치권자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었으며 漢代에는 諸侯國의 통치권자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특히 조선왕 否의 왕위가 아들 準에게 계승되고 있는 사실을 통하여 부자상속체계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준왕까지의 계보로서 40여 세대의 존재가 인식되고 있었다는≪三國志≫東夷傳 濊條의 기록은 이같은 부자상속에 의한 왕위계승이 훨씬 이전부터 확립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을 자칭하였으며 그 신하로서 ‘大夫’라는 존재가240)‘大夫’라는 표현은 제후국 지배계층의 총칭으로서 周代의 경우 세부적으로는 卿·大夫·士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조선왕이 燕을 공략하려고 하자 대부 禮가 이를 만류하였다는 사실을 통하여 고조선의 대부라는 명칭도 이같은 직임에 걸맞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나타나고 있다. 또한 준왕은 위만이 망명하여 오자 그를 ‘博士’241)‘博士’는 일반적으로 전문적인 직임이 부여된 직능인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漢 武帝가 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있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박사라는 칭호는 전문적인 직능인 외에 중앙에서 특별히 파견하는 지방관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즉 한대에 중앙의 정책이 지방에 철저하게 수행되지 않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파견한 자가 박사였으며, 홍수가 난 地方民에 대한 특별 조치를 취할 때 파견된 자를 박사라고 하였다. 즉 박사는 당시 최고 통치권자의 명을 받아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직임이었다. 그러므로 위만이 부여받은 ‘박사’라는 직함도 특정사항에 제한된 단순한 전문 기능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중앙에서 특별히 파견된 지방관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趙法鍾,<한국고대신분제연구>,≪國史館論叢≫52, 國史編纂委員會, 1994).로 임명하여 ‘圭’를 하사하고 백 리의 땅을 봉하여 주며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242)≪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인용≪魏略≫. 따라서 고조선사회의 통치체계는 왕을 정점으로 하여 왕의 명령을 받고 조언하는 중앙 행정 관리로서 ‘대부’가 있었으며, 지방 통치를 대행하는 존재로서 ‘박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위만이 망명하기까지 고조선사회의 통치구조는 왕과 중앙의 대부, 왕과 지방의 박사 등으로 연결되어 있는 체제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陳勝의 亂 이후 고조선이 중국의 수만에 달하는 피난민을 무리없이 수용하고 있는 사실을 통하여 상당히 규모가 큰 통치구조를 갖추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준왕이 위만에게 축출되는 과정을 보면 군사적인 역량에서는 오히려 위만세력보다 미약했던 것으로 짐작된다.243)위와 같음. 당시의 법속 또한 고대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萬民法 차원의 성격으로 이해되는데, 국가의 구성요건 가운데 하나인 법에 관한 것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미흡함을 지적할 수 있다.244)≪漢書≫권 28 下, 志 8 下, 地理 燕.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濊.

 이상에서 살펴본 칭왕 사실이라든가 官階조직·法俗·軍事·문화 단계 등을 통하여 예맥조선 말기에 와서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어 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 시기는 고고학적으로 청동기문화를 거쳐 철기문화의 단계에 진입하였고 기원전 4∼3세기에는 철제의 도끼류 등이 생산되고 있음도 확인되고 있다.245)金貞培,<韓國의 鐵器文化>(≪韓國史硏究≫16, 1977 ; 앞의 책, 1986). 그러나 이들 유물은 강력한 무기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이어서 그 한계성이 지적되고 있다. 한편 망명한 위만집단이 숙위를 자처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준왕의 군사조직이 그리 강력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른바 기자조선 후기의 양상은 위만조선과 비교할 때 프리드가 상정한 초기국가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246)金貞培, 위의 책,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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