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Ⅲ. 부여
  • 1. 부여의 성립
  • 2) 부여의 기원과 건국설화
  • (3) 부여의 선주민문화와 한대 부여문화

(3) 부여의 선주민문화와 한대 부여문화

 백금보문화가 존재한 같은 시기에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기원전 7∼3세기까지로 비정되는 청동기문화로서 西團山文化가 있다.390)董學增·李澍田,<談略西團山文化的族屬問題>(≪東北師大學報≫2期, 1984).
李健才,<關于西團山文化族屬問題的探討>(≪社會科學戰線≫4期, 1985).
董學增, 앞의 책.
이 문화의 성격과 족속문제에 대한 연구는 부여 및 그 先世문화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 문화는 제2송화강을 중심으로 하여 길림시 서단산·長蛇山·兩半山·猴石山·星星哨와 土城子 등지에 집중되어 있다. 이 문화의 분포범위는 남북으로 제1송화강 이남, 張廣才嶺 이서와 柳河·휘발하 등 길림 哈達嶺 이북지구에 이른다. 이 문화의 담당 족속문제에 관해서는 종래 숙신설과 예맥설이 있었으나 지금은 예맥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391)서단산문화의 중심 분포지역은 송화강 중류로서 땅이 비교적 平闊하며 5곡 농사에 적합하다. 이것은≪後漢書≫에 기재된 “동이의 지역에서 가장 평창하고 오곡에 적합하다”는 기재와 들어맞는다. 서단산문화 유형은 대개 반지하 혹은 석축으로 주거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길림시 東團山 일대에서 漢과 한 이전의 유지 중에 대략 원형을 나타내는 土城이 발견되고 있다. 이 점은 부여가 “圓柵으로 성을 쌓고 궁실·창고·감옥이 있다”는 기재와(≪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夫餘國) 부합한다. 따라서 서단산문화는 예족, 즉 부여 선주민의 문화라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 같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리병선,<압록강 및 송화강중상류 청동기시대의 문화와 그 주민>(≪고고민속≫3기, 1966).
李健才, 위의 글.
정상석,≪西團山文化와 初期扶餘≫(東亞大 碩士學位論文, 1996)).

 서단산문화의 대표유적인 서단산 석관묘군은 하나의 씨족공동묘지로서 마제돌도끼·반월형석도·끌·갈판 등의 농업생산 도구가 보편적으로 발견되고 있고, 토기는 모두 모래가 섞인 삼족기(鼎·鬲)·시루(甑)·물동이(罐)·굽접시(豆)·鉢 등이 나오고 있다. 이는≪삼국지≫부여조에 “(토지가) 오곡 농사에 적합하다”는 것과 “음식을 먹는 데에는 俎豆를 사용한다”는 내용과 서로 부합한다. 한편 돼지뼈와 어망추가 많은 것으로 보아 농업·가축사육·漁獵경제의 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392)王亞注,<吉林西團山子石棺墓發掘記>(≪考古≫4期, 1960).
東北考古發掘團,<吉林西團山石棺墓發掘報告>(≪考古學報≫1期, 1964).
이 서단산문화는 전성기인 천년기 중기에는 騷達溝 평정산의 山頂大棺처럼 대형 석관이 산정에 단독으로 부장되고, 銅斧나 刀子 등 청동기가 17점이나 발견될 정도로 한 지역 首長의 권한이 상당히 성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서단산문화 晩期에 속하는 장사산393)장사산 촌락유적은 산 경사지의 방어적 성격을 띤 촌락으로, 5채 안팎의 가옥이 2∼3m 거리로 배치되어 7개의 세대공동체가 한 고장에 자리잡은 원시공동체 말기의 촌락공동체였다는 연구가 있다(황기덕,<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사회관계>2,≪조선고고연구≫4, 1987, 4∼6쪽). 및 토성자394)吉林省博物館,<吉林江北土城子古文化遺址及石棺墓>(≪考古學報≫1期, 1957)나 楊屯 大海盟395)吉林市博物館,<吉林永吉楊屯大海盟遺址>(≪考古學集刊≫5, 1987)
吉林省文物工作隊,<吉林永吉楊屯遺址第三次發掘>(≪考古學集刊≫7, 1991)
단계(기원전 3∼2세기)에 이르면 더욱 뚜렷해지고 묘제도 석관묘에서 토광묘로 교체되면서 철기가 부장되게 된다.396)장사산유적에서 발굴된 15기의 주거지 가운데는 구조가 복잡하고 유물이 풍부한 것과 구조가 매우 간단하고 유물도 매우 적은 것이 있다. 이것은 이미 이 당시(기원전 5∼3세기)에는 사유재산이 나타나고 그에 따라 빈부의 차이가 생겨났다는 것을 말해준다. 토성자유적(기원전 3∼2세기)에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져 발굴된 24기의 석관묘에서는 반수에 달하는 무덤들에서 부장품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吉林省文物工作隊,<吉林猴石山遺址及墓群發掘報告>,≪考古≫2期, 1980 및 吉林省博物館, 앞의 글). 대표적 서단산문화 후기(기원전 4∼3세기)유적인 토성자·양둔 대해맹·농안 田家坨子유적397)吉林大學歷史系 考古專業,<吉林農安田家坨子遺址試掘簡報>(≪考古≫2期, 1979). 등에서는 물동이·굽접시·사발(碗) 등의 토기가 나왔고 묘제 또한 토광목곽묘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한서 상층-망해둔문화와 기본적으로 일치하며, 조금 후대인 부여 초기단계의 것으로 비정되는 길림시 泡子沿前山유지398)吉林市博物館,<吉林市泡子沿前山遺址和墓葬>(≪考古≫6期, 1985).의 상층 퇴적층과 백금보문화지역에 가까운 楡樹縣 老河深유적 출토토기와도 동일하다(<그림 2>,<그림 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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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백금보-한서문화 토기
<그림 2>백금보-한서문화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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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서단산문화 및 부여문화 토기
<그림 3>서단산문화 및 부여문화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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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자연전산유형은 지역분포가 서단산문화와 기본적으로 중첩되는데, 이는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길림지구의 서단산문화를 직접 승계한 초기 철기문화라고 볼 수 있다. 토기는 주로 항아리·물동이·굽접시·발 등이 항상 보이고, 가로로 붙인 橋狀耳와 젖꼭지형 손잡이가 유행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서단산문화의 주요한 특징과 淵源을 같이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유수 노하심 中層文化에서 발견된 유물은 주로 墳墓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부장토기는 거친 夾砂陶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주로 항아리·물동이·굽접시·발 등이며 가로로 붙인 교상이와 젖꼭지형 손잡이가 있어 포자연전산유형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주목되는 것은 이들 포자연전산과 노하심문화가 모두 직접적으로 동일지점에서 서단산문화를 파괴한 층위관계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또한 포자연전산과 노하심유적에서는 모두 서단산문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중국 漢代의 특징을 갖고 있는 철제 钁·斧·鍤·鎌 등 농업생산도구가 발견되었다.399)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楡樹老河深≫(文物出版社, 1987). 따라서 이 두 유형은 마땅히 서단산문화를 직접 계승한 한대 부여의 문화유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포자연전산과 유수 노하심문화유형은 그 분포가 북으로는 송화강 북안의 흑룡강성 肇源縣 望海屯유지에 이른다. 출토 토기의 재질과 기형 및 토광목곽묘라는 매장습속에 있어서도 한서 상층-망해둔유형과 동일하다. 이들은 중국 한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한대 부여시기의 지배집단의 전형적 토광목곽묘가 帽兒山 등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400)토기와 묘제의 유사성이 있지만 유수 노하심유적이 부여의 유적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노하심유적은 많은 부분에서 서단산문화와 차이를 보이고 있고, 특히 透雕의 金飾牌라든지 火葬에 의한 매장방식 등 鮮卑(烏丸)계통의 양식도 많이 보여주고 있어 좀더 고찰할 필요가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이 유적이 부여의 영역내에 분포하고 있고 토기 등이 부여의 유적에서 나오는 것과 동일한 점 등에서 분석대상으로 삼았다(嚴長錄,<扶餘의 遺蹟과 遺物에 對하여>,≪民族文化의 諸問題≫, 世宗文化社, 1994, 204∼210쪽). 이는 제1송화강과 눈강 일대 및 제2송화강지역이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었고 주민집단도 어느 정도 동일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된다.

 이상의 정황은 한서 상층-망해둔문화가 고리국의 문화이고, 그들 주민들이 제2송화강 중류로 남하하여 지금의 길림을 중심으로 한 ‘穢地’에서 서단산문화를 누리던 부여 선주민과 융합하여 부족국가 부여를 건립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401)백금보·한서 상층문화는 부여의 원류집단인 고리국의 문화로 보는 것이 요즈음 중국학계의 입장이다(干志耿, 앞의 글 및 孫進己·張志立, 앞의 글).≪삼국지≫권 30, 魏書 東夷傳에 濊人은 이전에 이미 국가를 건립하였으며, “그 도장의 문구가 ‘濊王之印’이라 했고, 나라에는 ‘故城’이 있는데 이름을 ‘濊城’이라고 했다. 따라서 동명은 ‘스스로를 일러 亡人’이라 했는데 아마도 그러한 것 같다”라고 한 것은 바로 동명의 남하와 그에 따른 고리국과 부여가 일정 기간 병존한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예성은 길림시 송화강 동안의 龍潭山山城 혹은 東團山 南城子 일대에 비정되고 있으므로402)李健才,<夫餘的疆域和王城>(≪社會科學戰線≫4期, 1982), 170∼173쪽.
武國勳, 앞의 글.
그 위쪽에 존재한 한서 상층-망해둔문화는 고리국의 문화일 가능성이 높다.403)최근 흑룡강성 濱縣 동쪽에서 ‘慶華古城’이 발견되었다. 1984년 조사시에 이 성은 부여보다 빠른 古城유적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고고유물과 방위상으로 보건대 이는 漢初에 남천한 ‘濊城’ 이전의 古夫餘의 先世인 ‘橐離國’의 故地로 보는 견해가 있다(王綿厚,≪秦漢東北史≫, 1994, 175쪽). 앞에서 보았듯이 서단산문화와 백금보문화는 토기 등의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지만, 한서 상층-망해둔문화와 서단산문화 후기단계의 묘제 및 유물은 기본적으로 같은 주민계통의 문화로 볼 수 있으므로 동일 시기에 병존한 부여 선주민의 문화로 여겨진다.404)馬德謙,<夫餘文化的機個問題>(≪北方文物≫2期, 1991), 18∼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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