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Ⅲ. 부여
  • 2. 부여의 성장과 대외관계
  • 2) 부여의 대외관계
  • (2) 중국과의 관계

(2) 중국과의 관계

 부여와 중국과의 관계는 초기 단계부터 비교적 우호적이었으며, 일시적으로 정략결혼과 공수동맹이 맺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5호16국의 혼란기에 들어가면서 부여는 중국 동북면에서 크게 강성해진 慕容氏 燕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어 그 세력이 약해지게 되었다.

 서한 초에는 흉노가 강대하여 북부의 예맥족은 중국과 隔絶되어 漢왕조와는 관계가 비교적 적었다.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복한 후에 부여와 한왕조는 점차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나중에는 예속관계를 맺어 부여는 한왕조로부터 그 國君에게 주는 印綬를 받았다. 서한시대 말기에 왕위를 찬탈한 王莽은 건국한 원년(기원 9)에 새로운 통치체제를 확립하고 사신을 사방에 보내어 옛날 한의 인수를 거두어 들이고, 다시 새로운 왕실의 인수를 주었다. 이 때 “동으로 나간 사신은 현도·낙랑·고구려·부여에 이르렀다”521)≪漢書≫권 99, 列傳 69, 王莽.고 한다. 이 기사를 통해 부여는 이미 왕망 이전부터 서한왕조의 인수를 받았으며, 따라서 왕망 때에 이르러 改授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부여와 한왕조와의 관계가 진일보하게 된 것은 후한 초부터였다. 우선≪후한서≫동이열전 부여조와 본기에 의거해서 후한과의 교섭관계를 정리하면 다음의<표 1>과 같다.

연 대 관 련 내 용
1. 光武帝 建武 25년(49) 夫餘王遣使奉貢 光武厚答報之 於是 使命歲通
2. 安帝 永初 5년(111)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 寇鈔樂浪 殺傷吏民 後復歸附
3. 安帝 永寧 원년(120) (夫餘王)乃遣嗣子尉仇台 詣闕貢獻 天子賜尉仇台印綬金綵
4. 安帝 延光 원년(122) 夫餘王遣子(尉仇台) 將兵救玄菟 擊高句麗 馬韓 穢貊 破之
5. 順帝 永和 원년(136) 其王(夫餘王)來朝京師(洛陽) 帝作黃門鼓吹角抵戱
6. 桓帝 延熙 4년(161) (夫餘王)遣使朝賀貢獻
7. 桓帝 永康 원년(167) 王(夫餘王)夫台 將二萬餘人 寇玄菟 玄菟太守公孫域擊破之 斬首千餘級
8. 靈帝 熹平 3년(174) (夫餘)復奉章貢獻

<표 1>부여와 후한의 외교관계 기사

 후한정권은 건무 8년(32)에 동북의 각 종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祭彭은 41년에 요동태수가 되어 은혜를 베풀고 위엄을 부렸는데 이를 계기로 각 종족은 한왕조와 우호관계를 회복하였다. 동북지구에서 세력이 강대했던 부여는 49년에 한에 降附하여 후한왕조와의 관계 회복을 추진하였다. 같은 해 겨울 부여왕은 사신을 보내어 한조정에 봉헌하였는데 한의 통치자는 후하게 보답하였고, 이로 인하여 “命하여 사신이 해마다 통하게 했다”522)≪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夫餘國.고 한다.

 대외적으로 부여는 남으로부터 고구려의 위협과 서쪽 유목민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부여는 이 양대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을 꾀하였다. 중국측도 선비족과 고구려의 결속을 저지하고 이들을 제압하는 데 부여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에 부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기간에 걸쳐 부여와 한왕조는 정상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한왕조는 부여에 대해 두터운 예우로써 대접하였다.<표 1>에서 보듯이 120년에는 부여왕자 尉仇台가 후한 낙양에 가서 공물을 바쳤고, 2년 뒤에는 위구태를 현도성에 보내어 고구려의 침입에 맞서 한을 구원하였다. 136년에는 부여왕이 친히 京師에 가서 조공하였는데, 이 때 한의 통치자는 헤어질 때에 ‘黃門鼓吹와 角抵戱를 해서 보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이례적으로 접대를 하였다. 또한 역대 부여왕이 죽은 후에는 玉으로 만든 관을 썼는데, 한왕조가 “미리 옥갑을 현도군에 가져다 놓고 왕이 죽으면 현도군에서 가져다가 쓰게 했다”523)위와 같음.는 것은 부여와 한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부여는 후한과의 화친관계를 발전시키면서 한편으로는 고구려에도 사신을 보냈는데, 이는 고구려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세기는 부여와 고구려가 서로 견제하면서 요동평야로 진출을 시도하였던 시기이다. 현도·낙랑 양군은 명목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요동군에 흡수되어 있었다. 이 당시는 후한왕조가 적극적인 동방정책을 추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동태수를 중심으로 하는 군현세력과 부여·고구려 三者가 요동평원을 사이에 두고 각축을 벌이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2세기 초에 이르러 부여와 후한 사이에는 일시적인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사서에 기재된 것을 보면 부여와 후한왕조 사이에는 두번의 마찰과 전쟁이 있었다. 첫번째는 111년에 부여왕이 “步騎 7·8천 인을 거느리고 낙랑을 노략질하고, 吏民을 살상한 후에 다시 귀부하였다”고 한다.524)위와 같음. 다음으로는 167년에 부여왕 夫台가 2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약탈하니 현도태수 公孫域이 그것을 격파했다고 한다. 이들 기사는 부여와 한과의 우호적 관계를 생각할 때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교가 단절되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으며 174년부터 다시 국교가 회복되어 부여왕은 “다시 奉章 공헌하였다”525)위와 같음.고 한다.

 부여와 후한 양측 사이에는 그 뒤에도 밀접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2세기 말경 公孫度이 요동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동방의 패자로 군림했을 때 부여는 후한세력과의 관계 때문에 화친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공손탁의 宗女와 결혼하여 일종의 혼인동맹을 맺었다. 이후 魏가 공손씨를 멸망시킨 다음 幽州刺史 毌丘儉을 보내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에(244∼245) 현도태수 王頎가 부여를 방문하였고, 이에 부여의 權臣인 大使 位居는 大加를 시켜 위군을 환영하고 그들에게 군량을 제공하였다.

 한편 부여는 장기간 현도군의 관할 아래 있었는데, 한 무제시기에는 부여의 요청에 따라 요동군 관할로 바뀌게 되었다.526)이는 부여가 현도군이 아니라 요동군을 통하여 후한 왕실과 거래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부여와 현도군 사이의 관계가 오래 전부터 악화되어 있었고 167년 부여군의 현도 공격도 이와 관계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부여사>,≪조선전사≫2,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9, 147쪽). 그리하여 한왕조의 명령과 征調에 대해 부여는 충실히 이를 집행하였다. 121년 마한·예맥의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포위하였을 때 부여왕은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2만의 대군을 이끌고 가서 힘을 합해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5백여 級을 참수하였다고 한다. 이후에 고구려가 처음으로 중국의 통제하에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예맥이 모두 복종하니, 동쪽 변방에 일이 적어지게 되었다”527)≪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高句麗.고 하였다.

 이처럼 중국과 관계를 맺고 국가적 성장을 지속하던 부여는 285년에 이르러 요하 상류에서 일어난 선비족 출신의 慕容廆528)모용씨는 선비족으로 ‘廆’ 때에 요하 상류에서 일어나 앞서 부여를 공파하여(285) 東走케 하고, 또 요서지방을 침략하여 棘城(현 錦州부근)지방에 도읍하더니(294) 그의 아들 慕容皝은 스스로 ‘燕王’이라 일컫고 얼마 아니하여 龍城(지금의 朝陽)으로 천도하여(342) 위세를 떨쳤으므로 바로 이 해에 모용황은 대대적으로 고구려에 침입하여 고국원왕을 달아나게 하고, 용성 천도 4년 후(346) 마침내 부여까지 침략하였다.의 침략을 받아 국가적인 위기에 처하였다. 부여는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 왕 依慮는 자살하였으며 많은 자제들이 沃沮(北沃沮)529)沃沮를 동해안지방으로 비정하는 설(李丙燾, 앞의 글)과 간도지방의 北沃沮(池內宏,<夫餘考>,≪滿鮮史硏究≫上世篇 1, 東京;祖國社, 1951, 459·462∼464쪽)로 보는 설이 있는데 대체로 두만강유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魏書≫권 100, 고구려전에 보이는 435년경 ‘東至柵城’했다는 柵城이 바로 이곳에 설치한 고구려의 鎭城일 것으로 보고 있다.로 망명하였다. 한편 부여의 본국은 의려가 자살한 다음 해에 의려의 아들 依羅에 의하여 나라가 재건되었으나 이 재건된 부여국은 이미 그 옛날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무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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