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Ⅲ. 부여
  • 3. 부여의 정치와 사회
  • 1)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
  • (1) 중앙통치조직

(1) 중앙통치조직

 부여에는 중앙관직으로 王이 있었고, 그 밑에 여섯 가축으로 이름을 정한 馬加·牛加·豬加·狗加·大使·大使者·使者 등이 있었다.555)≪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부여는 일찍이 국가체제를 형성하였으므로 정치발전이 후진적이었던 주변 사회와는 달리 國王이 존재하고 있었다. 부여왕은 이전 예맥사회 단계의 濊城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이전에 ‘濊王之印’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556)위와 같음. 이 예성에 거처한 부여 왕에게도 國璽가 있었을 것이다. 부여의 왕위계승도 嫡長子 세습제에 준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삼국유사≫紀異篇의 동부여조에 나오는 “金蛙에 뒤이어 그의 맏아들 帶素가 태자가 되었고 그에 의하여 왕위가 계승되었다”는 이야기는 부여의 왕위가 세습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후 사회 발전과 함께 왕권도 강화되어, 3세기 전반 부여의 왕위는 簡位居-麻余-依慮로 이어지는 부자계승이 확립되었다. 특히 마여의 경우 孽子라는 단서가 있음에도 왕위에 올랐고, 또 그 아들인 의려가 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즉위한 것은 왕위의 부자상속이 원칙이었음을 말해준다.557)위와 같음.

 당시 부여의 왕권은 부자세습의 원칙하에 안정되어 있었고, 대외적으로도 일정한 집권력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삼국지≫부여조에 부여의 尉仇台왕에게 요동의 公孫度이 외교적 조처로 그의 宗女를 출가시켰다는 사실은 당시 위구태왕에게는 국제적으로 인정될 만한 국가적 통제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558)위와 같음. 이러한 점은 부여의 국가적 부강과 응집력을 시사해주는 “그 나라는 선세 이래로 일찍이 파괴된 적이 없었다”559)위와 같음.는 기사에 의해서도 방증된다.

 그러나 부여의 왕은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전제군주는 아니었다. 왕의 권력은 귀족들의 합의기구에 의해 일정한 제약을 받았다. 왕은 일정한 家系에서 나왔을 테지만 選任되었고, 왕은 ‘加’들의 대표로 군림하였으나 초월적 존재는 되지 못하였다. 마여의 경우는 諸加가 共立하였고, 의려의 경우는 ‘立以爲王’이라 하였으므로 역시 제가의 관여 속에 임명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560)부여의 왕위계승에는 특별한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諸加들이 제한적으로 관여하여 諸加評議에 의한 選擧制도 겸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부족장회의에서 맹주를 선거로 추대하던 방식의 遺制일 것이다. 또한 옛날 부여의 습속에 날씨가 고르지 못하여 수해나 한해가 생기고 그 해의 농사가 흉년이 들면 그 허물을 곧 왕에게 돌려 죽이거나 교체하였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방증해준다.561)≪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이처럼 전성기인 2∼3세기의 부여왕은 권력자이면서도 귀족의 대표자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서 일종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제가에 의해 공립되는 면이 강했다.562)井上秀雄,<朝鮮の初期國家>(≪日本文化硏究所硏究報告≫1, 1976), 78∼79쪽.

 부여사회에서 제가는 국가의 최고 관리로서 지방 행정사무를 관할하였다. 처음에 ‘가’563)‘加’는 대개 고구려어의 ‘皆’, 신라어의 ‘翰·干’ 등과 일치하는 것으로, 본래는 部族長을 의미하였는데, 뒤에 왕 또는 대관의 칭호가 되었다는 견해(金哲埈,≪韓國古代國家發達史≫, 春秋文庫, 1976, 63쪽 및 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214쪽)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加는 만몽계통의 汗(Han, Kan)·可汗(Gahan, Kagan)과 같은 말로 ‘귀한 사람’ 또는 ‘큰 어른’을 가리키는 존칭어로서 어떤 특정한 벼슬이름은 아니었다고 이해된다(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부여사>,≪조선전사≫2,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9, 128쪽).는 일정지역의 족장으로서 부족원에 의해 선출되어 군사·재판·제사 등의 중요업무에 대한 집행책임자에 지나지 않았으나, 부족사회의 발전에 따라 귀족화되었다. 즉 국가 형성의 초기 단계에서 족적 유대감이 강한 단위 정치체의 대소 족장세력이었던 가들은 연맹과 결속을 통하여 집권적 국가의 지배신분층으로 결집되어 가면서 점차 중앙의 관명인 大官·長官 직명을 띠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564)李丙燾, 위의 글, 214쪽. 이들 제가는 주로 하호를 통치하였는데 세력의 크기에 따라 수천 家 혹은 수백 가의 戶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평소에는 귀족 족장으로서 부락을 지도하였고, 적이 있으면 군사령관으로서 스스로 독자적으로 전장에 나가 싸웠다.565)≪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그러나 이들 제가들은 연맹 단계의 국가에 참여할 때 이미 대외교섭권이나 무역권 등을 국왕에게 빼앗겼고,566)盧泰敦,<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韓國史論≫2, 서울大, 1975), 132쪽. 비록 자체적으로 속관을 둘 정도로 자치권이 인정되었지만567)고구려에서 使者·皂衣·先人 등이 王의 직속 벼슬인 동시에 諸加들에 속한 벼슬이었던 예로 보아 부여에서의 大使·사자도 중앙벼슬인 동시에 제가들의 밑에 속한 벼슬이름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부족제사회가 고대국가의 형태로 변할 때 수반되는 舊制의 잔재 유풍이라 하겠다. 그것도 국왕의 영도력을 인정하는 조건 아래에서 새로이 편성된 지역의 백성을 지배하는 정도였다.

 이후 부여에서는 제가들 중에서 국왕 직속의 관리가 되었던 大使職이 많은 권한을 가져 정치적 비중이 한층 더 높아졌다.568)井上秀雄,<夫餘國王と大使>(≪柴田實記念日本文化史論叢≫, 1976), 78쪽.
金光洙,<夫餘의 ‘大使’職>(≪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上, 1993), 63∼68쪽.
마여왕 때에 牛加의 조카인 位居가 대사가 되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季父인 우가와 그 아들을 반역혐의로 처형까지 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569)≪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원래 ‘使者’류는 씨족 내부에서 신분이 열등한 자로 租賦를 통책하는 관리였다. 그러나 점차 그 직능이 중요시되어 여러 층의 사자로 분화되어 가는 가운데 위계가 높아져 행정적 관료로 성장하였다.570)金哲埈,<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이들 중 최고의 직위인 대사는 외교를 전담하고 大加를 지휘하기도 하며 우가를 단죄하는 등 국정을 총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여의 정치기구에서 대사직을 내외 행정실무를 관장한 최고관직이며, 가층을 포괄하는 국정실무의 최고위직이었다고 보기도 한다.571)金光洙, 앞의 글, 63∼68쪽. 그러나 부여의 정치기구는 국왕 직속의 정치조직과 제가 직속의 정치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사·사자 등 외교·군사적 업무를 주로 담당한 관료도 있었지만 이들이 제가와 구분되어 특정 직능을 분장한 官階로서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의 경우 대사자·사자의 직함을 띠고 있는 인물은 모두 方位部 출신으로 국왕 밑의 중앙관리였는데, 그 정치적 비중으로 보아 대체로 諸加階級에 해당하는 인물로 보고 있다.572)林起煥,≪高句麗 執權體制 成立過程의 硏究≫(慶熙大 博士學位論文, 1995), 74∼75쪽. 즉 중앙의 귀족들인 제가급 인물들이 대사자·사자 등 하위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여의 경우도 관계의 명칭이 고구려와 거의 비슷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부여의 정치는 왕을 중심으로 하여 그 밑에 국무를 관장하는 귀족세력으로서 마가·우가·저가·구가 등에 의한 귀족회의체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구체적인 실무 행정은 왕과 제가 밑에 동시에 속해 있는 대사나 사자 등에 의해 처리되는 체제였다. 그리고 지방의 경우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의 각 지역에서 족장 출신의 제가들이 자치적으로 휘하 읍락의 민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여전히 왕권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삼국지≫에 표현된 시기의 부여사회가 연맹체적 단계에서 중앙집권적 국가로 성장해가는 과정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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