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Ⅲ. 부여
  • 3. 부여의 정치와 사회
  • 2) 사회와 경제
  • (2) 법률과 형벌

(2) 법률과 형벌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를 보면 부여에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법률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609)≪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①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沒入하여 노비로 삼는다.

② 도둑질한 자는 그 물건의 12배를 배상[一責十二法]한다.

③ 간음을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④ 부녀자의 간음과 투기에 대해서는 더욱 증오시하여 모두 이를 극형에 처하여 그 시체를 서울 남쪽 산 위에 버려 썩게 한다. 다만 그 여자의 집에서 시체를 가져 가려고 할 때에는 牛馬를 바쳐야 한다.

 性情이 온후하여 평화적이었다고 하는 부여에서 이처럼 형벌이 가혹하였던 것은 그들 공동체의 조직원리를 철저히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610)李基白,<夫餘의 妬忌罪>(≪史學志≫4, 檀國大, 1970), 227쪽. 이것은 마치 사유재산제도의 형성 초기에 盜律이 엄한 것과 같은 이치로, 피지배계급의 이익에 배치되는 새로운 제도를 창설하는 경우에 지배계급이 창출하는 보편적 사상이었다.611)孫晋泰,≪朝鮮民族史槪論≫(乙酉文化社, 1948), 58쪽. 또한 “하나를 훔치면 12배로 갚아야 한다”는 조항은≪위서≫형벌지에 “官物을 훔친 자는 이를 5배로 갚아야 하고 私物은 10배로 갚아야 한다”는 것과 동일한 법률개념으로, 유목경제시대에 그 한계가 명백하지 못하였던 재산관념이 반영된 법속의 잔재로 생각된다.612)부여족의 생활은 어느 면에서 북방 유목민족이 지녔던 잔재가 남아 있다. 이는 부여인이 기본적으로 북방 유목민과 교류한 결과지만, 한편으로 그들 자신이 북방 유목민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살인과 상해에 대한 처벌은 바로 공동체의 구성원인 각 개인의 생명과 노동력을 존중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부여에서는 가족제도에 관한 규정이 중시되었음이 눈에 띄는데, 妬忌罪에 대한 가혹한 형벌은 一夫多妻制 내지는 蓄妾制의 풍습이 상류층에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던 결과일 것이다. 투기죄에 대한 처벌은≪삼국지≫의 기록 외에 그 이유를 전하는 자세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삼국지≫동이전 왜인조에는 “그 풍속에 나라의 大人은 모두 4·5명의 부인을 둔다. 하호는 혹 2·3명의 부인을 두는데 부인은 음란하지 않고 투기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당시의 동방사회는 가부장적인 일부다처제의 가족형태가 보편적이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남녀 간의 간음에 대한 처벌이 쌍벌주의가 아니라 여자만 처벌되었다는 것은 부여가 가부장권이 확립된 일부다처제사회였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한 명의 남편을 중심으로 다수의 아내가 가정생활을 꾸리고 사는 생활에서는 그것을 유지시켜 주는 규범으로서 투기를 처벌하는 법률이 있게 마련이다. 부여에서는 일부다처제 아래에서 가부장권을 확립하고 가족제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투기를 매우 엄중하게 처벌하였다. 그것은 바로 매장권을 박탈하는 것으로613)고대인들은 일단 목숨이 다한 인간이 땅에 묻히게 되면 곡식의 낟알처럼 그 영혼도 부활하게 된다는 地母神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重罪人에 대해서는 그들 영혼의 부활까지 박탈할 목적으로 철저히 봉쇄하였다. 부여의 투기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죽은 자의 영혼의 부활까지 막는 조처를 내리고, 처가에서 남자에게 당시의 재산인 소나 말을 갖다 바쳐야만 여자의 시신에 대한 매장이 가능하였을 정도로 그 처벌은 가혹하였다. 이러한 투기죄의 규정은 현재의 일부다처제사회에도 존재하지만 고대사회로 올라가면 그 처벌 규정이 보다 가혹하여 사형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614)이러한 규정은 부여에 한하는 것은 아니어서 고구려의 中川王(248∼270)의 후궁 貫那夫人이 王后 椽氏를 국왕에게 참소하였다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투기죄에 대한 처벌의 산 예에 속한다(李基白, 앞의 글, 3∼10쪽).

 부여에는 이러한 법의 제재대상이 되었던 죄인들을 감금하기 위한 감옥이 존재하였다. 감옥은 수도뿐만 아니라 전국 도처에 있었다고 보이는데, 여기에는 사형수 이외의 모든 법률 위반자들이 감금되었을 것이다. 특히 중대한 범죄자들은 국중대회인 迎鼓 행사시에 제가들의 합의에 따라 처형되었다. 한편 부여에서는 占卜의 습속이 유행하였다. 부여족은 “소를 죽여서 발굽으로서 그 길흉을 점쳤는데, 소의 발굽이 갈라지면 凶한 것으로 여겼고, 합쳐지면 吉한 징조로 여겼다”615)≪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고 한다. 부여에서는 전쟁이 발생하였을 때에도 이러한 천신제를 지내고, 그 길흉을 판단하는 방식으로 소를 죽여서 굽이 붙고 벌어진 것으로 길흉을 판별했다고 한다. 이같은 점복은 아마도 중국 殷의 甲骨占法과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생각되며 흉노사회에서는 물론 고구려·삼한 등 북방 및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보편적인 관습으로 행해졌던 것이다.616)孫晋泰, 앞의 책,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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