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Ⅴ. 삼한
  • 2. 삼한의 문화
  • 1) 삼한의 생활과 풍속

1) 삼한의 생활과 풍속

 삼한의 생활양식 중 먼저 주거에 관한 기사를 보면 馬韓人은 움집에 살았는데 모양이 무덤 같았다고 하며, 辰弁韓의 가옥은 나무토막을 가로로 쌓아 올려 그 모양이 마치 중국의 감옥과 같다고 하였다. 분묘에 비해 집자리유적에 관한 고고학적 조사자료는 그리 많지 않으나 지금까지 조사된 바로는 주거지 평면은 원형·방형·말각방형 등으로 다양하고 집의 형태는 움집과 반움집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는 풀과 진흙을 섞어 벽체를 형성하였고, 지붕은 갈대나 이엉으로 덮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786)崔夢龍·金庚澤,<全南地方의 馬韓 百濟時代의 住居址硏究>(≪韓國上古史學報≫4, 1990), 15쪽. 그리고 경남 합천 大也里 집자리에서는 爐址가 모두 가옥의 서쪽에 갖추어져 있어 변한은 부엌이 모두 집 서편에 붙어 있다는 동이전의 기록과 대비되기도 한다. 이에 비해 경남 김해 鳳凰臺 주거지내에서는 노지가 한 기도 발견되지 않으며 전반적으로 김해지역에서는 노지가 없는 편이 우세하다고 한다.787)李在賢,<金海鳳凰臺遺蹟 2차發掘調査槪要>(≪第36回 全國歷史學大會 發表要旨≫, 1993), 548쪽. 그러나 한강유역의 渼沙里유적에서는 주거지 북쪽에 부뚜막시설이 발견되기도 하고,788)고려대학교 발굴조사단,≪渼沙里≫5(학연문화사, 1994), 120·182·331쪽. 김해 봉황대와 府院洞 A지구에서는 高床家屋이 조사되어 지역과 용도 및 계절에 따라 가옥의 형태도 다양하였다. 그러나 고고학 자료의 부족으로 계층에 따라 가옥의 크기나 구조에 차이가 있었는지 혹은 있었다면 어떠한 내용의 것이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취락 주변을 둘러 싼 방어시설에 대해 진변한에는 성곽이 있으나 마한에는 성곽이 없다고 하였다. 방어시설의 유무는 정치적 긴장관계의 반영이므로 지역과 상황에 따라 일률적으로 단정하기 곤란한 면도 있으나 고고학 자료상으로는 마한이나 진변한의 구분없이 성곽시설은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전북 扶安郡에서도 표고 20∼100m 높이에 위치한 토성유적이 다수 조사 보고되고 있으며789)全榮來,<扶安地方 古代圍郭遺蹟과 그 遺物>(≪全北遺蹟調査報告≫4, 1975). 경상도지역에서도 취락유적지 주변에 설치된 木柵이나 環濠시설의 조사예가 늘어나고 있다. 근래 조사된 대표적인 것으로 김해 봉황대유적이 있으며 이 유적에서는 1993년 조사시 의창 다호리유적과 같은 시기로 추정되는 폭 2.5m, 깊이 1.5m의 단면 U자형 환호가 발굴되었고 환호의 바깥쪽으로 목책 구멍 5개가 조사되었다.790)李在賢, 앞의 글, 542∼549쪽. 이 밖에 대구 達城유적이나 梁山貝塚, 창원 加音丁洞 堂山貝塚 등에서도 목책과 환호유적들이 확인되고 있어 취락 주위에 설치된 방어시설의 구체적 모습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삼한의 城柵 또는 성곽은 기본적으로 무문토기시대 이래의 목책과 환호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중국 군현과의 접촉을 통해 토성에 대한 지식이 알려지면서 토루를 쌓아 목책을 보강한 형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어시설은 일반 취락에까지 해당되는 시설물은 아니다.≪삼국지≫동이전에는 노동력 동원과 성곽 축조작업의 주관자를 ‘官家’로 표현하고 있어 방어시설의 축조가 정치적 지배자에 의해 주도된 것임을 나타낸다. 성곽 축조를 위해서는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며 노동력 동원 범위가 광범위하므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행정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복합적인 방어시설은 정치·경제활동의 중심 취락인 국읍과 읍락에 국한되었다.

 복식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삼한에서는 비단을 포함하여 각종 布가 생산되었으며(緜布·縑布·廣幅細布), 베두루마기와 짚신 혹은 가죽신을 신었다고 한다. 삼한인들은 금은과 화려한 비단은 진기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소중하게 여겨 의복에 장식하거나 목걸이 또는 귀걸이로 달고 다녔다고 한다. 구슬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청동기시대 이래의 습속으로 청동기시대의 족장들이 착용한 대롱구슬이나 天河石製 飾玉으로 만든 목걸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청동거울과 함께 족장의 권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물이었다. 삼한에 이르러 장신구의 재료가 여러 가지 색깔의 유리나 수정으로 바뀌고 형태도 조금씩 달라지면서 주술적인 의미는 상대적으로 줄어 들었다. 그러나 유리나 수정제 장신구들은 중국산 수입품으로 대부분이 지배계층의 분묘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사회적인 신분과 경제적인 부의 상징으로서 여전히 중요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한인들은 상투모양으로 머리를 틀어 올렸고, 변한인들은 의복이 청결하고 머리가 길었다고 한다. 廉斯鑡설화에 漢人노예들이 머리를 짧게 깎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긴머리나 맨상투머리는 노비와는 다른 일반 읍락인들의 머리 모양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삼한인들은 중국제 의복과 모자를 좋아하였다거나 중국 군현을 방문할 때 중국제 옷과 모자를 빌려 입는다고 하였으므로 그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지배계층의 인물들은 권위를 나타내는 모자나 관식을 착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변진인들은 앞면에 뿔모양 장식을 붙인 관모를 썼기 때문에 변진이란 명칭이 붙여졌다는 해석도 있다.791)李丙燾,≪韓國古代史硏究≫(博英社, 1976), 290쪽.

 ≪삼국지≫동이전에 의하면 삼한에서는 파종을 끝낸 5월과 농사일을 마무리한 10월 두 차례에 걸쳐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면서 밤낮으로 즐겼다고 한다. 수십 인이 서로 동작을 맞추어 땅을 밟으면서 몸을 낮추었다 올리는 동작의 춤이었는데 가락이 鐸舞를 닮았다고 하였다. 땅을 밟는 동작은 大地神을 즐겁게 하고 땅의 생육력을 높여 풍요를 기원하는 穀靈을 포함한 地靈에 대한 제사의식에 속한다고 한다.792)三品彰英,<銅鐸小考>(≪古代祭政と穀靈信仰≫, 平凡社, 1973), 15∼25쪽. 이러한 地神에 대한 祭儀와 대비되는 것이 天神에 대한 제의로 삼한에서도 국읍의 天君이 주관하여 천신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천신에 대한 제사는 북방계 샤머니즘에 원류를 두는 제의로 부여·고구려·동예에서는 10월에 거행하는 수확제가 천신에 대한 제사로 되어 있다.793)三品彰英, 위의 책, 246∼248쪽. 삼한에서 거행되는 농경의례가 천신과 지신 두 계통이 이미 습합된 형태인지 아니면 5월의 제의와 10월 수확제가 내용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地靈에 대한 제사가 더 원초적인 것이고 천신에 대한 제사가 좀 더 발달한 농경 단계의 제의로 간주되고 있어,794)三品彰英, 위의 책, 15∼17쪽. 삼한의 농경제 행사에 踏地하는 풍속이 남아 있다는 것은 북방지역과 구별되는 삼한의 생산과 문화 기반의 중요한 특징을 나타내는 요소라 하겠다.

 이 밖에 삼한에는 蘇塗신앙이 있었다. 각 국에는 別邑이 있어 소도라 이름하였는데 큰 나무를 세워 북과 방울을 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곳으로 도망가면 잡아올 수 없었으며 소도를 세운 뜻은 불교와 같으나 선악의 기준은 서로 다르다고 하였다. 소도에 대해서는 읍락간의 경계 표지를 겸하여 부락의 경계신 내지는 부락의 수호신을 모시는 곳이라는 해석과795)孫晋泰,<蘇塗考>(≪韓國民族文化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8). 함께, 소도는 삼한의 천군이 있는 곳인 동시에 봄과 가을에 걸쳐 천군이 농경의례를 거행하는 곳이라는 해석도 있다.796)金貞培,<蘇塗의 政治史的 意味>(≪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高麗大 出版部, 1986), 160쪽. 이와 달리 소도신앙은 읍락단위의 부락제에서 발전한 것으로 소국 성립 이후 여러 읍락에서 거행되던 개별적인 제사행위를 하나로 묶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797)金杜珍,<三韓 別邑社會의 蘇塗信仰>(歷史學會 編,≪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一潮閣, 1985), 102∼103쪽.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소도가 있는 곳은 주민들의 일반 거주지역과는 구별되는 장소로 소도에서는 북과 방울이 그들이 믿는 귀신과 더불어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 지역 자체가 신성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소도를 세운 뜻이 불교와 같다는 것은 소도가 종교적인 기능을 가진 예배장소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개인적인 기복행위뿐 아니라 집단의 안녕이나 번영을 기원하는 종교행사가 행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 방울은 세형동검문화 단계 이래 중남부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어 오던 儀式用具의 하나로 소도신앙이 청동기문화 단계 이래의 토착신앙이 계승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소도에서 숭배되는 귀신이 어떤 종류의 신이었는지, 소도신앙의 주관자와 천군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 의문점이 적지 않다.

 요컨대 삼한사회는 청동기문화 단계의 단순하고 복합적인 상태의 원시신앙과 제의가 철기문화의 보편화와 유이민의 정착, 정치·사회적인 변화를 배경으로 새로운 문화요소를 가미하면서 농경축제·제천의식·소도신앙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 발전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변화의 양상도 지역에 따라 일정한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삼국지≫동이전에 변진은 진한과 섞여 있으며, 의복 거처도 모두 진한과 같고, 언어 법속도 서로 닮았으나 귀신을 섬기고 제사지내는 것은 서로 다르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진한과 변한은 종족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일한 기반을 가지고 있으나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다른 점이 있다는 뜻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이같은 현상은 청동기문화 단계에서 철기문화 단계로의 이행과정에서 제의와 신앙상에 나타나는 지역별 특성이 형성된 결과라고 하겠다.

 삼한의 장례 풍속에 대한 기록을 보면 棺은 있으나 槨은 없다고 하였으며 진변한에서는 큰 새의 깃털을 함께 묻어 주었는데 이는 죽은 자가 날아 오르기를 바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해 기원후 2세기까지의 진변한의 중심 묘제는 지하에 장방형의 흙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만든 관에 주검을 넣어 매장하는 土壙木棺墓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처음에는 통나무를 세로로 켜서 속을 파내어 관의 몸체와 두껑을 만든 통나무관을 썼으나 이후 판재로 된 나무관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의창 茶戶里고분들은 통나무목관의 대표적 예로 한반도에서 자생하는 굴참나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2세기 이후가 되면 매장 주체부가 확대되면서 대형 무덤을 중심으로 목관 바깥에 목곽시설을 한 土壙木槨墓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무덤 속에는 주인공이 살아 있을 때 사용하거나 소유했던 각종 물건들이 부장되었다. 생활용기와 무기 및 생산도구를 비롯하여 제의에 사용된 음식물이 제사용기에 담겨져 함께 매장되었으며 주인공의 사회·경제적 능력에 따라 종류와 수량이 다양하였다. 마한지역의 분묘유적에 대해서는 조사된 자료가 많지 않으나 최근 토광목관묘와 토광목곽묘를 매장 주체부로 하여 둘레에 周溝 즉 물도랑을 돌린 주구묘가 여러 곳에서 발굴되었다. 주구묘는 진변한지역에서도 조사되고 있어 삼한의 중요 묘제의 하나로 주목된다.798)考古學部,≪第39回 全國歷史學大會 發表要旨≫(1996), 323∼379쪽. 이 밖에 삼한에서는 甕棺墓(독무덤)도 널리 쓰이고 있었는데 옹관묘는 주로 소아용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목관묘나 목곽묘와 같은 중심 묘제에 부수되어 나타나는 陪葬墓의 성격을 가진 경우도 있다. 이 시대의 옹관묘는 지표상에 얕은 구덩이를 파고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토기를 서로 맞대거나 두껑을 덮어 관으로 사용하여 주검을 매장한 것이다. 마한지역은 목관묘나 목곽묘보다 옹관묘의 비중이 더 컸으며 마한의 중심 묘제는 옹관묘였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799)崔盛洛,≪全南地方 原三國文化의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2), 178∼179쪽. 특히 영산강유역의 마한 소국에서는 3세기 말∼4세기 이후 고분출현기에 이르러 옹관을 매장시설로 하는 대형의 봉토고분이 유행하였다. 이처럼 옹관묘가 성인을 위한 장제로 발전하면서 일상용기가 아니라 매장용 옹관을 별도로 제작하여 사용하는 등 옹관묘의 강한 전통을 나타내는 지역도 있다.

 진변한지역의 특이한 습속으로 扁頭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아이가 태어나면 곧 돌로 머리를 눌러 편평하게 하였는데 지금 진한인은 모두 편두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해 禮安里 85호와 99호 고분에서 발견된 두개골의 계측치 분석 결과 편두 사실이 입증되므로 편두 습속은 진변한 모두에 해당되며, 이는 세계 각지의 원시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頭蓋變形의 습속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한의 남자들은 때때로 문신을 한다’거나 진변한조에 ‘倭에 가까운 지역의 남녀는 문신을 한다’고 하여 삼한의 문신 풍속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남방아시아 계통의 문화요소가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800)金廷鶴,<加耶의 歷史와 文化>(≪韓國上古史硏究≫, 汎友社, 1990), 223∼228쪽. 또한 고고학적 조사에 의해 삼한에서도 卜骨의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경남 熊川패총과 부산 朝島패총에서는 사슴의 뿔에 평행선을 새긴 복골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김해 부원동 A지구와 C지구에서도 산돼지의 견갑골과 사슴의 뿔을 이용한 복골이 발견되었으며, 전남 해남 群谷里패총에서도 사슴과 돼지의 견갑골을 이용한 복골이 확인되었다.801)金廷鶴, 위의 글, 228∼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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