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Ⅱ. 고구려의 변천
  • 1. 체제정비
  • 3) 4세기말 이후의 체제정비

3) 4세기말 이후의 체제정비

 4세기말 이후에는 소수림왕의 개혁작업과정에서 제시된 방향에 따라 정치·군사·경제·사회·사상 등 전반적인 면에서 체제정비가 진행되었다.

 먼저 중앙정치면을 보면, 고구려 전역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중앙통치와 각 나부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반자치적인 통치로 이원화되어 있던 통치체제가 중앙집권화되면서 일원화되었다. 이와 함께 다원적으로 구성되어 있던 관등제가 兄系와 使者系 官位를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 관위제로 재편되었다.156)金哲埈,<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130∼135쪽).
武田幸男,<高句麗官位制の史的展開>(≪朝鮮學報≫86, 1978 ;≪高句麗史と東アジア≫, 東京 ; 岩波書店, 1989, 368∼370쪽).
이 시기에는 형계와 사자계 관위가 모두 각각 분화되고 있는데 이는 영역의 확대에 따라 편입된 다수의 지배층들을 중앙집권적 지배질서 속으로 편제할 필요가 있었고, 또 수취관계 업무를 담당할 관인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관등제는 이후 등급이 더 세분화되고 새로운 관등도 첨가되면서 더욱 발전되었다.

 관등제의 정비와 더불어 관직도 분화되고 관부도 증설되었을 터인데 관련 자료가 부족하여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이 때 태학이 설치되었으므로 國子博士·大學士 등의 관직이 소수림왕대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국초부터 중앙정치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던 제가회의가 관료적 귀족들의 회의체인 군신회의적 성격으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존재했다.157)金賢淑, 앞의 글(1995). 물론 국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귀족회의의 역할도 축소되고 발언권도 약화되었겠지만, 회의를 통해 귀족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통치하는 전통적인 정치운영방식은 말기까지도 지속되었다.

 이외 광개토왕 6년(396)에 왕이 後燕의 慕容寶로부터 ‘平州牧遼東帶方二國王’이란 작위를 받고 처음으로 長史, 司馬, 參軍을 설치했다는 기사에서158)≪梁書≫권 54, 列傳 48, 東夷 高句驪. 「將軍府」가 개설되었다고 보거나,159)徐永大,<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 ―王權 및 中央集權的 支配體制의 强化과정과 관련하여―>(≪韓國文化≫2, 서울大 韓國文化硏究所, 1981), 111∼112쪽.<泉男生墓誌銘>에 보이는 ‘中裏大兄’과 ‘中裏位頭大兄’이라는 관등에서 「中裏府」가 존재했다고 보기도 한다.160)盧重國, 앞의 글, 139∼140쪽. 그리고 幽州刺史 鎭의 墨書銘에 보이는 中裏都督, 장사, 사마, 참군 등의 관직에서 「幕府制」의 실시를 추정하기도 한다.161)林起煥,<4세기 고구려의 樂浪·帶方地域 경영>(≪歷史學報≫147, 1995), 36∼37쪽. 이와 같은 조직들은 모두 단편적인 기사를 통해 그 존재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어서 현재로서는 구체적인 운영실태 등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같은 새로운 관직과 관부 및 관등명의 출현이 곧 당시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발전양상을 보여주는 것임은 분명하다.

 체제정비는 지방통치제에서도 이루어졌다. 즉 다원적이고 간접적인 집단지배체제에서 城을 단위로 한 일원적이고 직접적인 통치체제로 바뀌었다.162)武田幸男,<廣開土王碑からみた高句麗の領域支配>(≪東洋文化硏究所紀要≫78, 1978 ; 앞의 책, 100∼102쪽). 지방관의 존재는 烽上王代에 新城宰와 新城太守를 역임했던 高奴子에게서 초기적인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서쪽 국경의 신개척지이자 방어의 중심지역인 新城에 ‘宰’로 파견된 北部小兄 고노자는 慕容廆가 침략했을 때 공을 세워 大兄으로 승급했고, 이후 ‘太守’로 승진하였다.163)≪三國史記≫권 17, 高句麗本紀 5, 봉상왕 2년 8월·5년 8월. 이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국경 요새지에 성을 쌓은 후 중앙으로부터 관인을 파견하여 지방행정과 군사업무를 겸임하게 하는 것이 직접적인 지방지배의 초기 형태였다.164)琴京淑,≪高句麗 前期의 政治制度 硏究≫(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5), 128∼133쪽. 즉 국경방위에 치중하면서 주변지역에 대해서는 기존의 재지지배층을 매개로 하여 조세를 수취하는 據點城 중심의 부분적 지배형태였다.

 4세기에 들어와 고구려는 축성작업을 활발하게 벌여 지방통치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그리고 4세기 후반부터는 주변의 자연촌과 그 내부의 자연호까지 파악하여 포괄적으로 지배하는 전면적인 영역지배로 점차 발전하였다.<牟頭婁墓誌>에 보이는 ‘北夫餘守事’나<中原高句麗碑>에 보이는 ‘古牟婁城守事’는 이미 영역지배를 행하는 한 단계 발전한 지방관이었다. ‘守事’의 상급 지방관이나 하급 지방관의 모습이 이 시기 자료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 때에도 2단계 이상의 지방조직이 존재했을 것이다.<廣開土王陵碑>에 의하면 각 성에서 守墓人을 戶단위로 징발하는데, 총인원을 정해진 숫자에 맞추어 차출하였고, 새로 정복한 지역의 여러 성과 그 하위단위인 村의 수가 정확하게 명기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광개토왕과 장수왕대에는 이미 자연촌의 인구까지도 국가에서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정황들을 통해 볼 때 당시의 지방통치는 하급 지방관이 지배하는 권역 몇 개를 ‘수사’가 관할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던 것 같다.

 이후 지방통치조직은 4세기 중·후반에 정비된 중앙집권적이고 일원적인 제도를 기본으로, 더욱 체계화되어 대·소성을 3단계로 조직한 보다 전면적이고 완비된 영역지배방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물론 이 때에도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특수한 役에 종사하는 집단천민적 성격의 존재들이 있었지만, 이들도 역시 국가가 관할했으므로 일원적인 직접지배가 기본적으로 관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방제도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 군사제도이다. 당시의 지방관은 民政官이자 軍政官적 성격을 가졌다. 따라서 군사조직이 곧 지방조직의 일면을 구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165)山尾幸久,<朝鮮三國の軍區組織>(≪古代朝鮮と日本≫, 東京 ; 龍溪書舍, 1974), 154∼161쪽. 광개토왕의 신라 구원전에 步騎 5만이 동원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4세기 중·후반부터는 일반민도 병사로 동원되었다. 또 각지의 지역주민들로 구성된 지방군이 지방통치의 중심권역에 있는 주요 성에 편성되어 있었다.166)徐永大, 앞의 글, 112∼113쪽.

 당시는 부족한 산물을 보충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약탈전쟁을 벌이던 단계에서 벗어나, 고대국가의 성장·발전을 위하여 삼국이 경쟁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인민을 확보하려고 전쟁하던 시기였다. 전쟁의 양상이 보다 격화되었고 대규모의 인원과 물자가 동원되어 총력전을 벌였다.167)金瑛河,≪三國時代 王의 統治形態 硏究≫(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88), 124∼127쪽. 그러므로 소수의 지배층들이 특권적으로 전투를 수행하고 下戶들은 그들의 사적인 예속민으로서 물자보급만 담당하던 것과는 달리, 일반민들도 국가와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참전하였다. 이것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정비과정에서 군사제도도 노비를 제외한 모든 민들을 군역에 동원하는 皆兵制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168)李基白,<高句麗의 扃堂>(≪歷史學報≫35·36, 1967), 51∼52쪽. 그리고<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王幢’이라 불리는 국왕 직속부대가 중요 군사력으로서 활동하였고, 이전에 존재했던 大加의 사적인 군사조직은 국가의 공적 질서 속에 모두 편입되었다. 광개토왕과 장수왕은 이같이 정비된 군사제도를 바탕으로 4세기 후반부터 대외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영토를 급격히 팽창시킬 수 있었다.

 집권체제의 정비에 따라 신분제 역시 정비되었다. 자료가 없어 신분제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고구려인 전체가 율령의 지배를 받게 됨에 따라 이제는 이전의 集團隷民들도 같은 고구려민으로서 동일한 신분제 아래 편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광개토왕릉비>에 동예나 양맥지역의 출신자들에 대해 ‘舊民’이라 표현한 데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신분제는 크게 귀족·평민·천민의 세 신분층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사회가 발전하면서 각 신분층은 다시 분화되었다. 즉 지배계층인 귀족층도 승진의 한계를 가진 몇 개의 계층으로 나뉘어지고 평민들도 경제적 부의 차이에 따라 다시 몇 개의 계층으로 세분되었다.

 이와 함께 조세제도 정비되었다. 전국의 민을 公民으로 자리매김하였으므로 이들에 대한 무분별한 수탈은 지양되었다. 그리고 집단을 단위로 하여 수시로 공납을 바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률에 의거하여 규칙적이고 체계적으로 조세를 수취하게 되었다. 人頭稅 중심의 조세제였으므로 人丁의 숫자 등을 고려하여 일정한 기준에 의해 등급화하여 수취했을 것인데, 6·7세기가 되면 인두세와 더불어 재산의 보유정도에 따라 상·중·하의 3등호로 구분하여 호세를 부과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였다.169)김기흥,≪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역사비평사, 1991), 50∼58쪽.

 지금까지 살펴본 4세기말 이후의 체제정비에서 나타난 하나의 지향성은 중앙집권체제의 구축이란 점이다. 이것은 곧 국왕권의 강화와 국왕중심의 정치운영의 지향이라 할 수 있다. 왕권강화와 중앙집권화는 동시에 진행되는 사항이면서 때로는 양자가 서로 이끌고 밀어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소수림왕 이후 전개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구축과정에서 왕권강화작업도 꾸준히 이루어졌다.

 그 일환으로 먼저 고구려왕계를 현왕실 중심으로 일원적으로 종합하되 부여지역의 병합이라는 당대의 현실에 바탕하여 계루부왕실의 북부여출자설을 공식적으로 정리하였다.170)盧泰敦,<朱蒙의 出自傳承과 桂婁部의 起源>(≪韓國古代史論叢≫5,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3). 그리고 주몽이 天帝의 핏줄을 이은 天孫이요 농업신인 河伯의 외손이라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 건국신화를 정리함으로써 시조의 신성성을 이어받은 왕실의 존엄성을 부각시켰다. 계루부의 시조인 주몽을 고구려인 전체의 시조로 굳건하게 위치지워 국가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내부 구성원의 결집을 도모하였다. 이 때 특히 대외정복활동으로 국력을 강화시킨 대무신왕을 강조함으로써 4세기 이후 고구려의 지향방향을 제시하고, 그를 위해 국왕 중심으로 힘을 결집할 수 있게 했다.171)趙仁成,<4·5세기 高句麗 王室의 世系認識 變化>(≪韓國古代史硏究≫4, 1991), 65∼68쪽.

 이와 동시에 이 때 정리된 王室世系에 따라 先王의 업적을 서술한 역사책도 편찬하였다. 이것이 곧 嬰陽王 11년(600)≪新集≫을 편찬할 때 자료로 삼은≪留記≫100권인데,172)≪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영양왕 11년 정월. 소수림왕을 전후한 시기에 서술된 것으로 추정된다.173)李基白,≪우리 歷史를 어떻게 볼 것인가≫(三星文化財團, 1976), 19쪽.
井上秀雄,<神話に現れた高句麗王の性格>(≪朝鮮學報≫81, 1976), 44∼45쪽.
국가가 공적으로 편찬한 역사서에 정리된 건국신화와 왕실세계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당시의 귀족들도 이 건국신화에 자신들의 출자전승을 접목시킴으로써 가문의 유구성을 과시하고, 또 왕실과의 친밀성 등을 강조함으로써 특권을 유지하려고 하였다.174)徐永大,<高句麗 貴族家門의 族祖傳承>(≪韓國古代史硏究≫8, 1995), 179∼181쪽.

 왕실의 존엄성을 과시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으로 고국양왕 9년에 “國社를 세우고 宗廟를 수리하라”는 명령을 유사에게 내린 바 있다.175)≪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양왕 9년 3월. 국사의 건립은 계루부왕실과 소노부의 社稷이 병존하는 상태를 정리하여 현왕실 중심으로 사직체계를 일원화시킨 것을 의미한다.176)趙仁成, 앞의 글, 71∼73쪽. 또 종묘의 수리는 왕실의 정통성과 신성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광개토왕대에 수묘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장수왕이 부왕의 사후 그 유훈을 받들어 왕릉의 보호와 관리에 관한 제반 제도를 정비하여 역대 선왕의 왕릉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도 했다.177)金賢淑,<廣開土王碑를 통해 본 高句麗 守墓人의 社會的 性格>(≪韓國史硏究≫65, 1989). 이러한 왕실의 존엄성을 고취하려는 노력은 광개토왕대의 비약적인 영토확장과 국제적 위상강화에 힘입어 큰 성과를 보게 되었다. 瑞鳳塚에서 출토된 延壽銘 銀合杅와<中原高句麗碑>에 나오는 ‘太王’·‘大王’ 및<廣開土王陵碑>와 壺杅塚 출토 壺杅, 그리고<牟頭婁墓誌>에 나오는 ‘好太王’·‘好太聖王’·‘聖太王’ 등으로 미화된 왕호는 이 시기 강화된 왕권의 위상을 반영한다. 그리고 광개토왕 이후부터 葬地名에 따라 王號를 붙이던 전통적인 방식을 버리고 왕의 생전의 위업이나 특징, 치세시대의 성격을 표현하는 諡號와 같은 성격의 왕호를 사용하기도 했다.178)鄭早苗,<高句麗王系小考>(≪朝鮮歷史論集≫上, 東京 ; 龍溪書舍, 1979).

 소수림왕 이후 전개된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체제정비를 통하여 고구려는 5세기대에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179)孔錫龜,<高句麗의 領域擴張에 대한 硏究 ―四世紀를 중심으로―>(≪韓國上古史學報≫6, 韓國上古史學會, 1991). 永樂, 延壽 등 자체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독자성을 과시하였고, 분열된 중국왕조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전쟁과 외교적 갈등관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영토와 인민을 확장했으며, 남조와 북조 모두와 교류하면서 대등한 외교를 펼치기도 했다.180)徐榮洙,≪三國時代의 對中關係硏究≫(檀國大 博士學位論文, 1981). 그리고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중국과 유목민세계와 대등하면서도 그와는 다른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여, 스스로 中華라 자처하는 天下觀을 대내외에 표방하였고, 그 천하관에 입각하여 백제·신라·동부여 등 문화적 동질성을 가진 지역 내의 국제질서를 자국 중심으로 이끌어가려고 하였다.181)盧泰敦,<5世紀 金石文에 보이는 高句麗人의 天下觀>(≪韓國史論≫19, 서울大 國史學科, 1988). 이에 따라 백제 등이 반발하기도 하였고, 중국대륙의 왕조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北魏에서 고구려가 南齊 다음가는 강국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정도로 국제적 위상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182)≪南齊書≫권 58, 列傳 39, 東南夷 高麗國.

<金賢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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