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Ⅲ. 수·당과의 전쟁
  • 1. 수와의 전쟁
  • 3) 수의 침입과 고구려의 살수대첩

3) 수의 침입과 고구려의 살수대첩

 수에서는 문제에 이어 煬帝가 즉위하였다(605). 그는 고구려 영양왕 23년(612)과 24년·25년의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입했는데, 612년 전쟁이 가장 큰 규모였고 전쟁은 모두 수의 일방적 침략을 고구려에서 방어하는 성격의 것이었다.

 수 양제는 남조의 昏主的 皇帝와 북조의 폭군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博學·能文하였고 사치·방탕하며 시기하고 흉악하여 살육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 양제는 곧 수도를 長安에서 洛陽으로 옮겨 그 둘레에 2천여 里의壕溝를 파고 낙양성을 축조하였으며 洛水 위에 顯仁宮을 지었다. 또 낙양에서 長州까지 大運河를 뚫어 남북의 교통과 식량수송에 이용하였는데 이를 고구려 침략의 군대·노무자·군량보급선으로 활용하려 하였다.

 한편 6세기 후반부터 더욱 강성해진 突厥은 隋代에 들어와서 동·서돌궐로 분열되었다. 585년에 동돌궐이 복속되자 수 양제는 이들을 안무하기 위해 啓民可汗의 장막을 순시하였다. 이 때는 고구려 영양왕 18년(607)으로 고구려 사신 또한 계민에게 파견되었으므로 공교롭게도 수 양제와 마주쳤다. 이 자리에서 양제와 裵矩는 고구려의 입조를 강요했고 입조하지 않으면 계민을 시켜 명년에 정벌하겠다고 위협하였다.396)≪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영양왕 18년. 이 때 고구려는 돌궐과 우호관계를 맺어 수를 견제할 의도였을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397)黃約瑟,<試論隋代對高句麗的認識>(≪高句麗文化國際學術會發表要旨≫; 延邊, 1993)에서 “隋煬帝和突厥啓民可汗之會, 可以說是隋煬帝一朝對外關係的一個重要轉捩點”이라 하였다.≪隋書≫권 67, 列傳 32, 裵矩傳에서는 위의 기사에 이어 “高元不用命 始建征遼之策”이라 하였다. 수는 고구려 침략정책을 굳히고 610년에는 전쟁준비를 명령하였다. 즉 兵具와 器仗을 점검하여 모두 精新케 하되 함부로 만들면 죽이게 하였던 바 兵馬가 10만 필에 이르렀다고 한다. 611년 4월에는 양제가 郡 臨朔宮에 이르러 전국의 참전군대를 탁군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612년 정월, 출병에 앞서 장문의 조서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고구려 침략 명분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 요지는 첫째 고구려가 번성한다는 것, 둘째 거란·말갈과 친하며 요서를 침범한다는 것, 셋째 여타 종족의 조공길을 차단한다는 것, 넷째 藩禮를 하지 않는다는 것, 다섯째 고구려 내정에서 强豪가 국권을 잡고 백성에게 혹독한 정치를 한다는 것 등이었다.398)≪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영양왕 23년.

 수군은 좌·우군 각 12군 도합 24군을 조직하여 총 113만 3천 8백 명이었는데 여기에 군량과 무기를 운반하는 餽運者가 그 배나 되었다. 이들 24군의 명칭을 각각 道라 하여 左第1軍은 鏤方道, 第12軍은 襄平道라 하였는데 단지 그것은 명칭일 뿐 실제 각군의 進軍路는 아니었다. 이들 군에는 大將과 亞將을 각 1인씩 두어 통솔케 했으며 기병 40隊와 보병 80隊로 편성하였다. 기병은 1대가 100명, 10대를 1團이라 했으며 보병은 4단으로 편성하여 각 단마다 偏將 1명씩을 두었다. 또 각 단마다 鎧冑·纓拂·旗旛의 빛깔을 달리하여 하루에 1군씩 출발시키되 40리 간격을 두어 40일 만에 출발을 완료케 하니 그 首尾가 이어지고 鼓角이 서로 들리면서 깃발이 960리에 뻗치었다고 한다. 당시 총지휘본부는 수 양제가 거느린 御營軍으로 12衛 3臺 5省 9寺로 나누어 내·외·전·후·좌·우의 6軍이 차례로 출발하여 그 대열이 80리를 이었는데 이같이 성대한 출병은 近古에 없었다고 하였다.399)≪資治通鑑≫권 181, 隋紀 5, 煬帝 上之下, 大業 8년. 그러나 수에서는 親征反對者와 反戰論者가 있었고,400)≪隋書≫권 78, 列傳 43, 季才 耿詢. 또 병사와 식량운반자 중에는 고역을 이기지 못해 群盜가 되는 자도 있었다고 하므로 비록 수의 軍勢가 대단했지만 수군의 戰意는 높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401)≪資治通鑑≫권 181, 隋紀 5, 煬帝 上之下, 大業 7년.

 이렇게 해서 고구려 영양왕 23년(612)에 수의 2차 침입이 시작되었고 그 開戰은 요하에서였다. 수군은 宇文愷에게 浮橋를 만들게 하여 渡河作戰을 개시하였다. 이 때 요하를 수비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수군의 침략에 완강히 항전하였다. 수의 대장군 麥鐵杖·호분랑장 錢士雄·孟叉 등 여러 적장을 죽였다는 점으로 보아 수많은 적병을 사상시키는 전과를 올렸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고구려군측에도 1만 명의 전사자가 있었으며 끝내 요하방어는 실패하였다. 요하를 건넌 수군이 곧 遼東城을 포위하자 고구려군의 거센 항전으로 3개월간이나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요동성 수비군은 성을 굳게 지키고 기회를 보아 나가 싸우면서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면 항복하겠다고 거짓 전하여 적의 공격을 이완시켜 여러 번 위기를 극복하였다. 또 이 주위에 있는 諸城도 굳게 지켰다. 따라서 별다른 전과를 얻지 못한 수 양제는 요동성 서쪽으로 수십 리 떨어진 六合城에 진을 치고, 于仲文·宇文述 등 9軍의 별동부대를 편성케 하여 평양을 直攻케 하는 새 전략을 사용하였다. 이 전략은 출병초에 左翊衛大將軍이었던 段文振의 주장이기도 했다.402)段文振은 출병초에 병사했다(≪資治通鑑≫권 181, 隋紀 5, 煬帝 上之下, 大業 8년).

 한편 수의 水軍을 거느린 右翊衛大將軍 來護兒는 바다를 건너 浿江(大同江)을 거슬러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지점까지 이르렀다. 이 때 고구려군이 저항했으나 수군에게 밀리니 수군은 승세를 타고 평양성으로 향하려 하였다. 여기서 내호아와 부총관 周法尙 사이에 전술상 異見이 있었는데 내호아는 주법상의 “諸軍의 도착을 기다려 진격하자”는 주장을 일축하고 정병 4만 명을 뽑아 평양을 직공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수의 수·륙 양군은 평양 근처에서 만날 약속을 미리 정한 듯하다.

 내호아군과 싸우던 고구려군은 평양성의 羅城(外城)에 있는 빈 절(寺)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고 거짓 패하면서 성안으로 적을 유인하였다. 적군이 입성하여 물화를 약탈하느라고 대오가 무너진 틈을 타서 고구려 복병이 달려가 급히 쳤다. 내호아는 겨우 죽음을 면했지만 4만 명은 일시에 섬멸당하여 도망간 수군은 수천 명에 불과할 정도로 고구려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이같이 수군이 평양성으로 육박하자 고구려는 境內의 병력을 대거 집결시켰는데 그 列陣이 수십 리에 걸쳐 있으니 이를 본 수의 諸將들은 두려워 떨었다고 한다. 이 때 고구려군을 지휘했던 장군은 建武(영양왕의 아우, 후일 榮留王)였는데 그는 驍勇이 絶倫한 인물로 높이 평가되었다.403)≪北史≫권 76, 列傳 64, 來護兒. “高元弟建 驍勇絶倫 率敢死數百人 來致師”라 했지만 수백 인이 4만 명을 전멸시켰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丹齋申采浩全集≫上, 268쪽에서는 建武의 戰功이 乙支文德보다 더 크다고 평가했다. 建武軍이 평양에서 적의 水軍 4만을 괴멸시킨 것은 수의 전략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 수군은 무기·식량을 운반하고 있었는데, 이를 망실하거나 육군에게 보급하지 못했다. 또 于仲文 등 諸軍(9軍)과 합류하지 못한 채 패배하여 그들의 합동작전도 무산되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군은 평양 교외 30리 지점까지 접근했던 우중문의 군사를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수의 제군은 요동에서 압록강 서쪽까지 진입했는데, 우중문·우문술 등 9軍으로 편성된 평양직공부대는 30만 5천 명을 통솔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병사는 1백일 분의 식량과 무기·의복을 지급받아 1인당 곡식 3石에 해당하는 중량을 운반해야 했다. 이에 군량을 버리는 자는 참형한다는 軍令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그 무거운 짐을 운반하기 힘들어 행군하면서 식량을 땅에 묻어버린 결과 도중에서 굶주리게 되었다.404)申采浩는 위의 책, 268쪽에서 “司馬溫公<通鑑考異>에 ‘來護兒의 糧船이 敗回하지 아니하였더면 宇文述의 薩水의 敗가 없었으리라’하였으니 대개 如實한 말인가 하노라”고 하였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요동 諸城의 고수에도 불구하고 적의 대병력이 평양을 향해 남하하여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에 적의 형세를 정탐하려고 항복한다는 구실로 大臣인 乙支文德을 적진에 파견하였다. 우중문 등은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이 오거든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수 양제의 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수군의 慰撫使였던 尙書右丞 劉士龍의 반대로 놓아주고, 이를 후회하여 다시 잡으려 했을 때는 이미 을지문덕이 압록강을 건넌 뒤였다.

 군량이 다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우중문은 군의 지휘체계가 1인에게 있지 않아서 적을 이기기 어렵다고 하였고, 수 양제는 우중문의 전술에 따르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우문술도 우중문의 진군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405)이 부분에 대해 李萬烈,<高句麗와 隋·唐과의 戰爭>(≪한국사≫2, 국사편찬위원회, 1977) 499쪽에서 “隋煬帝는 宇文述을 제쳐 두고”라 한 표현은 모호하다. “時帝以仲文有計畫 今諸軍諮稟節度 故有此言 由是述等不得已從之”(≪資治通鑑≫권 181, 隋紀 5, 煬帝 上之下, 大業 8년).

 을지문덕은 수군의 飢色과 지휘통제의 동요를 보고 그들에게 더욱 피로를 가중시켜 장거리로 유인하고자 宇文述軍을 맞아 하루 7번 싸워서 7번 패주하는 식의 후퇴작전을 이용하였다. 피로에 지친 적군은 더 싸울 수 없는 형편이었는 데도 勝勢를 타고 薩水를 건너 평양 교외 30리 지점까지 육박하여 산을 의지해 진을 쳤다.

 바로 이 때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의 戰功을 비웃는 내용의 五言詩를 전하며 수군이 물러나면 고구려 왕이 양제의 행재소에 나아가 入朝하겠다고 하였다.406)≪三國史記≫권 44, 列傳 4, 乙支文德. 이에 수군이 거짓 항복을 이유로 살수를 반쯤 건넜을 무렵, 을지문덕은 복병을 일으켜 적의 後軍을 맹공하였다. 적장 辛世雄을 격살하고 적의 대군을 함몰시켜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는 바 이를 고구려의 薩水大捷이라 한다. 처음 수의 군사 30만 5천 명 중, 하루밤낮으로 450리를 달아나 요동성에 돌아와 보니 겨우 2,700명뿐이었다고 한다.407)于仲文은 左翊衛大將軍, 宇文述은 右翊衛大將軍인데 다시 지휘권을 于仲文에게 맡도록 수 양제는 확인시켰다고 하겠다. 그런데 實戰의 패배자는 宇文述로 되어 있다. 을지문덕은 五言詩를 于仲文에게 보내고 旋師는 宇文述에게 요청했다. 패전의 책임은 양인에게 있지만,≪資治通鑑≫은 “獨繫仲文”이라 하면서 宇文述의 아들이 수 양제의 사위인 때문이라 했다. 또 乙支文德을 놓아준 劉士龍에게 패전의 모든 책임을 지워 斬刑하였다. 그러나 實戰과정상 우문술과 우중문의 역할이 모호하게 기록되었음은 분명하다.

 결국 수 양제는 엄청난 군사를 전사시키고 많은 무기를 탕진하며 戰意를 상실한 채 패퇴하였다. 고구려군은 요동에서 평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략을 모아 적을 격퇴했던 것이다.

 사상 유례가 드문 대병력을 동원해서 고구려군에게 패퇴당했던 수 양제는 다시 郭榮의 親征反對를 무릅쓰고 고구려 영양왕 24년(613)에 3차로 침입했다. 수 양제는 宇文述·王仁恭 등과 함께 군사를 통솔하고 3월에 요하를 건너 요동으로 진입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新城의 수비군 수만 명은 왕인공의 침공을 막아 성을 고수했고 遼東城 또한 20여 일을 포위당했지만 끝까지 항전하였다. 특히 요동성 침공에는 수 양제가 직접 지휘를 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攻城具인 飛樓·橦·雲梯·地道408)雲梯는 城을 올라가는 사다리, 地道는 땅 속을 뚫고 들어가는 기구이며, 飛樓는 공중에 높이 세운 집, 橦은 적진을 뚫는 수레라고 한다(李丙燾,≪國譯三國史記≫, 乙酉文化社, 1977, 315쪽 및 김종권 역,≪東國兵鑑≫, 한국자유교육협회, 1972, 62쪽 참조). 등을 사용하여 밤낮 쉬지 않고 사방에서 공격해 왔다. 이에 고구려군은 길이 15丈의 衝梯를 타고 성을 오르는 적병에 대항하여 단병접전으로 이를 물리쳤다. 또한 수군은 흙을 넣은 포대 1백만 개를 쌓아올려 魚梁大道란 것을 만들었다. 그 넓이는 30步이고 높이는 성과 같아서 적병들은 이것을 타고 올라와 싸우기도 하였다. 또 성보다 높은 八輪樓車를 만들어 魚梁道를 중간에 끼우고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해 왔다. 요동성군은 악전고투하며 방어했는데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다. 때마침 수 내부에서 反戰運動이 고조되어 禮部尙書 楊玄感의 반란이 일어나자 수군은 많은 무기와 식량을 버리고 물러갔다.

 고구려의 영양왕 25년(614)에도 수 양제는 百官들에게 고구려 침공을 의논하도록 명령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수군의 계속된 패배로 인하여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과 내부의 반전의식, 재정의 궁핍과 민심의 이반 등으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해 7월 수 양제는 懷遠鎭에 와서 募兵하려 했지만 징발된 병사조차 도망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평양을 공격할 목적으로 來護兒에게 水軍을 주어 卑沙城을 침입했지만 고구려군에 의해 쉽게 격퇴된 듯하다.409)그러나 史書에서는, 양현감과 내통했던 망명객 斛斯政을 수에 돌려주고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원하므로 내호아가 돌아갔다고 하였다(≪資治通鑑≫권 182, 隋紀 6, 煬帝 中, 大業 10년 7월).

 이상에서 영양왕 9년(598) 고구려가 요서지방을 선제공격한 데서부터 4차에 걸친 수의 침략과 고구려의 반격을 살펴보았다. 이들 전쟁과정은 침입하는 수군을 격퇴시켰다는 면에서 고구려의 일방적 승리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는 수에 대한 고구려의 적극적 공격이 아니라 소극적 방어에 성공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고구려의 對隋戰略은 기본적으로 자국의 독자권을 유지하여 수와 대등한 국제적 지위를 누리기 위한 목적으로 요서지방을 선제공격했던 것이라 믿어진다. 수가 침략하지 않던 장기간에 걸쳐 고구려가 한 번도 수를 공격한 일이 없다는 사실은 그 증거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대수전쟁 전략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먼저 지키고 뒤에 공격하여 적을 격퇴시키는 전술이 가장 많았다. 이는 요동성·신성 등에서 “嬰城固守”가 일관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둘째, 위의 전술은 淸野戰術을 수반했다는 점이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성 밖의 모든 백성을 성안으로 피란시켜서 고구려군의 항전을 돕게 하는 한편 적에게 노역·식량 등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410)≪北史≫권 76, 列傳 64, 來護兒.

 셋째, 伏兵을 일으켜 적을 급습하는 전술이었다. 이는 적을 단시일 안에 먼거리를 달려오도록 유인함으로써 적의 식량 부족과 피로를 초래케 한 다음 숨겨둔 북병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에서도 사용되었다.

 넷째, 게릴라전술이 동원되었다. 적과 직접 대결을 피하고 숨어서 기회를 엿보다가 적의 해이한 틈을 타서 습격하여 자주 적을 괴롭히는 전술이었다. 성문을 닫고 지키다가 성문을 열거나 성벽을 타고 내려가서 급습하기도 했다.

 그 어느 전술이든 城을 중심으로 침입한 적을 격퇴시키는 守城戰이 고구려 전술의 기본이었고 이것은 이후 대당전쟁에서도 거의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수의 침입은 극복했으나 곧 이은 당의 건국으로 고구려는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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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대수전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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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昊榮>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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