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Ⅲ. 수·당과의 전쟁
  • 2. 당과의 전쟁
  • 1) 당과의 관계

1) 당과의 관계

 수나라는 대내적 안정을 이룩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 중심의 국제질서를 확립하려다가 멸망하였다. 과도한 토목공사 및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백성의 고통이 가중되어 611년 이래 전국 각처에서 반항세력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들 중에 617년 晉陽(山西 大原縣)에서 起兵한 唐公 李淵이 여러 군웅과 연계하여 수를 무너뜨리고 당을 세우니(618) 그가 唐 高祖였다.

 당이 성립한 초기, 고구려의 대당관계는 표면상 이전의 대수관계와 유사했으나 그 내면은 아주 판이했다. 이 때는 고구려에 영류왕이 재위하였는데, 당은 돌궐 등 주변민족을 굴복시켜 가면서 한편으로 민심수습에 많은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고구려와의 전쟁보다는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411)申瑩植,<三國의 對中國關係>(≪韓國古代史의 新硏究≫, 一潮閣, 1984), 315쪽. 그런데 “평화적 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 문제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는 영류왕 2년(619) 이후 보장왕 원년(642) 경까지 매년 당에 1회 정도의 사신을 파견하며 교섭을 지속하였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양국의 교섭 내용을 살피면, 당에서는 고구려에 대해 평화공세를 취하여 은근히 압박하면서 당 자체의 민심을 수습코자 하는 二重의 효과를 노리고 있었다고 믿어진다. 즉 영류왕 5년에 당은 “지금 二國이 和親하여 義에 어긋난 바가 없게 되었다”면서 麗·隋전쟁 당시 전쟁포로를 상호 교환하자고 고구려에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인으로 중국에 억류되었거나 포로가 되었던 자들을 쇄환하는 한편 1만여 명의 중국인을 당으로 돌려보냈다.412)그러나 쌍방에서 포로 전인원을 교환한 것은 아니었다. 영류왕 24년에 唐使 陳大德이 고구려 경내를 순방하면서 수군으로 포로된 자들을 만났다는 기록이 보인다(≪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영류왕 5년). 이는 양국의 주민들에게 화해분위기를 느끼게 했을 것이며, 唐帝의 ‘恩德’에 대한 선전이 아닐 수 없었다.

 고구려는 영류왕 7년에 사신을 보내어 曆書를 요청하였는데, 당은 刑部尙書 沈叔安을 파견하여 “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國王”으로 책봉하는 동시에 도교의 道士가 天尊像(神仙像)을 가지고 와서 老子(道德經)를 왕과 국인에게 교설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당에 사람을 보내어 佛·老의 敎法을 배우도록 하였다. 당에서 고구려에 도교를 전한 참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당시 고구려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문화였다면 하나의 관심거리였을 것만은 틀림없다. 영류왕이 도교와 아울러 불교를 배워오게 한 점은 기존 불교계를 의식했거나 그 친밀성을 암시하는 조치였다고 해석된다. 그런데 보장왕 2년(643)에는 연개소문이 도교의 수입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당에 요청했는 바, 당 태종은 도사 叔達 등 8인과 노자의 도덕경을 보냈으므로 僧寺를 취하여 이들을 머물게 했다는 것이다. 도교는 당 고조가 좋아했다지만, 이런 문화전파를 통하여 고구려가 당에 매료될 수 있고 당의 권위를 보여주는 것이라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당이 도교를 고구려에 전파한 것은 문화적 기미정책으로서 당에 대한 고구려의 추종을 도모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도교사상에 매료되었던지 아니면 대당관계의 일환으로 받아들였던지 왕과 연개소문이 도교의 수입을 주장한 점으로 보아 그것이 對唐和親의 일환이었다고도 믿어진다.413)이에 대해서는 李萬烈,<高句麗 思想政策에 대한 몇 가지 檢討>(≪柳洪烈博士華甲紀念論叢≫, 1971)에서 고구려 사상계의 분열을 논했고, 李乃沃,<淵蓋蘇文의 執權과 道敎>(≪歷史學報≫99·100, 1983)에서 중국의 도교 흐름과 성격을 살펴 연개소문의 도교진흥책을 구체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는 도교를 연개소문정권의 사상적 무기로 삼아 왕권을 배척하려는 데 있었다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도교의 장려에 대한 불교계 반발이 사상계의 분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대당관계로 보면 연개소문도 “대당전쟁”만은 피해보려는 외교적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영류왕 11년(628)에는 고구려 地圖를 당에 보냈는데, 후일 당의 사신 陳大德이 고구려 지형을 實査했던 점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당에서 전략·전술에 이용할 목적으로 지도를 요청한 것이라 생각된다.414)소위 “封域圖”라는 것은 당의 요청에 의해 제공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영류왕 14년에는 당의 사신 長孫師가 와서 麗·隋전쟁 때 전사한 수군의 해골을 묻어주고 위령제를 지내는 한편 고구려가 수의 침략을 물리치고 세운 기념탑인 京觀을 헐어버리게 했다. 이런 행위가 영류왕 2년 전쟁포로 교환 당시 함께 진행되지 않고 이제 다시 추진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과거 당 고조의 대내적 민심수습책과 고구려에 대한 평화공세를 본받아 당 태종이 답습한 것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和親을 가장하여 고구려를 압박하는 것이었다. 특히 戰勝의 상징인 경관을 당의 요청에 의해 헐어버린 것은 평화적 화해의 표징일 수도 있지만 고구려인에게 더 없는 불쾌한 자극이겠으나 이를 감내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 내부에서는 일찍부터 고구려에 대한 臣屬 또는 정벌론이 대두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당 고조 7년(고구려 영류왕 7년 ; 624)에 고조는, 고구려가 수에 稱臣했지만 끝내 수 양제를 거역하였으므로 굳이 칭신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수의 遺臣으로 당시 侍中이었던 裵矩와 中書侍郞 溫彦博이 반론을 폈다. 周代에는 箕子國에 봉해졌었고 漢代에는 玄菟郡이었으며 魏晋 이전까지는 封域에서 가까이 있었으니 고구려가 칭신하지 않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항변함으로써 고조도 이를 수긍했던 것이다.415)≪舊唐書≫권 199 上, 列傳 149 上, 東夷 高麗, 武德 7년. 이 때의 裵矩의 말은
≪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영양왕 18년조에 실려있는데 배구가 수 양제에 했던 말과 매우 유사하다.
결국 당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재편하려는 패권주의의 지향에 있어서는 당도 수와 다를 바 없었으며 이런 주장은 唐帝를 둘러싼 측근세력일수록 강했다고 보인다.416)黃約瑟,<試論隋代對高句麗的認識>(≪高句麗文化國際學術會發表要旨≫; 延邊, 1993). 그리고 고구려가 칭신하여 藩禮를 행하지 않으면 四夷를 지배할 수 없기 때문에 정벌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런 가운데 고구려는 영류왕 23년(640)에 世子 桓權을 入唐시켰다. 이는 당의 평화공세가 영향을 미친 증거인지 모르나 고구려는 평화공존의 뜻을 당에게 충분히 보여준 것이며 외교적 성의를 다했던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은 職方郞中 陳大德을 파견했는데, 그는 고구려의 地勢와 방어체제를 샅샅이 살피고 돌아갔다. 그가 고구려 경내를 순방할 때 가는 곳마다 고구려 관리들을 물화로 매수하여 어디든지 마음대로 볼 수 있어 虛實을 살폈지만 고구려는 이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고구려 지도에 따른 실사를 마친 셈일 것이다. 더욱이 그가 돌아가 당 태종에게 보고하자, 태종은 수륙양면 작전에 의하여 고구려 정벌의 뜻을 피력하기에 이르렀다.417)≪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영류왕 24년.

 이같이 당의 평화를 가장한 문화적 기미정책 속에, 고구려도 對唐敵對意識이 높아져 그 대비책이 강구되었을 것이다. 이미 영양왕 말기부터 축조하기 시작했던 千里長城이 16년 만인 영류왕 14년(631)에 완성되어 동북의 扶餘城으로부터 서남의 바다에 이르렀다.418)≪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영류왕 14년. 이 장성은 수와의 전쟁을 마치고 착공된 점과 그 축조의 위치로 보아 당의 침입을 방어하여 국가를 수호할 목적이었음이 확실하다.419)이 천리장성은 扶餘城에서 新城·蓋牟城·遼東城·建安城·卑奢(沙)城으로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李萬烈,<高句麗와 隋·唐과의 戰爭>,
≪한국사≫2, 국사편찬위원회, 1977, 502쪽).
또한 수와의 전쟁 중 훼손되었던 요동지방의 성벽을 재축조하고 병력과 민호를 충원하여 수비를 강화했을 것은 능히 추측되는 바이다.

 그런데 고구려 內政에는 淵蓋蘇文의 쿠데타로 큰 변혁이 일어났다. 영류왕 25년에 중앙정계로부터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밀려났던 연개소문이, 大對盧였던 그의 아버지가 죽자 당연히 父職을 이어받을 차례였으나, 그의 성격이 포악하다 하여 귀족들이 반대하였다. 연개소문이 애원했으므로 막리지를 삼았지만 왕과 귀족이 연개소문을 죽이려고 모의했다. 이를 알게 된 연개소문은 部兵을 모아 校閱을 빙자하고 大臣들을 초청하여 1백여 명을 죽이고, 다시 왕궁으로 달려가서 영류왕을 시해한 다음 보장왕을 즉위시키고 그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420)≪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영류왕 25년 및 권 49, 列傳 9, 蓋蘇文. 또≪日本書紀≫권 24, 皇極天皇 원년조에는 “(작년) 9월에 大臣 伊梨柯須彌가 大王을 弑害하고 아울러 伊梨渠世斯 등 180여 명을 죽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大對盧와 莫離支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에 관하여 대대로와 막리지가 大人·大首長을 뜻하는 同一語로 보는 견해가 있고(末松保和,<新羅建國考>,≪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160쪽), 이 설에 따르면서도 사료에 보이는 ‘大臣’·‘大人’·‘大對盧’·‘莫離支’가 같은 것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막리지는 數名이 동시에 존재하고 정치적 권한이 國事에 한정되었지만 연개소문이 집권하면서 軍事權까지 장악하여 太莫離支가 되었다고 한다(請田正幸,<高句麗莫離支考>,≪朝鮮歷史論集≫上, 龍溪書舍, 1975, 120∼125쪽). 그러나 본래 對盧가 大對盧로 분화되어 연개소문의 父가 대대로였고, 막리지가 동시에 여러 사람이었으므로 太莫離支 또한 연개소문 이전에 분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었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연개소문가는 그 祖父 때부터 집권해 왔기 때문에 요서지방을 선제공격하여 대수전쟁을 야기시켰고 수의 침략을 물리친 대내외적 정치주도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연개소문가는 고구려의 독자성을 견지하려는 직선적 자주파이며 대수전쟁에 승리한 제일의 공로자였던 한편, 후일 고구려 패망의 遠因을 제공한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당시로서는 이렇게 빛나는 가문을 계승한 연개소문이 부직을 이어받아 정권을 장악하려는 욕망은 이해될만 하나, 그 동안 많은 반대세력을 갖게 된 데 문제가 컸던 것이다. 영류왕과 대신들이 연개소문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로 보아 국왕을 중심한 王黨派와 극심한 대립을 보였으며, 또 安市城主는 연개소문 집권에 不服했다는421)≪資治通鑑≫권 197, 唐紀 13, 太宗 中之下, 貞觀 19년. 점으로 미루어 중앙정계뿐만 아니라 지방에 이르기까지 친연씨파와 반연씨파인 왕당파로 분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연개소문파에는 동족인 연씨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므로422)또 666년에 신라로 망명한 淵淨土는 연개소문의 아우이므로 政亂에 위협을 느꼈을 것인데, 그는 연개소문가의 권력유지나 고구려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박약했다고 할 수 있다(李弘稙,≪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1, 304쪽). 정계의 분열상이 짐작된다. 이같은 반대파의 반발을 제압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政敵을 숙청함으로써 당시 고구려의 중요한 정치적 엘리트를 半減시키고 내외의 정책방향을 폭 넓게 논의·결정할 수 없는 경색된 분위기를 조성했을 것이다. 이는 향후 고구려의 변동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 온 것이다. 이리하여 폭압은 더욱 심해지고 일체의 반대의견이 묵살된 채 내외의 정책은 친연개소문파에 의하여 추진되었다.423)李乃沃, 앞의 글 참조.

 그런데 문제는 이런 政情이 대당정책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연개소문이 비록 대외강경파로 알려졌지만, 그도 대당전쟁만은 피해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즉 이미 앞에서 말한 도교 수입도 그 예이지만 보장왕 3년(644)에는 연개소문이 당에 白金을 보내고 또 관리 50명을 보내어 宿衛케 할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당은 이를 거부하고,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다는 점을 들어 연개소문을 비난하였다.424)≪三國史記≫권 21, 高句麗本紀 9, 보장왕 3년. 이런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강경한 대외정책이 불가피하였고 당에서는 고구려의 政亂을 침략의 기회로 활용하게 되었다.

 당의 대고구려정책은 이미 영류왕 7년(624)에 분명해졌지만, 보장왕 1년 말에는 당의 毫州剌史 裴行莊이 고구려정벌론을 제기했고, 이듬해에는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간 鄧素가 懷遠鎭에 戍兵을 증파하여 고구려를 압박하자는 주장도 제기하였다.425)≪資治通鑑≫권 196, 唐紀 12, 太宗 中之中, 貞觀 16년 및 권 197, 唐紀 13, 太宗中之下, 貞觀 17년. 이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당 태종은 “연개소문이 그 임금을 시해하고 國政을 오로지하니 진실로 참을 수 없다”면서 지금이라도 거란·말갈병을 동원하면 어떠냐고 고구려 침략의사를 朝臣들에게 타진하였다. 이에 長孫無忌는 연개소문이 자기의 큰 죄를 알고 당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수비를 엄하게 할 것이므로 그가 自安하여 驕惰함을 기다려서 정벌하자고 주장했다.426)≪三國史記≫권 21, 高句麗本紀 9, 보장왕 2년. 그도 고구려정벌론에 찬성하지만 가장 적절한 시기를 택하자는 신중론자였다고 하겠다.

 한편 백제의 빈번한 침입과 고구려의 압박을 받고 있던 신라는 선덕여왕 11년(642)에 金春秋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원병을 청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竹嶺西北의 영토 반환을 요구하여 실패하였다.427)≪三國史記≫권 21, 高句麗本紀 9, 보장왕 원년 및 권 5, 新羅本紀 5, 선덕왕 11년. 이에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백제에게 수십 성을 공취당하였으며 양국이 連兵하여 기어코 신라를 취하려 한다면서 원병을 청하였다.428)≪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선덕왕 12년. 당은 초기부터 삼국의 상쟁을 잘 알고 있었던 바, 신라는 고구려·당 사이의 대립관계를 의식하여 백제의 침공을 강조하면서도 백제·고구려가 連兵한 것처럼 꾸며서 당에게 적대의식을 조장시킴으로써 더욱 당과의 외교적 밀착을 시도하였다.429)李昊榮,<麗·濟連和說의 檢討>(≪慶熙史學≫9·10, 1982) 참조.

 당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고구려는 삼국의 평화와 국제질서에 큰 영향력을 가졌다고 판단했을 터인데, 백제와 연계되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당에게 더욱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신라를 당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이려 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까닭에 보장왕 3년(644)에 당의 司農丞 相里玄獎이 고구려에 와서 백제와 더불어 전쟁을 중지하라고 요청하면서 다시 신라를 치면 명년에 출병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당은 삼국의 상쟁에 중재자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신라를 두둔하여 끌어들이고 백제를 무마하며 고구려 정벌론에 입각하여 동방정책을 추진하였다. 여기서 연개소문은 현장에게 신라가 탈취해 간 땅을 돌려주지 않는 한 신라와 싸우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당의 권유를 완강히 거절하였다.430)≪三國史記≫권 21, 高句麗本紀 9, 보장왕 3년. 또 당에서 蔣儼을 파견했지만 그를 굴에 가두고 위협하였다.431)≪三國史記≫권 49, 列傳 9, 蓋蘇文.

 이제는 양국이 서로 상대방의 사신을 위협하고 벌할 만큼 대립이 날카로워지면서 외교적 타협은 결렬되었다. 그 동안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까지도 고구려의 독자성이 유지되는 한 전쟁만은 피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하였으나 당이 전쟁을 택한 것이다. 이것이 고구려의 대당외교가 이전의 대수외교와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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