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3. 경제구조
  • 2) 조세제도
  • (1) 조(租)와 조(調)

(1) 조(租)와 조(調)

 고구려의 조세의 내용은 비교적 구체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곧≪周書≫와 ≪隋書≫의 高麗傳에 전해지고 있는 내용이 그것이다.

 賦稅는 絹, 布 및 粟으로 내는데 그 가진 바에 따르며, 빈부를 헤아려 차등있게 내도록 한다(≪周書≫권 49, 列傳 46, 異域 高麗).

人은 布 5필과 穀 5석을 稅로 내며, 遊人은 3년에 1번 세를 내는데 10인이 細布 1필을 같이서 낸다. 戶마다 1석의 租를 내며, 차등호는 7두, 하등호는 5두를 낸다(≪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高麗).

 위의 두 내용을 통해 보면 노동력을 징발하는 부역을 제외한 고구려 후반의 조세수취의 대강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두 내용은 일견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듯도 하다.

 ≪주서≫에 전해지는 기록에는≪수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遊人 관련 조항은 전혀 없다. 이 조항이 없는 것 이외에도≪수서≫의 기록에는 사람마다 매년 포 5필과 곡 5석을 낸다고 한데 비하여,≪주서≫에는 견·포·속 중에서 그 가진 바 즉 해당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물자로 세를 낸다고 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중국이나 우리 나라 고·중세의 수취에서는 가정의 수공물인 베와 농사의 산물인 곡식을 함께 세로 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더구나 고구려의 영토내에서 衣와 食생활을 지역의 산물로 자급하지 못할 만한 지역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수서≫의 기록에 따라 베와 곡물을 함께 세로 냈다고 보인다. 隋는 고구려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만큼 고구려의 국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수집에 노력했던 것은 자명한 일이므로 수나라는 고구려의 조세제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北周는 지리적으로도 우리의 삼국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외교관계도 그리 활발하지 않았던 점도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수서≫가 전해 주는 내용이 고구려 후반 수취제의 실상을 보다 자세히 전해주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수서≫의 내용은 보다 구체적인 자료에 의하여 조세수취의 실상을 전해주고 있고, 그에 비하여≪주서≫에서는 고구려 조세수취의 대강의 윤곽을 전해주고 있다고 보면 두 기록의 내용이 모순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북주(557∼581)와 수(581∼618)는 곧바로 이어진 중국의 왕조였으므로 이들 왕조가 있었던 시기의 고구려의 조세수취의 내용이 크게 다를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도 하다.

 ≪수서≫고려전의 조세관련 조항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수취의 대상자가 人과 遊人으로 나누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양자의 세액을 비교해 보면 인은 일반 백성임을 곧 알 수 있다. 매년 세금을 내고 있음은 물론이고 이들이 부담하는 세액의 양으로 보아도 이들이 내는 세금이 국가 재정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유인은 국가로부터 별도의 취급을 받고 있는 색다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인들과는 달리 곡식을 세로 내지 않고 있으며 1년마다 세를 내는 것이 아니라 3년 마다 세를 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10명이 細布 1필을 내고 있다. 세포는 가는 실로 짠 고운 베를 말하는 것인데 이 수공품은 일반 백성들이 내는 5필의 포와는 다른 특별한 베이다.

 유인은 놀고 먹는 자, 여행객 등의 사전적인 뜻을 가진다. 그런데 놀고 먹는 자라는 뜻 속에는 빈둥거리는 자라는 뜻도 있는 한편 재산이 없어 일정한 산업이 없이 사는 자라는 의미를 갖는 듯도 하다. 이같은 점에서 이 유인을 고구려사회의 발전에 따라 사회적으로 존재하게 된 빈민층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제시되고639)白南雲, 앞의 책, 191쪽. 이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져 온 바 있다.

 그런데 유인을 빈민으로 보는 견해는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우선 고구려라는 고대국가가 일반민에게는 곡 5석과 포 5필이라는 다소 과도하게 보이는 세액을 부담시키면서 빈민들에게는 3년에 한번 10명당 고운베 1필을 부담시켰을까 하는 점이다. 고대왕국이 이같이 빈민들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정책을 폈는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이는 고대왕국의 성격상 거의 불가능한 사실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부담하는 세액을 비교해 보면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는 두 사회적 존재가 같은 사회의 성원내에서 순전히 경제적인 분화에 의해서 나타났다고 볼 때, 인과 빈민의 중간 단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이들은 신분 혹은 종족적으로 분별되었던 성원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 중·후반의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대국으로서 다양한 종족에 의하여 주민이 구성되었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에는 본래의 5부민 뿐만 아니라 동옥저나 부여계 그리고 韓族 및 거란·말갈 등 다양한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중 거란과 말갈을 제외한 종족들은 종족적으로 유사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체제의 발전과 더불어 이미 같은 고구려인으로 되어져 갔다.

 이들에 비하여 말갈과 거란 특히 고구려내에 다수 살고 있던 말갈족은 종족적 차이에서 쉽게 고구려인화하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집단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수나라나 백제, 신라에 대한 군사작전에 까지도 독자적인 형태나 혹은 고구려군의 지휘하에 있더라도 나름의 군사체제를 유지한 채 작전에 임하곤 하였다. 이들이 이같이 고구려내에서 여전히 별도의 존재로 있었음은 국제적으로도 인지되어 隋文帝가 嬰陽王 8년(597)에 고구려에 보낸 외교문서에도 나타나 있는 실정이다.640)≪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高麗.

 그러므로 말갈은 물론 고구려의 세력하에 있었던 일부 거란족들이, 고구려내에서 종속된 종족으로서 다소 특수한 위치를 가지고 살고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들은 고구려인들이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데 비하여 유목이나 반농반목 상태에 있었으며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집단생활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이같이 이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생활양태와 문화를 영위하면서 세력집단으로서 존재한 만큼 당시의 민감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 속에서 군사력으로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단순히 약탈의 대상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군사적 균형을 깰 수도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로서는 이들을 달래서 고구려의 군사력의 일원으로 남도록 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이들에 대하여 착취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존립 기반을 보장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구려의 부용집단으로서의 성격을 또한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그들로 하여금 종속된 집단으로서 고구려에 대하여 충성을 표시토록 하기도 했다. 국제적인 세력대결이라는 현실적인 면과 고구려와 이들 집단간의 주종관계의 명분이 만족되는 선에서 양자의 관계는 정립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양자의 관계는 이들 부용집단들이 고구려에 납부하는 공물적인 성격의 조세에도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다시≪수서≫의 遊人관련 조세 조항을 보도록 하자. 유인이 3년마다 세를 내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이것은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고 불교나 율령을 전해준 바 있는 중국 前秦의 대외관계에서도 보이는 바 부용집단이 종주국에 3년에 한번씩 공물을 바치고 있는 사실과 같은 내용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리고 10인당 세포 1필을 낸다는 사실도 유인이 말갈 등 부용집단일 가능성을 높여 준다. 3년에 10인이 1필의 포를 낸다는 것은 만약 유인이 빈민이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한다. 빈민들의 정착성은 매우 약할 것인데 빈민들을 3년마다 10명 단위로 수취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별 효용이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말갈이나 거란 등은 집단적인 부락을 이루고 고구려인들과는 별도의 장소에서 거주하고 있었을 것인 만큼 이들 집단적인 주민들에 대하여 10명당 1필의 세포를 걷는다는 것은 매우 합당한 수취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세포란 가는 실로 짠 고운 베를 말하는데 이는 흔히 주종집단간의 공물로 사용된 사실이 있어 유인의 존재를 규명함에 큰 도움을 준다.<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백제를 치고 백제왕의 항복을 받은 고구려군은 백제로부터 1천의 노비와 1천 필의 세포를 받은 바 있다.

 아울러 생활상이나 고구려와 이들 집단간의 관계에서 보더라도 부용집단을 본래의 고구려인들과는 구분하여 유인이라고 할 만하다. 말갈이나 거란 등의 종족들이 유목이나 반농반목의 생활을 했던 만큼, 정착하여 농업을 주생업으로 한 일반 고구려인들을 인이라고 할 때 이들을 유인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말갈 등의 부용집단은 본래의 고구려계 주민과는 달리 종족적으로 다르며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서는 고구려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客的인 존재였던 만큼 이들을 주종족인 고구려인들과 구분하여 객족으로 보아 유인이라 하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다종족국가인 고구려에서는 농업에 종사하며 고구려인으로서 거의 일체감을 갖고 있는 일반 주민들과, 유목이나 반농반목의 생활을 하면서 종래의 전통적인 집단생활을 하며 고구려에 부용되어 있는 말갈 등의 주민들에 대하여 구분을 둔 조세수취를 시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641)이상 유인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은 아래의 논문이 참고된다.
金基興,<6·7세기 高句麗의 租稅制度>(≪韓國史論≫17, 서울大 國史學科, 1987), 5∼30쪽.

 이제≪수서≫의 조세 조항의 말미에 보이는 戶租에 대하여 살펴 보자. 우선 주목되는 것은 6·7세기 고구려에 3등호제가 실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국가 건국 이래 지속된 주민들의 사회 경제적 분화가 이 때에 이르러 3등호제로 제도화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호조는 곡식 즉 조(좁쌀)로 각호의 재산의 등급에 따라 5두, 7두 그리고 1석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호조는 앞에서 본 유인에게는 해당이 없는 것이었다. 이같은 점은 조세관련 조항의 전체 문맥에서 알 수 있다. 아울러 앞서 본 바와 같이 유인들은 아직도 공동체적 성격이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집단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내에는 호등을 구분할 만한 경제적인 분화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에게는 고구려 정부의 직접적인 통치가 미치지 못하고 자신들의 전통과 형편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3등호제를 편제할 만한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농업을 주산업으로 하여 경제적인 분화를 지속해 온 본래의 고구려 주민들에게서 3등호제는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 행정력의 체계화와 재정수요의 확대가 호등제의 제도화를 가능케 했음도 물론이다.

 이같이 호조는 고구려의 일반민들에게 매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조항의 앞 부분에 나오는 매 인당 내고 있는 곡 5석과 포 5필과, 이 호조의 양을 비교하여 보면 두 세목의 비중은 물론 그것들의 출현의 선후를 알 수 있다. 호조의 세액은 사람마다 내는 세에 비하여 현저히 적었다. 이것은 호조가 부수적인 세목인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호조는 고구려 후반에 와서 사회 경제적인 분화에 의하여 드러나게 된 3등호제를 기준으로 하여 수취되고 있는 점도 주목되어야 한다. 이는 이 호조가 고구려의 후반기에 와서야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아울러 호등별 세액의 차이가 매우 적은 점도 이 제도의 출현이 오래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삼국시대말의 발전상을 수렴하고 등장한 통일신라에서 9등호제가 실시되고 있었던 점도 고구려의 3등호제가 삼국시대 후반에 와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 근거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이같은 점에서 고구려의 4·5세기 경의 조세수취의 실상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후반에 나타나고 있는 3등호제에 의한 호조를 제외한, 인두세적인 매 인당 곡 5석과 포 5필에 가까운 세액이 주민 일반에게 재산의 차등이 문제되지 않은 채 부과되고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주민들간의 사회 경제적 분화가 지속되어 오고 있었지만 고구려 중반까지는 아직도 그 차이가 세제에 반영할 정도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이같은 분석 결과를 통하여 고구려의 租와 調의 내용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즉 고구려에는 국가가 성립된 단계 이래 일반민들에게 농업의 생산물인 곡식 즉 조(좁쌀) 일정량과 각 가정의 수공물인 포 일정량을 현물로 징수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세목의 구분에 따른다면 곡물로 내는 세목은 租라고 할 수 있으며 포의 납부는 調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수취는 적어도 고구려 중기까지는 그 형태가 지속되었다. 주민들간의 사회 경제적 분화가 지속되고 있었지만 그 차이가 조세수취에 반영되는 것은 후기에 가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여기서 곡 5석과 포 5필을 내는 이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가장으로서의 男丁을 말할 것이다. 부가세인 호조가 호마다 매겨지고 있고 고구려사회의 기본적인 경제 주체가 개별호였기 때문에 특별한 언급이 없지만 이같이 많은 세액을 부담할 수 있는 존재는 호주인 남정일 것이다. 고구려의 조세가 갖고 있는 인두세적 성격은 공동체적 성격을 다분히 가지고 있던 지연 및 혈연적 공동체인 那를 기반으로 국가가 구성된 데서 연유되었을 것이며, 사회 경제적 분화의 점진성에서도 그러한 수취액이 상당기간 부과될 수 있었을 것이다.642)김기흥, 앞의 글(1992), 121쪽.

 후기에 이르면 국가의 재정 수요의 증가를 감당하기 위하여, 사회 경제적 분화의 심화에 따라 3등호제에 의한 戶租가 종래의 인두세적 수취에 부가되게 되었다. 그러나 호조의 차액은 매우 적어 재산의 차등을 제대로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는 상등호층의 양보가 미흡했던 사실을 보여 준다. 또한 후기에는 말갈이나 거란 등 고구려에 부용되어 국제적 세력대결에서 고구려에 큰 무력을 제공하고 있던 종족들에 대하여 상징적인 수취를 하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遊人이라 보이는 바,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관계 속에서 이들이 가진 특수한 위치로 인하여 이같은 선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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