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Ⅱ. 백제의 변천
  • 1. 한성시대 후기의 정치적 변화
  • 1) 한강유역의 상실
  • (2) 개로왕대의 왕권강화 시도와 파탄

(2) 개로왕대의 왕권강화 시도와 파탄

 비유왕이 죽은 후 개로왕(455∼475)이 즉위하였는데, 그의 즉위과정도 결코 순탄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삼국사기≫에는 이례적으로 개로왕 즉위초부터 14년까지의 기록이 없고,176)千寬宇,<三韓의 國家形成(下)>(≪韓國學報≫3, 1976), 139쪽. 또 개로왕 부친의 유골이 무덤조차 조영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고 하는 점, 그리고 고구려군에 의해 한성이 공략당할 때 개로왕을 죽인 再曾桀婁와 古爾萬年이 백제에서의 어떤 정변에 연루되어 고구려로 망명한 자였다는 점177)≪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개로왕 21년 9월. 등이 지적될 수 있다. 개로왕의 옹립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정치세력은 일부 왕족과 목씨세력 등으로 여겨진다. 즉 개로왕이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데 큰 공로가 있는 백제의 중신 11명을 대상으로 劉宋에 작호의 제수를 요청하였는데(458),178)≪宋書≫권 97, 列傳 57, 百濟國.
한편 盧重國은 개로왕에 대한 작호 수여의 요청은 대외교역에 있어서 기득권 인정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였으나(<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韓國史論≫4, 서울大, 1978, 112∼113쪽), 이는 작호수여가 갖는 부차적인 의미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이는 지배세력의 신분서열을 체계화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8명의 왕족을 제외하고 목씨세력으로 보이는 沐衿이 일반 귀족 중 가장 높은 서열인 제3품 龍驤將軍으로 제수받았던 데에서 짐작할 수 있다.

 개로왕대는 대내적으로 대성귀족 세력들의 발호를 제어하여 왕권 중심의 지배질서를 확립하고, 대외적으로는 더욱 첨예화된 고구려와의 군사적 긴장관계에 효과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어려운 시기였다. 개로왕은 즉위 초의 왕위계승 분쟁을 수습하고 왕권의 지배기반을 넓히기 위해 왕족 중심의 왕권강화책을 펴나가게 되었다. 상좌평에 그의 동생인 文周를 임명하여 왕실세력의 결속을 다지게 하고, 또 다른 동생인 昆支에게는 기존의 대성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병권을 장악케 하는 등179)李道學, 앞의 글(1985), 13쪽. 왕족을 중용하여 친정체제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리고 기존의 귀족 중심의 연합체제를 고수하려는 진씨·해씨·목씨 등과 같은 대성귀족세력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미 살폈듯이 유송에 작호 제수를 청한 중신들이 대부분 왕족이었다는 데서 당시 왕족의 정치적 지위를 엿볼 수 있다. 개로왕의 동생인 문주와 곤지가 行輔國將軍과 行征虜將軍左賢王에 각각 보임되고 있어서180)李基東,<中國史書에 보이는 百濟王 牟都에 대하여>(≪歷史學報≫62, 1974), 21쪽. 작호 제수의 대상자 중 높은 서열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곤지는 흉노와 같은 북방의 유목기마민족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군주(單于·可汗)의 다음가는 자리인 좌현왕에 보임되고 있는 것181)坂元義種,≪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吉川弘文館, 1978), 69쪽.을 보면 개로왕의 권력기반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개로왕 18년(472) 북위에 청병사로 파견된 長史 餘禮는 ‘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라는 작호를 겸대하고 있는 것182)≪魏書≫권 100, 列傳 88, 百濟.으로 보아 그는 왕족이면서도 개로왕과 통혼관계를 맺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왕족 사이에 근친혼이 행해졌다는 것은 기존의 왕비족의 지위뿐 아니라 정치 운영상의 변화를 시사해 주는 것으로 주목된다.

 이와 같이 개로왕대에는 왕족이 상좌평과 같은 요직은 물론 병권과 외교권까지 독점하여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개로왕은 천명적 질서에 가탁하여 스스로 대왕이라 자처하고 그 신료들을 王·侯·太守로 분봉하여 백제류의 천하질서를 갖추면서 왕권의 전제화를 모색해 나갔다.183)梁起錫,<5세기 百濟의 王·侯·太守制에 대하여>(≪史學硏究≫38, 1984), 64∼65쪽.
한편 다음의 글들은 이 왕·후제를 지방통치체제와 관련시키고 있는데 이는 왕권을 정점으로 해서 중신들을 서열화하기 위한 관직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末松保和,≪任那興亡史≫(六興出版社, 1961), 109∼114쪽.
坂元義種, 앞의 책, 99∼102쪽.
金英心,<5·6세기 百濟의 地方統治體制>(≪韓國史論≫22, 서울大 國史學科, 1990), 73∼90쪽.
아울러 궁성의 수축, 왕릉의 조영, 한강변 蛇城의 동쪽에서 崇山의 북쪽에 이르는 치수와 대토목공사를 착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의 힘을 과시하였다.184)대규모 역사를 전제권력의 과시와 관련시킨 다음의 기사가 참고된다.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바로서 궁전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위엄을 보이겠는가”(≪三國史記≫권 49, 列傳 9, 倉助利).

 한편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대처하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다각적인 외교책을 강구하였다. 신라와는 비유왕 7년(433)에 맺은 나제동맹체제를 기본 축으로 하여 고구려의 남진에 대처하였고, 개로왕 원년(455)에는 신라의 원병과 함께 고구려군을 격퇴하기도 하였다.185)≪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왕 39년. 동왕 7년에는 왕제 곤지를 일본 河內의 近飛鳥地方에 파견하여186)≪日本書紀≫권 14, 雄略天皇 5년 4월. 유사시에 청병을 대비하여 외교관계를 긴밀히 하였으며, 勿吉과도 연합하여187)≪北史≫권 94, 列傳 82, 勿吉. 고구려를 측면에서 견제하고자 하였다. 남조인 劉宋과도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이례적으로 남조일변도의 외교책에서 벗어나 고구려와 긴밀한 외교교섭을 맺고 있는 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기도 하였다.188)≪魏書≫권 100, 列傳 88, 百濟. 이러한 대고구려 봉쇄망을 형성하려는 백제의 전략은 도리어 고구려를 자극시켜 그 침입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다.

 개로왕의 왕족을 중심한 왕권강화책은 결국 대성귀족세력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특히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침공이라는 대외적인 요인과 상승작용하여 백제는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부득이 웅진으로 남천하는 의외의 결과를 빚어냈다. 개로왕 자신도 “나 자신의 과오로 인하여 백성도 줄어들고 군대도 약해졌다”라고189)≪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개로왕 21년 9월. 후회하였듯이 무리한 토목공사를 빈번히 일으킴으로써 국력을 낭비하고 민심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고이만년과 재증걸루와 같은 일부 중앙귀족의 이탈을 가져왔다. 결국 개로왕 24년(475) 9월 고구려의 장수왕은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갑자기 들이닥쳐 왕도인 한성을 7일만에 함락시켰던 것이다. 이 전쟁으로 백제는 영토의 손실과 함께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입게 되었다. 개로왕 자신뿐 아니라 태후·왕자들이 고구려군에 의해 살해되었고,190)≪日本書紀≫권 14, 雄略天皇 20년. 8천여 명의 인민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한성을 포함한 한강유역 일대를 송두리째 고구려에 빼앗기게 되었다. 더구나 백제 왕실의 대제전으로서 범부여족의 결속을 다지고 동명의 정통 계승자임을 표방하는 동명묘 제사는 왕도 한성을 빼앗김으로써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191)盧明鎬,<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歷史學硏究≫Ⅹ, 전남대, 1981), 45∼46쪽. 개로왕대에 왕권강화를 위한 이념으로 불교를 크게 숭신하였기 때문에 “建邦之神”(≪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16년 2월)으로 지칭되는 동명묘 배알을 중단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文東錫, 앞의 글, 44∼45쪽). 특히 개로왕의 전사는 그 동안 추진해 온 왕권강화책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백제는 웅진천도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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