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Ⅱ. 백제의 변천
  • 1. 한성시대 후기의 정치적 변화
  • 2) 백제와 신라의 동맹

2) 백제와 신라의 동맹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맺으면서 백제와 적대관계를 유지해 왔다.<廣開土大王陵 碑文>에 의하면 신라는 내물왕 44년(399)에 고구려의 보병과 기병 5만 명의 구원을 받아 자기 나라에 침입해 온 백제·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가야지역에까지 추격하여 섬멸한 적이 있었다. 당시 신라가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갖게 된 것은 우선 국초부터 빈번히 침략을 일삼던 왜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왜와 동맹관계에 있는 백제보다 고구려에 접근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내물왕계 김씨 세습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경쟁세력인 석씨·박씨세력 및 다른 왕실세력 등을 견제, 또는 정략적으로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눌지왕의 왕위계승 과정에서 고구려세력이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192)≪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왕 즉위년.
≪三國遺事≫권 1, 紀異 2, 제18 實聖王.
고구려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신라와 화친을 맺고 고구려와 적대관계를 갖게 된 것은 비유왕 7년(433)의 일이었다.193)≪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비유왕 7년 7월, 8년 2월·9월·10월 및 권 3, 新羅本紀 3, 눌지왕 17년 7월, 18년 2월·9월·10월. 이 때의 화친은 백제의 적극적인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해 7월에 백제가 화친을 먼저 제의하였고, 이듬해 비유왕이 양마 2필과 흰 매를 신라에 예물로 보냈다. 신라의 눌지왕도 이에 대한 화답으로 황금과 명주를 백제에 보냄으로써 양국간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로써 나제양국은 그 동안의 적대관계를 버리고 화친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백제가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게 된 배경은 무엇보다도 백제의 대고구려 봉쇄전략의 차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의 평양천도에 따른 남진정책에 대응하기 위하여 다각적인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남조국가인 송과 긴밀한 외교적 교섭을 전개하였다. 평양천도(427)부터 한성함락(475)에 이르기까지 백제와 송의 외교적 교섭은≪宋書≫百濟傳이나≪南史≫宋本紀에 의거해 볼 때 9회로 나타나고 있어서 양국간에는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북위와 송의 남북조 양국에 대해 양면외교를 펼치고 있던 고구려를 외교적으로 견제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백제는 신라와 수교한 이후에도 왕제 곤지를 파견하여 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461),194)≪日本書紀≫권 14, 雄略天皇 5년 4월. 새외민족인 勿吉과도 연합하여195)≪北史≫권 94, 列傳 82, 勿吉. 고구려를 배후에서 견제하고자 하였다. 더구나 백제는 남조 일변도의 외교책에서 벗어나 고구려와 긴밀한 교섭관계를 맺고 있던 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의 정벌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의 왕녀를 북위 현종의 후궁으로 맞아들이는 문제로196)≪魏書≫권 100, 列傳 88, 高句麗. 인하여 양국이 잠시 불편한 관계로 접어들자 백제 개로왕은 이 기회를 틈타 북위에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외교활동을 통해서 백제는 중국의 북위와 송·신라·가야·왜·물길을 연결하는 다각적인 외교를 전개하여 대고구려 봉쇄망을 구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백제는 당시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신라를 고구려로부터 유리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신라에 접근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신라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중반경까지 대체로 고구려군의 출병(400)과 주둔,197)≪中原高句麗碑≫에 보이는 “新羅土內幢主”라는 문구와≪日本書紀≫雄略天皇 8년 2월조의 기사를 통해서 당시 고구려군이 신라 영토내에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왕자 實聖과 卜好의 인질파견, 불교 수용198)≪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법흥왕 15년.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일정하게 고구려의 정치적·문화적인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신라가 성장·발전하는 데에는 고구려의 정치적·군사적 간섭이 오히려 제약이 되는 실정이었다. 나제간의 화친은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자립화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나제간의 화친은 백제의 고구려에 대한 봉쇄전략과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신라의 필요성에 따른 양국간의 이해가 합치되어 이루어진 산물로 이해된다. 이 일로 신라는 고구려와의 동맹관계에서 벗어나 친백제정책으로 선회하였기 때문에 이후 삼국의 항쟁사에서 큰 영향을 미쳐 고구려와 나제연합의 대결구도를 설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5세기 후반 삼국의 정세는 힘의 우위에 선 고구려가 전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략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199)金瑛河,<高句麗의 巡狩制>(≪歷史學報≫106, 1985), 47∼50쪽. 그러나 이 시기 고구려와 백제간의 전투는 4회인 반면에, 고구려와 신라간의 전투는 悉直原(삼척)에서의 고구려변장 살해사건을 계기로 하여200)≪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왕 34년 7월. 5세기 말까지 모두 8회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주로 신라를 공격목표로 군사적 공세를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제양군이 연합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사례도 각각 3회씩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백제는 고구려의 대대적인 한성침공과 같은 국가 존망의 위기로부터 신라의 구원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신라는 소지왕 3년(481)에 彌秩夫(홍해)까지 쳐들어온 고구려와 말갈로부터 왕도가 위협당하자 백제와 가야의 구원을 받아 이를 격퇴시킨 일도 있었다.201)≪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소지왕 3년 3월. 이처럼 나제양국은 어느 한쪽의 힘만으로 고구려의 침략을 막지 못할 경우 상호 군사적 요청으로 공동 대응하는 관계로 발전시켜 나갔다. 나제간의 우호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여 군사동맹관계로 발전시킨 것은 백제 동성왕과 신라 소지왕 때의 일이었다. 소지왕은 동성왕의 요청에 따라 이벌찬 比智의 딸을 보내어 혼인시킴으로써(493)202)≪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소지왕 15년 3월. 양국은 혼인관계를 통하여 군사동맹 관계를 한층 공고히 하게 되었다.

<梁起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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